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뚜껑>
숟가락으로 술병 뚜껑을 따는 건 아주 쉽다. 맥주병 이야기다. 어떤 분은 어렵다고 한다. 쇠젓가락으로도 쉽사리 딴다. 어떤 사람은 젓가락으로 도전하다가 손만 아프다고 한다. 나무젓가락으로도 라이터로도 퐁퐁 소리내며 잘도 딴다. 전혀 어렵지 않다. 손은 안 아프다. 음료수 병뚜껑 따는 건 조금 어렵다.
어떤 날은 튀어 오른 병뚜껑이 내 얼굴을 때린다. 매우 아프지만 전혀 아프지 않은 척하며 크게 웃는다. 어떤 때는 병뚜껑이 옆 손님에게 날아간다. 0.1초 만에 달려가 허리를 숙이고 사죄한다. 대부분 웃고 넘어간다. 어떤 자리에서는 내 양념 그릇에 뚜껑이 떨어진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해도 되지 않을 일이 한순간에 일어난다. 웃을 일이다.
열댓 살 때이다. 진양호 어딘가로 친척 어른들 따라 놀러 갔다. 맥주, 콜라, 사이다를 든 사람들이 아버지 앞에 줄을 섰다. 어쩌다가 병따개를 갖고 가지 않았는데, 숟가락으로 뚜껑을 딸 줄 아는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다. 참 신기하고 무척 자랑스러웠다.
뒷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숟가락이나 젓가락으로 병을 잘 따면 난처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인기도 좋아진다.” 열심히 배웠다. 병을 잡는 왼손 아귀가 아프도록 땄다. 그렇게 익혔다. 아버지 덕분에 어디에서든 뚜껑을 재미있게 딴다. 소리가 크게 나면 눈길을 끈다. 술자리는 더 재미있게 된다.
이제 이런 것도 좀 시들하다. 맥주와 소주를 섞는 이른바 소맥제조기 ‘탕탕이’를 들고 다니며 즐겁게 놀던 시절이 있었다. 맥주회사에서 만든 숟가락 모양 병따개를 일부러 사서 들고 다닌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이제 재미가 없다. 병뚜껑이 퐁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걸 보며 낄낄거리며 웃는 것이 영 시답잖아졌다. 늙었다는 뜻이다. 만 나이를 쓰라며 한 살 깎아 주면 뭣하나. 세상이 재미없는 것을.
세상일이 나무젓가락으로 맥주병 뚜껑 따는 것처럼 쉽고 재미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소소한 일 하나로도 마음 편하게 깔깔 낄낄 히히거리며 웃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팍팍하고 버석버석하고 꺼칠꺼칠한 모래 언덕 같은 이 세상에 맥주 거품 가득 부으며 건배를 외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세월은 인정머리 없이 흘러가고 물정은 구정물 같이 고여 썩으니 이 개똥 같은 세상이 언제 끝나려나.
2023. 1. 10.(화)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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