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
처음엔 귀찮아서였다. 다음엔 얼굴 살갗에 평화를 주고 싶었다. 내친 김에 일주일 동안만 길러보자 마음먹었다. 6월 3일부터 11일까지 9일간 면도를 하지 않았다. 면도를 시작한 이후 가장 긴 나날이었다.
조선 시대 산적처럼 자랄지 선비처럼 자랄지 조금 궁금했다. 낯선 나를 바라보는 주변의 눈빛도 궁금했다. 퇴직 후 자연인처럼 살면 어떤 몰골이 될지도 솔직히 궁금하던 거였다.
까칠까칠하던 데서 부드러움으로 넘어가는 데는 일주일이 걸렸다. 괜스레 볼과 턱을 만지는 일이 잦아졌다. 내 몸을 아주 조금 더 사랑하게 됐다고 여긴다.
주위 반응도 나쁘지는 않았다. 마음이 변했느냐, 무슨 일 있느냐 묻는 친구가 있었는가 하면 면도기 사주겠다고 한 친구도 몇 있다. 멋지다면서 더 길러보라고 부추긴 분도 제법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수염 자란 내 상판때기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깨끗이 깎은 얼굴이 더 사랑스럽다. 아흐레 동안의 실험에서 소중한 교훈 하나 얻었으니 됐다. 역시 감사한 일이다.
2023. 6. 11.(일)
<어탕칼국수>
상봉동 '경호강어탕'은 진주교회 옆에 있을 때 어머니 모시고 자주 가던 곳이다. 어머니는 어탕밥을 드셨다. 그릇이 커다면서 다 드시지 못하셨다. 이전한 뒤에는 나는 처음 갔다. 아내는 가끔 이 집에서 어탕을 사 오곤 했다. 이 집 어탕 국물은 알아준다. 걸쭉하면서도 깊은 맛이 우러난다. 국물이 보약이라면서 다 드시기를 권한다고 써 붙여 놓았다. 반찬도 깔끔하고 맛있다.
어탕칼국수를 먹었다. 어탕집에 가면 무조건 어탕국수만 먹다가 칼국수는 어떤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탕국수는 9000원인데 어탕칼국수는 1만 원이다. 1000원의 차이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찾을 수 없었다. 똑같이 뜨겁고 똑같이 맛있다. 면발이 굵으니 치아와 입천장과 혀 사이를 감아도는 느낌이 약간 강하긴 했다.
식당 벽에 어탕국수 또는 어탕칼국수의 효능을 적어 놓았다. 대충 읽어보니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다. 그중 눈에 띄는 말은 '해장에도 좋다'이다. 또 있다. 그건 여기에 쓰긴 좀 그렇다. 넓은 식당에 먼저 온 남자 손님 한 분이 다 먹고 나가자 아내와 나 둘만 남았다. 토요일 저녁 나들이객이 몰려들기 전에 잘 먹고 왔다. 배 부르다.
2023. 6. 10.(토)
<꼬불국수>
라면을 꼬불국수라고 하면 웃는 사람이 많겠다. 국수와 라면은 완전히 다른 음식인데, 생긴 꼬라지만 보고 그렇게 부르면 안된다고 항의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한편 곰곰 생각해보면 그렇게 부르지 못할 것도 없다. 아무튼 그렇다.
뜬금없이 라면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지난밤 마신 술 때문이라고 해도 되겠다. 아무런 까닭도 근거도 없이 라면 스프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고 느낀 때문이라고 둘러대도 되겠다. 라면이라는 낱말이 머리에 꽂히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라면은 꼭 그러하다.
라면에는 잡다한 것이 필요치 않다. 굳이 어묵을 넣고 유부를 넣고 콩나물을 넣고 만두를 넣지 않아도 된다. 넣으면 라면전골이 된다. 단무지나 김치가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라면의 친구 김밥이 있으면 더 말할 게 없다.
극한의 인공미를 뽐내며 마주한 라면 한 그릇에 감사하고, 참기름, 참깨가 골고루 뿌려진 꼬마김밥에 입맞추며 후루룩 냠냠 먹는 점심은 그 자체가 극락이다. 극락을 즐기는 시간은 10분이면 넉넉하다.
2023. 6. 9.(금)
<알탕국수>
이틀 연속 국수로 점심을 때울 수 없잖은가. 이럴 때 좋은 수가 있다. 알탕국수가 있다. 바다 냄새와 땅 냄새가 적당히 버무려진 알탕국수는 해장국이기도 하고 안주이기도 하다. 바깥 날씨가 25도 이상 올라갈 땐 이열치열로 안성맞춤이고 꽁꽁 얼어붙는 엄동설한에는 몸을 데우는 데 그만이다. 뜨겁고 매워 입안을 얼얼하게 하고 식도와 위장에도 약간의 찰과상을 입힐 듯하지만, 결국에는 "어어, 씨원타."라고 말하게 만드는, 신비한 음식이다. 국수는 늘 옳다. 오늘 알탕국수 한 그릇 어때? (저는 어제 이미 먹었습니다^^)
2023. 6. 9.(금)
<비빔국수>
매운 걸 좋아하지 않는다. 언젠가 굵은 고추에 된장 바른 반찬을 먹고 위경련이 일어났다. 언젠가 꽈리고추 볶음을 먹고 뒷골에 쥐가 났다. 언젠가 비빔국수를 먹고 갑작스레 배탈이 났다.
매운 걸 먹고 싶을 때가 있다.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먹어야 할 때가 있다. 뒷감당에 자신이 없어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머리가 기억하는지 혀가 찾는지 알 수 없다. 그런 날이 있다.
빨간 고추장을 보자마자 '아차, 물국수를 주문할걸' 하고 0.1초 후회했다. 참깨를 보고서는 마음의 평정을 어느 정도 찾았다. 말간 멸치국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비로소 젓가락질을 했다.
기왕 매운 음식 먹는 김에 좀더 매워보자 싶어 씹어먹은 고추는 풋내가 났다. 고추장 매운맛에 진 것일까 원래 덜 매운 것일까. 그릇 다 비우는 사이에 얼굴 땀 닦느라 휴지 석 장 썼다.
그리 덥지 않은 날씨에 그리 멀지 않은 곳을 갔다 왔다. 벌써 뱃속에서 꾸르릉 꾸르릉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위경련 안 일어나고 뒷골에 쥐 안 났으니 배탈도 나지 않았으면 한다.
2023. 6. 7.(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