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하만주 선생님 퇴직에 부쳐
길이 열렸다
길손이 많은 덕분이다
반질반질 반짝반짝 길은 빛났다
모두 편하게 걸어갔다
딴전 피우며 놀았고 눈 감고 즐겼다
처음엔 고마워하면서, 나중엔 당연한 듯이
아주 나중엔 길의 역사도 잊었다
잊힌 길이 있었다
누군가 곁눈질을 했다
청미래 덩굴도 있고 아까시 가시도 있었다
낫 하나 들지 않은 맨몸으로
빨간 장갑 하나 없는 맨손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었다,
마치 맹인처럼 망설임 없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게…
길이 있었다
길이 열렸다
새 길이 열렸다
모두 한 번쯤 걸어간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길은 전인미답이다
모두 익숙한 듯 행동하지만 사실,
모두 낯설었다, 낯섦에 당당해진 건
그다지 오래지 않아서이다
그런 길이 있다
길이 있다
뒤돌아보면 하염없이 아득하고
바라보면 대책 없이 막막하여도
내 앞에 놓인 길, 날 기다리는 길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묵묵히 걸어간다
좌고우면 없이 일로매진하여 비로소,
가 닿을 곳 어딘진 알 수 없다
알 수 없음이 날 보채고 들쑤신다
미몽을 깨라 운무를 걷으라 재촉한다
그럼으로써
그 길의 주인이 되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