<3·1절 기념 특별공연>
극단 큰들은 3·1절 103돌이던 2022년 3월 1일 오후 2시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 앞마당에서 마당극 <최참판댁 경사 났네> 197회 공연을 했다. 3·1절 기념 특별공연이다. 2020년 10월 31일 하동에서 195회 공연을 했고, 2021년 7월 2일 진주에 있는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에서 196회 공연을 한 뒤 8개월 만에 다시 열린 것이다. 2020년에는 새 작품 <정기룡>을 공연하느라 <최참판댁 경사 났네>는 예년에 견주어 적게 공연했다. 특히 2021년에는 하동에서 공연이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효자전>, <오작교 아리랑>이 각각 2018년 7월, 2021년 6월에 200회를 돌파했는데 이 작품은 아직 200고지를 올라서지 못하고 있다.
극단 큰들은 3·1절 기념 공연을 하동에서 할 것이라는 사실을 2월 21일 페이스북에 먼저 공지했다. 올해 첫 공연이자 하동에서는 2년 만에 열리는 공연을 알릴 때의 설렘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최참판댁 경사 났네>에서 사용하는 소품들 사진을 올려놓고는 “얼마만의 최참판댁 공연인가요. 정말 설레고 기다려집니다. 하동으로 봄 마중 오세요. 이른 봄 꽃 맞이도 하고 마당극도 신나게 즐기고, 100여 년 전 그날로 돌아가 태극기도 힘차게 흔들어 보아요^^”라고 썼다. 나는 즉각 달력에 동그라미를 했다. 얼마나 기다려온 날인데….
큰들은 2월 28일, 그러니까 3·1절 하루 앞날 다시 한번 공연 소식을 전했다. 하동에서 찍은 매화 사진과 함께 올린 글은 이러하다. “연습하러 간 하동은 봄날이었어요. 매화가 활짝 피었어요. 매화꽃도 구경하시고 저희 마당극도 보시구요. 많이들 오시어요~ 기다릴께요오~ ^^” 사진 속 배우들은 ‘22년 극단 1팀 첫공 홧팅’이라고 적은 팻말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그들의 표정은 환하다. 밝다. 마당극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관객을 끌기 위해 벌이는 버나놀이 연습 장면도 보인다. 진지함이 묻어난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2월 27일 올라온 소식은 마음을 아프게 했다. 바로 극단 큰들의 주연 배우 김상문 씨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다. 이 소식을 읽는 순간 공연을 예정대로 할 수 있을까 무척 걱정했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댓글조차 달 수 없었다.
왜냐 하면 김상문 배우는 <최참판댁 경사 났네>에서 맨 처음 버나놀이를 할 때부터 줄곧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이 모내기를 하는 장면에도 함께하고 임이네와 강청댁이 싸울 때에는 “스트라이크~!”를 우렁차게 외치기도 한다. 어린 서희가 간도로 쫓겨가는 장면에서는 서희를 모시고 가는 길상이 역할을 맡는다. 그 이후 서희와 결혼도 하고 독립운동도 한다. 일본군에 잡혀갔다가 광복 후 극적으로 되돌아온다. 마지막 마당극 마무리 인사말도 도맡아 해왔다. 한 사람이 많은 역할을 한다. 당연히 대사가 많다. 그런데 공연을 며칠 앞두고 병원에 입원을 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2월 21일 밤에 극심한 통증을 이기지 못해 구급차를 불렀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극단 큰들은 위기에 강하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겨 배우가 공연에서 빠져야 하는 일이 생기면 다른 배우들이 그 역할을 대신 한다. 한 사람이 빠진 자리를 한 사람이 대신하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이 역할을 나눠서 문제를 해결한다. 가슴 아픈 기억이지만 2019년에도 <최참판댁 경사 났네>의 조준구 역할을 맡은 배우가 갑자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불과 며칠 만에 그의 역할을 다른 배우가 맡아 했다. 다른 작품에서도 ‘배우교체’가 순조롭고도 감쪽같이 진행되었다. 나처럼 날마다 공연을 보러 다니는 사람은 어떤 배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짐작하지만 그렇지 않은 관객은 그 흐름의 차이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렇게 바뀐 배우는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해 나간다. 잠시 자리를 비운 배우는 어느새 돌아와 다른 역할을 맡기도 한다. 그런 체제가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잘 짜여 있다. 큰들은 그런 곳이다.
