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가 주인을 닮아 게을러졌다. 처음 전기를 켜서 화면이 밝아지는 데 5분 더 걸린다. 그 시간에 스마트폰 라디오를 켜고 물을 마신다. 신문도 넘긴다. 화면이 밝아지면 비로소 윈도를 켜고 업무를 위한 로그인을 한다. 출근 도장을 찍는다. 이런 건 괜찮다. 컴퓨터도 쉬엄쉬엄 일하고 싶을 테니까. 본체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길게 나는 건, 컴퓨터의 비명이라 여긴다. 2019년 12월 제품이다.
아래한글은 1992년 한글1.5 때부터 써 왔다. 얼마나 훌륭한 무른모(소프트웨어)인가. 그런데 며칠 전부터 복사하기, 붙여넣기 기능이 잘 안 되었다. 문서 작업을 하는 사람은 컨트롤 시, 컨트롤 브이 기능이 얼마나 유용한지 잘 안다. '복붙'이라는 말도 유행한다. 오늘은 아예 말을 안 듣는다. 이게 안 되니까 아주 심각하게 불편하다. 긴 문서를 다시 옮겨 적을 수도 없고, 많은 사람 전자우편 주소를 낱낱이 적을 수도 없다. 복붙의 반란이다.
기술자를 불렀으나 고치지 못했다. 한글을 새로 깔았으나 나아지지 않았다. '내일모레 다시 와서 윈도를 밀어야겠다'라고 말했다. 오늘 아침의 일이다. 윈도를 밀어서 문제를 고칠 때까지 임시로 노트북을 곁에 갖다 놓았다. 노트북과 큰 화면 하나는 같은 화면이고 나머지 하나는 먼저 쓰던 화면이다. 그러자니 자판(키보드)도 두 개고, 다람쥐(마우스)도 두 개다. 아주 헷갈린다. 머리가 어지럽다. 핑계 대고 하루이틀 잠수함 타고 싶다.
2024. 3. 5.
ㅇㅇㄱ
<신세계>
오늘 아침 9시 40분부터 11시 40분까지 장장 2시간에 걸쳐 컴퓨터를 수리했다. 윈도를 새로 깔았다. 원래 있던 자료를 안전하게 따로 보관(백업)하는 데 1시간 30분쯤 걸린 것 같다. 전문가는 전문가답게 능수능란했다. 컴퓨터 화면이 이 기술자의 손놀림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곁에서 지켜보는 나는 감탄사만 내뱉었다. 이런 세계도 있구나... 이제 정년 때까지 쓰겠구나...
컴퓨터 전원을 누른 뒤 15초쯤 지나면 화면이 켜진다. 부팅이 끝난다는 말이다. 아래한글 복사하기-붙여넣기도 아주 잘 된다. 당연한 일이다. 모든 프로그램이 잘 열리고 닫힌다. 파란색 동그라미가 뱅뱅 도는, 이른바 로딩중은 없어졌다. 갈아 넣은 건 영어 이름을 가진 작은 부품 하나 뿐인데도 말이다. 기계 핑계 대고 개기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런 신세계에서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컴퓨터는 원래 이런 거였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먼지 같은 파일들이 부팅을 방해하고 로딩을 미루게 하고 열리고 닫히는 걸 가로막았다. 그만큼 내 머릿속에도 먼지가 끼고 곰팡이가 피어 번졌다. 어느 부품을 하나 빼어 갈아 끼우면, 돌을 지나 쇳덩어리가 되어가는 내 머리도 삥삥 잘 돌아가게 될까.
2024. 3. 7.
ㅇㅇ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