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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오랜만에 일직

by 이우기, yiwoogi 2023. 8. 6.

<오랜만에 일직>

일직 근무 중이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대학본부 1층 당직실 걸상에 기대 앉아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다. 들어오는 차와 나가는 차를 본다. 노려보거나 째려보는 건 아니다. 이따금 건물 위층 복도를 한 바퀴 돌고 건물 바깥쪽도 휘 둘러본다. 심심하고 무료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공항에서 비행기 내리고 뜨는 걸 보면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낸 적 있는데 지금 기분은 그때와 비슷하다. 노트북을 켜서 밀린 일을 어찌 좀 해볼까 궁리하였으나, 머리 위 큰 화면 네 개와 책상 위 작은 화면 세 개가 자꾸 눈에 들어와 노트북 화면에 눈길을 줄 수가 없다. 류근 시인 산문집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을 읽으며 간혹 짠했다가 간혹 실실 웃다가 간혹 눈물 조금 흘려주며 오전을 보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새벽 밥 먹고 일찍 나와서인지, 오늘 따라 유난히 많이 걸어다닌 탓인지 11시쯤 배가 고파졌다. 출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과 라면밥과 김치를 사두었으므로 아무 걱정이 없었다. 여러 라면 가운데 까닭없이 새우탕을 먹고 싶어졌다. 뜨거운 물 붓고 전자레인지에 2분쯤 더 돌려야 하는지 그러면 안 되는 것인지 한참동안 뚜껑을 쳐다보았으나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잖아도 새우가 뜨거울 텐데 다시 불고문을 할 필요가 무에 있겠나 싶어 그냥 3분 뒤 젓가락을 저었다. 종갓집 김치는 그 종갓집 며느리가 시에미에게 지청구 듣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는 걸 증명하듯 사곰하게 맛나다. 전쟁통도 아닌데 피란민처럼 후다닥 해치우고 다시 당직실로 돌아와 앉으니, 살금살금 졸음이 밀려온다. 이러면 안 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몇 자 끄적여 놓는 것은 잠을 쫓기 위한 나만의 몸부림이라고 해 둔다.


토, 일요일 하루 동안 내 일터를 위해 헌신하고 나면 달콤한 대가가 따른다. 수당을 받는 것만 해도 황송한데 10일 이내에 하루를 유급으로 더 쉴 수 있단다. 이틀만 가려던 여름 휴가를 냉큼 사흘로 연장하고 싶어졌다. 일할 때는 희생정신과 봉사정신과 프로정신을 발휘하여 개 발바닥에 땀나듯 열심히 뛰되, 쉬어라 놀아라 할 때는 미련없이 컴퓨터 전원을 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았다. 일 잘하는 사람이 잘 쉬고 논다고 하고, 휴가와 휴식과 여가 속에서 새로운 에너지와 상상력을 얻는다고 하지 않던가. 따라서 나는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바람에 다른 동기들보다 1-2년 더 당직, 숙직을 하게 되었더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주말과 평일 저녁을 반납한다. 더 잘 놀고 더 잘 쉬어 비로소 인간다워지기 위하여. 그런 나라서 컵라면 하나도 황감할 뿐이다. 참, 류근 시인도 라면과 소주를 좋아한다고 여러 차례 고백해 놓았던데, 나랑 비슷한 데가 있어서 이 또한 다행이다.

2023. 8. 6.(일)
ㅇㅇ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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