아무리 그래도 걱정은 걱정이었다. 안타까움은 안타까움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김상문 배우의 건강을 기원했다. 코로나 때문에 병원에 문병을 갈 수 없는 상황이라서 어디에라고 물어볼 수도 없이 마냥 마음으로만 응원하고 격려했다. 하루빨리 툴툴 털고 일어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 하는 표정으로 마당판에서 만나게 되기를 기원했다. 그런 한편으로 ‘그럼 길상이 역할을 누가 하지?’라는 궁금증이, 미안하게도,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배우들 한 명 한 명을 떠올려 보았다. 누가 한들 무슨 상관이랴만, 그래도 남달리 관심이 깊은 나로서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었더랬다. 정말 미안하게도.
2월 28일 저녁에는 누구와 한잔했더라? 아, 맞아. 평거동 지리산 찹쌀 홍화 동동주에서 몇 잔 했다. 집에 오니 날씨가 요상하다. 아내는 “내일 비 온다던데….”라고 한다. 그러면서 함께 공연 보러 갈 이웃사촌에게 전화를 한다. 비가 얼마나 언제까지 올지 모르지만 큰들이 공연을 취소한다고 공지하기 전까지는 공연을 하는 것으로 믿는 게 나의 철칙이다. 하동으로 가는 길에 취소 공지를 보고 되돌아오는 한이 있어도 지레짐작으로 공연의 성사 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몇 해 동안 공연을 보러 다닌 나의 경험이다. 산청에서는 잔디밭에서 공연을 못하게 되자 긴급히 실내로 옮겨서 공연을 했을뿐더러, 다음부터는 아예 비 올 때를 대비하여 실내 공연을 계획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하동에서도 비가 많이 쏟아지던 날 최참판댁 안채 마루에서 세계 최초로 마루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3월 1일 아침 일찍 눈 뜨자마자 사무실로 출근해야 했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길을 달려갔다. 7시쯤 도착하여 밀린 일을 재빠르게 처리했다. 이날 배포해야 할 보도자료가 6건이었다. 2월 28일 배포하려던 것들인데 미처 완성을 하지 못한 데다 28일에도 보도자료가 5건이나 되었다. 학기 말과 학기 초 사이에 엄청난 양의 보도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이러저러하게 조치를 하지 않으면 하동으로 가는 길이 못내 불편하거나 불안할 뻔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마당극을 보러 가기 위해 아침잠을 줄여가며 사무실로 나간 날이 수도 없이 많다. 이날은 그런 날 가운데 하루였다. 간혹 마당극을 보러 다니는 날더러 “큰들만 홍보하느냐?”라는 농담을 던지는데,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이, 나의 일정은 항상 사무실 일이 우선이다. 아무리 공연을 보고 싶어도 공적인 일이 있으면 나는 냉정하고도 박절하게 공연을 잊어버린다. 이것이 내가 5년째 공연장을 기웃거릴 수 있는 작은 원동력이다.
9시쯤 집에 와서 눈을 붙였다. 간밤의 술도 깨어야 했고 하동 왕복 2시간 넘는 시간 운전을 하려면 몸부터 다스려야 했다. 이런 자잘한 것도 나에게는 작전이고 계획이다. 드디어 10시 30분 집을 나섰다. 평화교회 근처에서 이웃사촌 겸 형수님을 태우고 파리바게트를 들렀다가 본격적으로 자동차 가속기를 밟았다. 진주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봄을 맞이하러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흥분되는 나들이였다. 더군다나 극단 큰들의 마당극을 보러 가는 것 아닌가. 그것도 올해 첫 공연이 아닌가. 그것뿐인가. 2020년 10월 31일 이후 무려 얼마만의 하동 공연이란 말인가. 한 가지 더 보탠다면, 불가피하긴 하지만 배역이 바뀌는 역사적인 공연이 아닌가. 생각하면 할수록 즐겁고 유쾌한 나들이였다. 그 시각 병원에서 열심히 재활 운동을 하고 있을 배우가 자꾸 떠올라 웃다가 멈추고 웃다가 멈추고를 되풀이했지만 말이다. 그사이에 큰들은 하동에 도착한 배우들이 모여앉아 분장을 하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시속 60km로 달려야 하는 2번 국도에서 과속을 하도록 부추기는 사진이라고 할까.
한산사 앞으로 올라갔다. 벌써 몇 번째 보는 장면인지 모르겠는 장대한 악양 평사리 들판을 또 처음인 듯 내려다보았다. 아직 씨앗을 뿌리지 않은 들판, 아직 잉태하지 않은 들판, 아직 겨울에 머물러 있는 들판에서 나는 문득문득 솟아나는 그리움 같은 걸 느꼈다. 불과 5분 남짓 서 있었지만, 사진만 몇 장 쿡쿡 찍고 내려왔지만, 그동안 나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간 많은 사람의 추억이 여기저기 묻어 있던 것이다. 그 속에는 어머니도 계셨다. 어머니는 그 너른 들판을 어떤 마음으로 보셨을지 물어보지 못했다. 지금은 물어볼 수도 없다.
