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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쨈국수

by 이우기, yiwoogi 2023. 9. 12.

진주시 문산읍 '승우국수'의 쨈국수.(사진=이우기)

 

오랜 벗이 문산읍에 있는 대학 직원일 때 그의 소개로 문산읍에 있는 국숫집에서 ‘쨈국수’라는 걸 처음 맛보았다. “황홀경을 맛봤다.”라고 하면 엄살이 심한 편에 속할 것이고 “천국의 맛을 보았다”라고 해도 과장이라고 할 것이다. 어릴 적 어머니 손맛 가득한 멸치육수 국수나 고추장 매운맛 너머의 고소함을 국수의 전부로 알던 나에게는 제법 충격이었다.

 

‘쨈’은 딸기잼, 사과잼의 ‘잼’과 비슷하게 생겼다 해서 붙인 이름인데 말하기 좋고 들은 뒤 오래 기억하라고 ‘쨈’이라고 했던가 보다. 그때 그 국숫집 할머니의 손맛은 여러 해 동안 변함없었으나 허리는 갈수록 구부정해졌으며 언제인지 모르게 발길이 끊겼다. 일터와 밥집의 거리는 방문 횟수에 비례한다.

 

두어 달 전쯤 국숫집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다가 이 집 국수를 이야기했고, 국수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아니 지상의 국수를 다 맛보지 못하면 죽지도 못할 친구의 배려 덕분에 드디어 쨈국수를 다시 먹게 되었다. 그사이 할머니는 이승을 하직하셨는지 아니면 도무지 감당이 안 되었는지 문을 닫았고, 그 기술을 익히고 배운 젊은, 그러나 결코 젊지 않은 분이 새로이 문을 열었다는 것을 알아냈던 것이다. 국수 한 그릇에 담기는 사연이라는 양념과 정성은 가히 하늘에 닿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영천강 가에는 닿을 만하지 않은가.

 

문산읍 '승우국수'의 쨈국수.(사진=김화용)

 

쨈국수는 처음 먹었을 때의 황홀함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했고 열무국수와 해묵은 김장김치도 입맛 돋우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다. 허겁지겁 먹었다고 할까 후룩후룩 마셨다고 할까, 가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의 절반에 절반도 되지 않은 동안 국수 그릇은 깨끗해졌다. 주인아주머니는 양념(요즘 것들은 ‘소스’라고 하지)이 모자라면 더 드시라고 한 그릇 더 내왔고, 우리는 열무김치와 김장김치와 단무지를 더 비웠다.

 

주인 말로는 양파와 돼지 삼겹살과 무를 3시간 이상 곤다는데, 상상되지는 않는다. 양파 한 망을 오래 고면 요만큼만 남는다며 두 손바닥을 마주 대어 보여주는 주인아주머니 표정엔 자랑과 긍지 같은 게 잠시 묻어났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으며, ‘앞으로 이 집을 몇 번이나 더 올지 가늠하기 어렵구나’ 생각했다.

 

또한 우리 옆 식탁에서 남녀가 먹던 비빔국수도 때깔로 보나 양으로 보나 위에 얹힌 고명으로 보나 반드시 일별해야 할 것이었고, 우리 뒤 식탁에 앉은 남자 두 명은 각각 물국수 한 그릇에 추가로 비빔국수 한 그릇을 나눠 먹었는데, 그런 새롭고 좋은 방법이 있다는 것조차 배웠으니, 쨈국수 한 그릇에 담기는 추억은 차곡차곡 끝이 없을 듯하다. 그러한 날이었다. 토, 일요일에도 문 열고 미리 전화하고 오면 좋다며 휴대전화 번호까지 주인이 알려준 것도 기록해 남겨둔다.

 

2023. 9. 12.

이 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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