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 퇴근한다. 해가 쨍쨍하다. 옷부터 갈아입는다. 숙호산 오르기 딱 좋다. 냉장고 찬물을 작은 병에 옮겨 붓는다. 문득, 이게 아니다 싶어진다. 아내는 아들 학교에 일곱 시까지 가야 한다. 일 마치고 가자면 마음부터 바쁠 것이다. 버스 기다리는 시간에 발을 동동거릴 것이다. 숙호산을 포기한다. 그 새 산이 없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아내에게 전화한다. 태우러 가려면 시간이 애매하게 남는다. 웃는다.
토요일 어머니께서 알타리무 담가 놨다고 가져가라 했다. 핑곗거리도 없는데 가지 못했다. ‘이놈들이 김치로 유혹해도 안 와!’하실 어머니를 생각해 낸다. 전화드려 본다. 기운 없는 목소리다. 좀 긴장한다. “오뎁니꺼?”라고 여쭈니, “밥솥이 고장나서 하이마트 갔는데, 거서는 안된다 캐서 쿠쿠 수리하는 데 왔는데, 이마트에서 상구 더 올라와서…. 아이고 대 죽겄다.” “주인 바까 보이소!” “예, 어디어디에 있는 쿠쿠 서비스 센텁니다.” 어딘지 알겠다. 즉시 어머니 계신 데로 간다.
몇 주 전 본가 밥솥 뚜껑이 고장난 걸 알았다. 고무 패킹이 닳았겠거니 생각했다. 밥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어서 다음에, 다음에 하다 보니 몇 주나 지나버렸다. 밀양, 대구에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이다. 30도를 훌쩍 넘는 기온이다. 진주라고 별수있겠나. 그 땡볕 더위에 장바구니수레를 끌고 어머니는 하이마트로 갔다. 거기 가면 해결될 줄 알았을 것이다. 거기서 샀으니까.
하이마트에서는 조금 더 가면 서비스센터가 있으니 그리 가면 바로 수리해 준다고 했단다. 하이마트에 맡기면 며칠 걸리니까 선택하라고 했겠지. 어머니는 기왕 나선 걸음에 서비스센터까지 찾아간 것이다. 장바구니수레를 터덜터덜 끌면서 작열하는 태양을 마주보며 이백 미터는 더 걸었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아득하다. 사십일년 생이니 올해 일흔여섯이다. 이런 폭염은 조심하는 게 좋을 연세다. 에어컨 바람 부는 서비스센터 대기실 긴의자에 탈기하고 앉아 다시 집으로 돌아갈 걱정만 하던 어머니는 셋째아들 목소리가 얼마나 반가웠을까.
이십 분쯤 더 기다리니 수리를 마친다. 수리비 삼만사천 원도 내가 낸다. 어머니 걸음으로 족히 한 시간은 걸릴 거리를 십 분만에 태워 드린다. “아이고, 니 아이라시모(아니었으면) 우짜꼬, 우짜꼬 생각만 하고 있었시끼다.”라며 여유를 찾으신다. 차에서 내려서도 옥봉 비탈길을 세 걸음 떼고 한 번 쉬고 네 걸음 떼고 한 번 쉬면서 겨우겨우 올랐을 길을 대신해 드린다. 숙호산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닌 본가 높이 쯤이야.
토요일 담가 두었다던 알타리무 김치를 한 봉지 받아 들고 아내에게로 간다. 진주시청 인근에서 쏟아져 나오는 퇴근 차량을 마주보며 뒤벼리를 달린다. 나는 하대동으로 가는 것이다. 십 분쯤 더 기다려 아내를 태운다. 대아고까지 버스를 타면, 운 좋으면 삼십 분, 운 나쁘면 한 시간은 걸린다. 퇴근시간이니까. 선생님과 약속시간에 맞추기 어렵다. 하지만 나는 안전하고도 쾌적하게 아내를 태워준다. 시시한 농담도 건넨다. 아들 학교 선생님 만나는 일은 긴장되는 일이니까.
내가 만약 숙호산으로 갔더라면 어찌 됐을까. 내 장딴지와 허벅지는 아주 조금 단단해졌겠지. 지난주 마신 알코올도 제법 털어냈겠지. 하지만 어머니는 무거운 밥솥을 실은 시장바구니수레를 터덜터덜 끌면서 휘청휘청 걸어서 집으로 갔을 것이다. 재수 없으면 중간에 엎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면 택시를 탔겠지. 택시도 대문 앞까지는 가지 못하니 어쨌든 무척 고단한 오월 어느날이었을 것이다. 아내는 또 어땠을까. 아들이 금요일 오후 조퇴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미리 신고하기로 하고 약속을 잡았는데, 늦어지면 얼마나 민망해질까. 서두르느라 무슨 실수라도 하지 않았을까. 택시를 탔을까.
스스로 하나를 포기하니 둘을 얻을 수 있었다. 어머니를 편안히 모셨다. 무척 고마운 일이다. 아내를 선생님과의 약속시간에 맞춰 태워 주었다. 우리집 기사놀이는 재미있다. 덤으로 알타리무 김치를 얻었고, 또다른 즐거움으로 아내와 함께 맛있는 국수를 한 그릇 먹고 귀가했다. 집에 돌아가서, 아내에게는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나 혼자 기분이 좋아 히죽히죽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숙호산은 어머니나 아내보다 덜 중요했다. 또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몸 하나보다는 어머니와 아내가 더 중요했다. 그런 걸 깨달은 오월 어느 날이었다, 어제는.
2017. 5. 30.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 진 자리 (0) | 2017.06.09 |
---|---|
말티고개를 넘다 (0) | 2017.05.31 |
아마릴리스라는 꽃 (0) | 2017.05.30 |
걸어서 우리집까지 (0) | 2017.05.23 |
아마 씨의 행복한 빵집(5부작) (0) | 2017.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