매화나무 옆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매화 가지 사이로 무딤이들판의 부부송이 보인다. 부부송, 그러고 보니 <미스터 션샤인> 1회에서 어린 최유진이 도망갈 때 이 부부송 옆을 지나가는 것 같았는데,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아직 완전히 활짝 피지는 않았지만 비로소 하동에서 봄의 어깻죽지에 조금 기대어보는 느낌이 들었다. 이날 새벽까지 내렸을 빗방울을 희미하게 머금고 있는 매화 꽃잎은 싱그럽고 차분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동의 분위기는 늘 이렇다.
평사리 마을을 올라갔다. 처음인 듯 바라보는 형수님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곁들여주면서 우리는 어느새 토지마을장터에 다다랐다. 공연장에서 한창 연습 중인 배우와 연출팀에게 손짓으로 인사하며 반가움과 고마운 마음을 전하였음은 물론이다. 주인이 바뀐 토지마을장터에는 국수, 열무국수, 파전은 없어지고 소고기국밥, 제육덮밥, 해물파전이 자리를 잡았다. 겉모습이 조금 바뀐 정감 막걸리 한 병을 비우지 못한 채 우리는 일어났다. 다음에는 다른 식당에도 두루두루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최참판댁>이라 적힌 자그마한 광고 전단도 하나 얻었다. 이 작은 전단을 만든 하동군 관광진흥과에 손뼉 쳐 드린다. 나에게 맞춤인 정보다.
최참판댁 이곳저곳을 휘 둘러보다가 1시 40분쯤 공연장 객석에 자리를 잡았다. 맨 앞자리도 비어 있었으나 세 번째 줄에 앉았다. 나는 처음에는 늘 앞자리를 고집했다. 마당극의 진면목은 배우들과 가장 가까운 데서 볼 때 드러나는 법이니까. 요즘은 어느 자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맨 앞자리는 나처럼 처음 마당극에 입문하는 분들에게 양보하자는 마음이 없지 않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 공연에서는 내 앞에 앉은 젊은 친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스마트폰을 내리지 않은 채 장면들을 열심히 찍었다. 독립군가도 열심히 불렀다. 그런 친구를 뒤에서 바라보는 내 마음은 흐뭇하기 이를 데 없는 천상의 그것이었다.
풍물놀이가 시작됐다. 공연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리는 앞놀이다. 배우들이 공연 마당 주변에서 한바탕 땅울림을 올린다. 오랜만에 최참판댁을 찾아왔으니 평사리 들판이나 형제봉이나 섬진강은 굽어 살펴 주시라는 뜻일 거다. 하동군청에서도 앞으로 마당극을 열심히 재미나게 펼칠 수 있도록 부디 도와주시라는 뜻일 거다. 공연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선 모과나무와 느티나무가 호응했다. 그 호응에 힘입어 주변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하여 수백, 수천 명은 아니다. 코로나 때문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야 하는지라, 객석 관객은 듬성듬성 앉을 수밖에 없었고, 주변 관객들도 마스크를 쓴 채 널찍널찍 설 수밖에 없었다. 처음 공연 시작할 때엔 눈짐작으로 셀 수 있을 것 같은 관객이 어느새 셀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 있게 되는 건 정말 언제 보아도 신기하기만 하다. 코로나 방역 지침이 조금 느슨해진 덕분에 마당 주변에 줄을 치거나 입장할 때 손을 소독하거나 전화번호 등록을 일일이 하는 등의 번거로움은 사라졌다.
바람이 제법 불었다. 일기예보에서는 낮부터, 서쪽에서부터 바람이 점점 거세어 질 것이라고 했는데 틀리지 않았다. 맞아서 좋은 일기예보도 있지만 틀려도 좋을 일기예보도 있는 법인데, 이날은 틀리지 않아서 얄미운 날씨였다. 미리 준비해 간 무릎담요를 깔고 앉았다. 빵모자를 뒤집어썼다. 외투 깃도 세웠다. 한 시간 동안 바람을 막아줄 준비는 제대로 갖춘 셈이다. 그래도 공연 보기에는 좀 추웠다. 그렇지만 공연이 끝날 때까지 관객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히려 뒤늦게 공연 소리를 듣고 찾아오는 관객이 더 많았다. 음향을 담당하는 연출팀이 자리한 천막이 바람에 휘청거렸다. 큰들 단원 몇몇이 교대로 천막을 붙들었다.
