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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오후

by 이우기, yiwoogi 2023. 12. 18.

<오후>

눈이든 비든 뭔가 올 듯한 오후였다. 농산물도매시장 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소주 두 병과 육포, 쥐포를 사 들고 미천면 반지 산으로 갔다. 아버지 어머니가 나란히 누워 계신 추운 곳이다. 잔디는 메말랐고 흙은 뒤집혀 있었다. 멧돼지 주둥이는 불도저다. 멧돼지를 물리칠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다짐했다. 빵모자 벗고 두 번 절했다.
할 말은 없었다. 듣고 싶은 말도 없었다. 그저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쉰여덟 바라보는 나이에 무엇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부터라도 딱히 뭘 잘하겠다는 다짐도 없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희희낙락하며 인생을 낭비했다. 후회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지난 날이 꿈 같고 구름 같고 안개 같아서 아플 뿐이다. 다시 시간이 주어진대도 잘할 자신이 없다.
<효자전>에서 아들은 나중에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새사람으로 거듭났다. 그때까지 산 삶보다 남은 시간이 길어서 다행이겠다. <효자전>에서 어머니는 죽다가 살아났다. 두 번째 삶을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 현실에서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할 신비롭고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 가르침을 주고 깨달음을 주는 것 아닌가.
 
오후에 휴가를 내어 진주시복지원에서 큰들의 마당극 <효자전>을 보았다. 자꾸 어머니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생전 모습, 병원에 누워 있던 때, 마지막으로 침대에 실려 나오던 장면, 영안실 사진 속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됐기에 그토록 바삐 서둘러 가셨는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마당극 끝나고 나니 나는 반지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오후였다. 눈이든 비든 뭐라도 올 듯한 하늘이었다. 이윽고 어두워졌다. 나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마치 하루를 보낸 다음날 아침인 양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내 인생도 이젠 오후, 그것도 해거름녘으로 접어들고 있지 싶다. 하룻밤 자고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오후를 따뜻하게 보내고는 싶다. 아무튼 그러하다.
2023. 12. 18.(월)

ㅇㅇ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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