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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함양 이모

by 이우기, yiwoogi 2017. 6. 26.

아기 주먹만한 감자 한 상자를 아들들에게 나눠주는 어머니는 한숨부터 쉬었다. “함양 너거 이모 집에 갔는데, 땡볕에 감자 캐느라 정신이 없는데, 그 북새통 속에 너거 이모아재는 사과나무 밭에 물 져다 나른다꼬 또 정신이 없고. 아이고 농사라는 게 사람 잡아묵는 기더라. 땅을 파서 물을 퍼올릴라 카는데, 그리할라모 물을 큰 도라물캉 통에 두세 통을 갖다날라야 하는갑데. 경운기 갖고는 안 되니까 트럭을 끌고 댕기고. 전쟁이 따로 없더라.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이고. 저래갖고 올 사과농사 완전 베리겄던데.”

 


어머니는 금요일 함양 이모집에 일손 도우러 다녀왔다. 둘째이모다. 막내이모와 이모아재와 외삼촌 이렇게 넷이 출동했던가 보다. 감자 수확이 주 목적이었는데 마침 양파도 큰 일거리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한해에 네댓 번 이모집에 일하러 간다. 양파, 감자 수확은 여름철 농사고 가을 찬바람 불면 사과 수확하러 간다. 가면, 남의 일이 아닌지라 대충 넘기지 못하게 된다. 동생집 일이니 오죽할까. 땡볕 아래에서 하루 종일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않고 양파도 캐고 감자도 캔다. 사과 밭에서는 목이 뒤로 꺾이는지도 모른 채 하늘만 쳐다본다. 갈 땐 갈치, 고등어, 돼지고기 같은 반찬거리도 산다. 뭐라도 보태주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형제애가 돈독하다.

 

그렇게 하루 또는 이틀 동안 함양에 다녀오면 몸살을 한다. 그러잖아도 온몸 아프지 않은 데가 없는 연세인데 하루 중노동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안 아픈 데가 없다. 피곤해서 누워 있다가 일어날라쿠모 머리가 무거워서 몬 일어나겄다.”고 하신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든다. “그러니까, 제발 농삿일 돕는다고 가지 마시라니까요. 그러다가 정말 몸져 누우면 약값이 더 듭니다. 이모라고 좋아할까요?”라고 다그친다. ‘요놈 말하는 뽄새 좀 보소!’라며 꾸지람을 할 듯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핑계를 끌어다 댄다. “아니, 일하러 가기 전부터 아팠다니까.”라며 말꼬리를 흐린다.

 

날씨알림에서는 토요일 오후부터 남부지방을 비롯해 전국에 비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토요일 오후 비는커녕 땡볕이 내리쬐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생고생을 했다. 저녁이 되어도 비가 올 것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 일찍 어머니를 찾아갔는데, 함양 이모집 다녀온 이야기에다, 비 이야기에다, 사과 이야기까지 일사천리로 엮어내고 나서 아이고, 아야!”하신다. 일요일 하늘도 쾌청하기만 하여 이번에 온다던 비도 글러먹었다고 지레 생각해 버렸다.

 

중노동 대가로 얻어온 감자 한 상자를 아들들에게 나눠주지 못해 안달이 났다. 그러니 눈 뜨고 밥 먹자마자 달려가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가 1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대문을 나서는데 동생이 당도한다. 역시 주말 피로를 잠으로 풀다가 쫓아온 것이리라. 감자는 쪄 먹거나 구워 먹으면 가장 맛있을 모양과 크기다. 괭이질 호미질 한번에 씨알 좋은 감자 알맹이들이 쏟아져 나올 때 농부들은 감탄사를 내지르고 기뻐 춤이라도 춰야할 것이로되, 실제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짐작기 어렵지 않다.

 

그러고 밤이 되었다. 11시쯤이었을까. 갑자기 쏴- 하며 비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바깥 베란다 창을 닫으려고 했지만, 나는 놔두자고 했다. 빗소리 들으면 괜히 기분 좋아지는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이날만큼은 빗소리가 한없이 정겹고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두 시간만이라도 쏟아져 준다면 이모아재 사과농사는 한시름 놓지 않을까 싶어졌다. 햇볕에 타 죽어간다던 새끼사과들이 생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밤새 내린다고 한들 홍수가 지겠나 둑이 무너지겠나, 싶던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참 야속하고 무정하였으니.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빗소리가 잦아들더니 이내 멈추고 말았다. 나보다 더 애터지고 속터졌을 이모와 이모아재를 생각했다. 덩달아 어머니의 한숨도 떠올랐다. 온나라 농민들 타들어가는 가슴의 아픔이 찌르르하게 전이되어 왔다.

 

다시 월요일이 되었다. 비구름이 하늘을 뒤덮고는 있었으나 비를 내려줄 것같이 보이진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피해를 입기도 했다는데 우리 동네는 아직 많이 부족해 보인다. 하늘은 공평한 듯하지만 불공평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서쪽 하늘은 더욱 우중충했지만 과연 저것이 비라는 것으로 변하여 땅으로 떨어져 줄 것인지 하는 의심과 의문을 거두지 못하겠던 것인데. 오후 2시쯤 창밖이 소란하여 눈길을 돌리니 장대보다는 조금 가늘지만 그것을 일러 비라고 해도 충분할 그 무엇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전장 갔다가 3년만에 돌아오는 낭군 마중나가는 아녀자의 마음이 이럴까 싶다.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시동을 걸었으니 이 참에 장맛비도 좀 오고 소나기도 오고 이슬비도 오고, 하여 애타는 사람들 속 시원히 막걸리 한 사발 하도록 좀 해주면 오죽이나 좋겠나.

 

함양 이모는 철철이 무엇을 보내온다. 맏언니인 어머니에게 감자, 양파, 마늘, 사과, , 멥쌀 같은 걸 보내온다. 동네 미장원 앞에 던져 놓고 가버리기도 한다. 바쁘니까. 작은이모아재가 같이 함양으로 갔다 오는 날엔 일부러 집 안까지 들어다 주기도 한다. 농사를 짓는 큰이모와 둘째이모 덕분에 그들의 조카인 우리들도 각종 농산물을 얻어먹는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더러 한사코 농삿일 도우러 가지는 말라고 한다. 가더라도 설렁설렁 살랑살랑 남일 하듯이 도와주는 척하다가 오라고 한다. 이기주의라고 욕먹어도 싸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당 안 받아도 되고 감자 얻어먹지 않아도 되고 이모집 일이야 어쨌든 이모집 식구들끼리 알아서 다 한다고도 한다. 그런 말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군소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이모는 이모라서, 어머니는 어머니라서, 그들은 형제라서 어쩌지 못하는 텔레파시가 있고 그 인연의 끈을 결코 놓지 못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이기라도 한 듯이.

 

2017.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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