이번 공연은 날이 날인지라 큰들 단원들 여러 명이 출동했다. 보통 상설공연을 주말마다 할 때는 잘 나오지 않던 단원들이 함께 공연을 만들었다. 이름을 일일이 댈 수는 있지만 자칫 한 명이라도 놓치면 결례가 될까봐 참는다. 아무튼 이들은 공연 시작 전부터 배우들을 격려하고 웅원한 것은 물론 극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관객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으며 공연이 끝난 뒤에는 무대 정리까지 도맡아 하였다. 배너를 고정한 말뚝을 뽑는 박진묵 씨에게 “고생하십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었지만 그는 고개를 들 겨를도 없이 “감사합니다!”라며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다. 큰들은 이해와 협력, 소통과 단합, 이런 재미없는 단어마저 재미있고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데는 선수들이다.
하동군청 문화환경국 직원들도 공연 보러 많이 왔다고 들었다. 국장님은 직접 인사도 나누었다. 3·1절 기념공연이기는 하지만 극단 큰들의 올해 첫 공연에 얼마나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지 느낄 만했다. 평소 극단 큰들과 얼마나 신뢰를 쌓아 왔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듯했다. 나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동군의 배려 덕분에 나 같은 사람도 재미있는 마당극을 실컷 볼 수 있고 그 덕분에 하동군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을 실컷 즐길 수 있고 하동군 곳곳에서 맛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고맙다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것을 즐기기 위해 가족 또는 친구 또는 선후배 또는 누구랑 나들이 계획을 짜고 나들이를 함께 하고 돌아와 그 뒷이야기를 나누는 행복에 빠져드는데, 그것도 한 해에 열댓 번씩이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날 관객들은 ‘마당극을 볼 때는 극 속에 푹 빠져들어야 한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몸소 터득하고 온 사람들 같았다. 특히 바로 내 뒷자리에 앉은, 모르는 아주머니 두세 분은 그야말로 마당극 관람 재미를 백분 느끼는 듯했다. 그들의 호응에 나도 신바람이 났다. 웃길 때는 크게 웃고 손뼉을 쳤다.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는 못 알아들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듯했다. ‘정말 연기 잘한다’, ‘역시 큰들이다’, ‘아이고 어쩌나?’, ‘아이고 그놈 고소하다’ 이런 내용 아니었을까. 공연 마치고 뒤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그런 관객이 여기 저기 삼삼오오 모인 날이다. 마치 계모임이라도 하는 듯이.
매우 궁금하던 것은, 나의 예상이 빗나갔다. 김상문 씨가 출연하지 못하게 됐다. 나는 길상이 역을 오진우 씨가 맡을 것으로 예상했다. 오진우 씨는 2019년 10월까지는 조준구 역할을 했다. 갑자기 병원 신세를 지는 바람에 이규희 대표가 조준구 역할을 받았다. 이규희 대표는 오진우 씨가 조준구를 하기 전에 그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아무튼 오진우 씨는 <최참판댁 경사 났네>에서는 역할이 없으니, 이번에 길상이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짐작했다. 실제 공연 직전에 풍물놀이를 할 때 오진우 씨는 이전에 김상문 씨가 길상이 역을 할 때 입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언제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것, 그 밖의 것을 보여주는 큰들에 또 졌다. 졌지만 기분 좋게 졌다. 졌지만 조금은 짜릿하게 졌다. 길상이 역할을 맡은 배우는 이규희 대표였다. <최참판댁 경사 났네>를 197회까지 공연하면서 여러 배우들이 여러 번 바뀌었을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을 낱낱이 모른다. 그렇지만 최소한 내가 공연을 보러 다니기 시작한 이후의 경과는 좀 알고 있다. 외우지는 못해도. 그래서 이번에는 어느 역할을 누가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랄까, 예상이랄까, 아니면 바람이랄까 그런 게 없지 않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맞히지 못했다. 큰들의 상상력과 조직력과 연출력을 도무지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또 깨닫는다.
길상 역을 맡은 이규희 대표는 <오작교 아리랑>에서 남돌이 어머니로 출연한다. 그 찰진 연기를 모르는 이가 없다. <남명>, <역마>에도 출연한다. 예술공동체 큰들의 대표이면서 배우로서 모자람 없는 이다.
