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물 한 잔
설에 먹을 김치를 주문했다. 배추김치, 무김치, 배추나박 물김치, 쪽파김치를 묶음으로 샀다. 설날에 맞추어 받았으면 싶어 17일쯤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과연 17일 업체에서 김치를 보냈다는 연락이 왔다. 18일 집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택배 회사에서 보낸 알림글을 확인했다. 집에 있는 아내에게 ‘오늘 김치가 올 예정이다’라고 알렸다. 오후 5시 30분 집에 갔다. 김치는 오지 않았다. 명절을 앞둔 시기라 배달이 많은가보다 여겼다. 6시쯤 외출했다. 한잔하고 9시 30분쯤 다시 귀가했다. 승강기 없는 4층을 걸어 올라갔다. 3층 문앞에 하얀 스티로폼 상자 2개가 놓여 있다. 5시 30분에도 보았다. 사람이 안 계신가 싶어 무심코 운송장을 보았다. 아, 그런데 술 취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글자는 낯익은 김치 회사 이름이었다. 속으로 ‘이 집도 나와 같은 데에 김치를 주문했나 보다’ 생각했다. ‘별 인연도 다 있군’까지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찰나, 나는 보고 말았다. 그 운송장에 적힌 내 이름을. ‘앗!’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이건 우리 꺼잖아!” 이름과 주소가 너무나 뚜렷하게 적혀 있고 게다가 빨간색 매직으로 이름과 주소에 동그라미까지 쳐 놓은, 명백한 내 것이 아닌가. 술이 확 깼다.
하나에 3kg쯤 되는 상자 두 개를 들고 집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는데 짜증과 분노가 계단 높이만큼 따라 올라왔다. 택배 기사가 3층을 4층으로 착각한 것일까. 너무 힘들어서 올라오다 정신줄을 놓은 것일까. 어떤 방법으로든 연락처를 찾아 단단히 혼을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운송장을 한참 들여다보니 휴대전화 번호가 조그맣게 적혀 있다. 9시 40분이면 늦은 시간이지만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전화를 하니 어떤 남자분이 점잖은 목소리로 받았다. 이래저래 여차저차 이야기를 하니, 자기는 업체에서 택배 회사까지 운송한 사람이고, 진주지역을 담당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연락처를 알려주겠다고 한다. 번호를 냉큼 받아 적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하느라 찬물을 한 잔 마셨다. 두 번째 택배 기사가 전화를 받았다.
찬물 마신 것이 잘못된 것일까. 먼저 받은 택배 기사의 목소리가 너무 점잖은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두 번째 전화를 받은 택배 기사의 목소리에서 그의 하루 동안의 고된 노동을 너무 빨리 알아챈 것이 잘못일까. 나는 그 짧은 순간 냉정을 되찾았다. ‘지금 이 사람에게 화를 낸들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겠는가’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와 내가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른 채 전화기를 들고 댓거리를 해 보았자 남는 게 무엇일까 싶어진 것이다. 결과로는 그 택배 기사가 백번 잘못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다시 갖고 가라고 할 수도 없고 변상하라고 할 수도 없잖은가. 나는 예의 바르고 정확한 말투로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명절 전이라 배달할 물량이 많아서 그리된 것으로 이해한다고 내가 말했다. 혹시 다음에 우리 집에 택배 오면 잘 부탁한다고도 말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그에게 “늦은 시간 전화해서 미안하다.”라는 말까지 하고 끊었다. 휴우… 한숨이 몇 번 나왔다. 두고두고 후회할 뻔한 장면이 연출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찬물 한 잔 덕분이라고 해 둔다.
2023. 1. 19.(목)
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