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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어머니와 이모

by 이우기, yiwoogi 2017. 6. 14.

어머니는 점심시간 지난 130분 전화했다. 정수리 이모집에 일하러 왔으니 나중에 마친 뒤 태우러 오라고 했다. 5시 퇴근하는 셋째아들을 가끔 이렇게 이용한다. 버스를 기다리려면 하염없기도 하거니와 이런저런 짐이 있기 때문이다. 짐은 제대로 단속되지 않아 차 안에서 난장판을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모집은 집현면 정수리에 있다. 30분 정도 걸린다. 고향 안간으로 가는 길목이다. 어디어디 밭에 있다고 하면 대번에 알아챌 수 있다.

 

늙은 두 자매는 마늘을 뽑고 있었다. 일은 마친 듯했다.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애매했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고, 품질이 좋아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팽개쳐버릴 만큼도 아니다. 어머니와 이모의 손이 보인다. 고릴라 앞발 같다. 장갑을 끼고 일했을 텐데도 꺼멓다. 흙반죽을 맨손으로 만진 듯하다. 아들이자 조카가 양복 입고 나타나니 두 늙은이는 누런 이 드러내며 웃는다. 틀니와 금니가 보인다. “아이고, 바쁘낀데 괜히 오라캤다 아이가!” 이모 말에, 어머니는 에미가 있으모 와야되지.”라며 맞장구친다. 나는 웃는다.

 

마늘 한 자루를 차에 실었다. 이 마늘의 이후 여정을 나는 안다. 주말 형제들이 본가에 모이면 먹곤 하는 회나 돼지고기의 맛을 돋우는 반찬이 될 터이다. 다른 여러 반찬 속에서 정수리의 향기와 이모의 숨결을 내뿜을 것이다. 어머니의 손길도 느낄 수 있겠지. 아침 일찍 시내버스 타고 정수리까지 간 어머니는 이모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어린 시절 뛰놀던 고샅과 골목쟁이를 떠올렸을까, 외할머니 돌아가신 뒤 하늘 보며 흘리던 눈물을 생각했을까. 연지곤지 찍고 꽃가마 타던 찬란하던 청춘의 날을 생각하곤 웃기라도 했을까.

 

어머니는 가끔 이모집에 일을 도우러 간다. 마늘 심고 수확하고, 양파 심고 수확하고, 밤 따고, 오디 따고, 두릅 따고, 앵두 따고. 일은 끝이 없다. 그런 날이면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기쁜가 보다. 두 손에는 검은 비닐 봉지 가득 무엇을 들고 온다.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온몸 성한 데 없다 하면서도, 무엇이 어머니를 정수리 이모댁으로 끌고 갔을까. 늘 그것을 알 듯하다가도 모르겠다.

 

어머니 태우고 차를 출발하자, “아차, 가지도 좀 따 가라고 했다.”며 길가 밭을 가리킨다. 짙은 보라색 가지가 조랑조랑 매달린 가지밭에서 어머니와 나는 한두 끼 반찬으로 먹을 만큼 몇 개를 땄다. 바쁘지도 않았고 남의 것 서리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서둘렀을까. 이랑을 넘어가다 가지 지짓대에 허벅지를 찔렸다. 정말 아팠다. 피가 나는 듯했지만, 거기서 바지 내리고 허벅지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시 출발하는데 아참, 저기 뽕도 좀 따놨다. 갖고 가자.”하신다. 좁은 농로 따라가니 길가에는 뽕나무가 길게 줄을 섰다. 일부러 심어 키운 나무다. 오고가는 사람들 손을 덜 탄 것 같다. 조그만 박스에 따 모아 놓은 오디를 실었다. 차 안에 오디 향이 가득하다. 다시 이모집에 들렀다. 염소는 매애매애애 울며 뭐라도 좀 달라 하는데 그것까지는 챙겨주지 못했다. 이모가 돌아오려면 한두 시간은 더 걸릴 터인데, 배고파도 좀 참아라 하고 돌아섰다.

 

아내는 오디를 잘 씻어 물기 뺀 뒤 설탕과 잘 섞어 통에 담아놨다. 가지는 껍질 잘 벗겨 나물도 만들고 전도 구웠다. 아침 반찬으로는 백 점이다. 가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 가운데 하나다. 지금 생각하니, 가지를 보자마자 흥분한 듯 가지밭 고랑과 이랑을 건너뛴 그때 그 마음을 조금 알 듯하다. 봄 가뭄 속에서 잘 커 준 가지에게, 아니 그렇게 잘 가꾸어준 이모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생각도 하지 않던 나의 옹졸함과 속좁음을 지짓대는 정곡으로 찌른 것이로구나. 아침 밥상에서 이모에게 고마운 마음을 잠시 전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나는 어머니께 제발 일 돕는다고 가지 마라.”고 한다. “그러다가 다치면, 쓰러지면 어떡하느냐?”고도 따진다. “이모집은 이모 식구들끼리 농사 지을 만큼 짓겠지.”라고도 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인자 안 갈란다.”고 하신다. “맞다. 나도 힘들어 죽겠다.”며 혀를 내두르신다. “안 그래도 병원도 가야 되고.”라며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또 가신다.

 

이모가 부탁을 하기도 하려니와, 그리하여 뭐라도 일손을 도와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겠지만, 그것보다 이모와 어릴 적 뛰놀던 고향집 언덕과 길과 논과 밭, 그리고 가끔 오가며 만나게 될 친정 동네 멀고 가까운 친척들이 너무나 그리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처럼 비교적 쉬운 일을 하고 온 때는 좀 덜하지만 어떤 때는 아예 드러눕기도 하는데, 그냥 몸만 아팠기 때문일까. 더 많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서, 가슴 가득 머릿속 가득 차오르는 향수를 어쩌지 못해서 드러눕는 건 아닐까.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해 보곤 한다.

 


이모와 인사하고 차에 오르려는데 길가에 감자꽃이 예쁘게 피었다. 내가 아는 감자꽃은 흰색이다. 그런데 분홍빛을 띄는 꽃이 보인다. 이건 뭐지? 하며 다가가는데 어머니는 그건 자색감자다.”고 한다. 감자, 고구마, 옥수수, 마늘, 마늘쫑, 오디, 앵두, , 배추, 매실, 가지, 고추, , 보리, , 부추, 상추. 이모는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갖다 먹으라고 재촉하고 직접 갖다 주기도 하며, 그것을 미끼로 일 좀 도와달라고 호소하기도 한다. 그것을 계기로 옛날 추억을 공유하기도 하는 이모와 어머니. 오래도록 아프지 말고 싸우지 말고 힘겹더라도 좀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맏딸이고 이모는 세 분, 외삼촌은 한 분인데 오늘은 큰이모 이야기만 했다.

 

2017.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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