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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어떤 날

by 이우기, yiwoogi 2024. 2. 27.

<어떤 날>

 

대작대기 들고 숙호산 갔다. 대작대기는 어버이 산소 옆 대밭에서 쪄서 다듬었다. 지팡이로도 쓰고 멧돼지 대적용으로도 쓰기 위해서이다. 뱀이 대가리를 치켜들고 달려들면 목아지를 꽉 누르기도 맞춤하다. 바람이 차가웠다. 콧물을 훌쩍였다. 빵모자 쓰지 않았더라면 큰일날 뻔했다. 물을 몇 번 들이켜며 목을 축였지만 초코파이는 꺼내지 않았다. 국밥이나 국수 같은 게 자꾸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잡곡밥을 먼저 안쳤다. 냉장고를 뒤졌다. 요리법은 간단하다. 뭐든지 많이 집어넣은 뒤 간만 잘 맞추면 된다. 무, 콩나물, 표고버섯, 호박, 양파, 대파를 대충 썰어 넣었다. 떡국떡도 한 줌 넣는다. 액젓과 새우젓으로 간을 마추었다. 팔팔 끓이면 끝이다. 마침 오늘 배달돼 온 알부자집 달걀도 하나 부친다. 냉장고엔 먹다 남은 술이 늘 있게 마련이어서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돈다.

 

텔레비전을 본다. KBS-2TV <생생정보>에 ‘엄마의 밥상’이라는 순서가 있다. 오늘은 8남매 중 첫째 딸이자 넷째 자식인 62살 아주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서울 딸네에 사는 87살 어머니를 위해 음식을 준비한다. 들깨죽을 쑤고 메밀묵 무침을 만들고 등갈비찜을 만든다. 손에 든 것이 숟가락인지 술잔인지 모른 채 한참 동안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울었다.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목이 메어 꺽꺽 소리를 냈다.

 

뭐라고 말할 순 없다. 2월 말에 이르니 한 해가 다 갔다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다가올 3월이 좀 막연하다. 농땡이 칠 수도 없고 개길 수도 없는 일들이 줄줄이 다가온다. 두렵다. 밥 먹을 때도 술 마실 때도 잠 잘 때도 문득문득 생각나면 몸서리쳐진다. 생각과 삶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자의 막막함이 절실하다. 절벽을 마주했는데 아무런 대책이 없는 자의 낭패를 느끼는 나날이다. 눈물 날 수밖에...

 

2024. 2. 27.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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