다만 내 눈에만 보인 것, 나 혼자만 느낀 것을 한마디 해 놓자면, 이날 바람 부는 최참판댁 앞마당에 등장한 이규희 길상은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듯했다. 나만 그렇게 느꼈을까. 독립운동 중이라서 그랬을까. 백전노장 이규희 대표의 표정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을까. 그 시각 병원에서 노심초사 안절부절 공연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도하고 있을 김상문 씨를 이규희 씨가 떠올리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그만큼 그들은 끈끈한 사이인 줄 안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형제 같은 사이랄까. 김상문 배우에게 익숙해져 있었을 무선 마이크가 하필 이날따라 말을 듣지 않은 것도 그러한 비과학적인 영감이랄까 텔레파시랄까 아무튼 그런 것과 연관된 것은 아닐지 혼자 상상해 보았다. 마이크가 이제 한동안 함께하지 못할, 병원에 계신 김 배우를 기다린 건 아니었을까 생각한 것이다. 더 애틋하고 그래서 더 갸륵하고 더 고마운 한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그러고 보니 원래 김상문 씨가 하던 여러 가지 역할도 인수분해를 하여 각각 다른 배우가 소화했다. 하나하나 따져보지는 못했다. 한 명의 큰 배우가 갑작스럽게 불가피하게 자리를 비웠는데도 그 공간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원래 이렇게 공연해 왔다는 듯이, 이만한 배우들이 이런 대사로 이렇게 공연해 왔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연이 끝났다. 이날 관객의 박수 소리와 함성은 보통 때보다 훨씬 컸다. 삼일절 특별 공연이라서이기도 할 것이지만 정말 공연 1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고 할 정도로 연기의 몰입도가 높았다. 관객들 반응도 아주 좋았다. 배우와 관객의 호흡이 잘 맞은 날로 기억될 것이다.
극단 큰들의 마당극 <최참판댁 경사 났네>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한 시간짜리 마당극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마당극 전반부는 하동군 평사리 사람들의 일상이 펼쳐지고 후반부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린 서희는 악양초등학교 6학년 박가온 어린이가 맡는다(올해 학생회장이 되었다 한다. 축하해~!). 이 마을 주민 배우도 세 명 등장한다(이번 공연에서는 출연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이는 길상이다. 한 배우가 마을 주민 역할을 하다가 독립군이 되었다가 다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하동군민으로도 나온다. 관객 가운데 한 명은 즉석에서 배우로 섭외되어 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우리 역사에 일제 강점기라는 것이 있었고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린 선조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조상들은 그 사이사이에 이웃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울고 웃었음을 문득 알게 된다. 그 소중한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간도로, 만주로, 일본으로 달려간 수많은 독립투사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 앞마당에서 환하게 웃으며 마당극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만나게 된다. 엄청난 사실이다. 마당극 한 편이 주는 생각거리는 무궁무진하고 교훈은 명징하다.
돌아오는 길에 완사 <영래밀면>에 들렀다. 큰들이 이날 하동에서 올해 첫 공연을 했다면, 영래밀면도 이날 첫 영업을 개시했다. 밀면과 수제비와 만두를 먹고 싶었다. 동동주도 한잔 생각났다. 3월에는 3시까지만 영업한다는 주인장을 윽박질러 수제비 두 그릇과 옥종 동동주 네 병을 비웠고 시큼 새큼 덜척지근한 무김치 배추김치 열무김치를 여러 접시 비우고 무사히 돌아왔다. 김봉기 사장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처음 마당극을 본 형수는 말했다. “큰들, 정말 잘한다. 특히 어른 서희 역을 하는 배우는 인상과 기품이 너무 멋지다. 서희 역에 딱 어울리는 배우다.”라며 칭찬하느라 입에 침 마를 새가 없었다.
3·1절 하루가 무척 길었다. 생각할 거리는 이날 하루보다 수만 배는 더 길어졌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큰들 이야기는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 다음 공연은 언제 어디에서 어느 작품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까. <최참판댁 경사 났네> 200회 공연은 언제 할까. 생각은 끝이 없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 두자.
아참, 김상문 배우는 3월 2일 퇴원하여 마당극마을로 돌아갔다. 10일만이다. 건강을 빈다. 공연장에서 만난 김상문 배우의 부인 임경희 씨에게 “우짜다가 남편 허리를 뿔랐십니꺼?”라고 농담을 던졌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러잖아도 마음이 아플 부인에게 농담이 지나쳤다. 다음에 뵈면 정식으로 사과드려야겠다.
2022. 3. 3.(목)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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