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뜻깊은 <남명> 공연
퇴근 도장을 찍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달렸다. 거창 수승대 축제극장에서 큰들이 마당극 <남명>을 공연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연 보러 갈 사람은 미리 연락하라는 공지를 보고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퇴근 무렵 업무상 급한 전화가 오거나 난감한 숙제가 주어지거나 피하지 못할 사람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허사일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갔다. 하루 종일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은 물론이다. 김밥 한 줄을 입에 넣으면서, 싸이의 경쾌한 춤곡을 들으면서 신나게 달려갔다. 물론 감시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는 좀더 세게 달렸다.
7시에 공연을 시작할 것인데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아서 6시 30분쯤 도착했다. 달리기는 차가 했는데 내가 왜 땀이 나는 것이었을까. 수승대, 얼마 만이랴. 연극제를 보러 간 적은 없지만 어느 여름날 그 부근에서 잠시 더위를 피한 적이 있는데 거의 20년은 넘은 듯하다. 거창문화재단에서 제31회 거창국제연극제가 취소됨에 따라 후속 공연으로 ‘감악산 꽃&별 여행’ 축제를 여는데 수십 가지 공연 중 마당극 <남명>도 초청했다. 고맙기도 하여라. 축제는 9월 24일 시작하여 10월 2일까지 계속되는데 꽤 재미있고 즐길 만한 게 많다. 하나하나 소개해 드리지 못해 오히려 미안하다.
이날 공연은 몇 가지 점에서 뜻깊은 시간이었다.
첫째, 마당극 공연 보러 간 거리로 치면 두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다. 하동 평사리, 창원시 진영읍, 남해 스포츠파크, 진해 진해루 등에 오로지 마당극을 보기 위해 가 보았는데 그런 곳과 견줄 만했다. 자동차는 힘들었는지 모르지만 달려가는 내 마음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보통 마당극을 보러 가는 시간은 오전 10시 또는 오후 1시쯤이다. 그때는 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다. 이날은 해가 거의 질 무렵이어서 주변을 둘러볼 필요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갔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시간으로는 넉넉했지만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법이다. 행사장 주변까지 가서 뺑뺑이를 좀 돌았다. 그렇게 찾아간 공연장도 퍽 드물다.
둘째, 가장 멋지게 공연하는 마당극 <남명>을 본 날로 기억될 것 같다. <남명>을 처음 본 것은 산청 시천면 한국선비문화연구원 특별무대였다. 마당극 공연만을 위해 무대 장치를 꾸몄었다. 정말 멋지고 훌륭했지만 지나고 보니 공연 시간이 낮이어서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산청 동의보감촌 잔디광장에서 낮에도 보고 밤에도 보았다. 밤에는 조명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냥 ‘밝음’이었다. 경남도문화예술회관과 사천문화예술회관에서도 보았다. 그곳은 공간이 너무 커서 무대와 객석이 멀다. 배우들의 표정과 숨소리를 느끼기 힘들다. 거창 수승대 축제극장은 무대의 크기와 조명, 객석과의 거리, 객석의 구조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공연장이었다. 하긴 거기서 국제연극제를 무려 30년가량 해 왔는데 말해 무엇 하겠는가. 거기서 펼쳐진 마당극 <남명>은 배우의 연기와 조명과 음향이 관객들에게 가장 잘 전달되는 구조였다. 배우들도 그런 걸 느꼈을 것이다.
셋째, 따라서 산청 마당극마을에도 전용 공연장이 하루속히 건립돼야 한다는 것을 더 크게 느꼈다. 극단 큰들 창립 기념 공연을 하던 9월 4일 토요일 저녁에 마당극마을에서 <오작교 아리랑>을 보았다. 코로나 때문에 관객 50명만 함께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지만 뭔가 아쉬움이 있었는데, 그 아쉬움이란 바로 수승대 축제극장 같은 공연장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마당극마을에 멋들어진 마당극 전용 공연장 하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주 공연하는 동의보감촌에도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오늘내일 당장은 어렵겠지만 내년, 그다음 해쯤에는 정말 꿈을 현실로 만들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후원해야 할 까닭이 있다.
넷째, 마당극 한 작품의 변화와 진화는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생각해 보게 하는 공연이었다. 거창에서 하는 공연인 만큼 대사 중에 거창을 한두 번 언급하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처음 공연을 본 분들은 좀 다르겠지만 말이다. 일일이 받아 적지 않아서 낱낱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2018년 10월 처음 무대에 올린 <남명>과 오늘 본 <남명>은 분명 같은 작품이지만 반드시 같은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대사도, 몸짓도 조금씩 달라진다. 배우도 바뀐다. 남명 조식, 돌이, 할배 등 몇몇 배우는 그대로이지만 그 외 배우들은 역할이 달라진다. 한번 정해진 틀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노력과 끊임없이 바꾸고 또 바꾸려는 노력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다. 41번째 공연 중 절반 정도 본 나는 그런 것을 강하게 느낀다. <남명>을 100번째쯤 공연할 때에는 이 작품이 어떻게 변화, 발전해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다섯째, 큰들은 올해 직접 농사지은 벼를 수확했다. 이 벼를 타작하여 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쌀을 한 봉지씩 담아 모든 후원회원께 보냈다. 추석 전에 받아볼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자연이 그것까지는 허락해주지 않은 것 같다. 5월 6일 모내기하고 9월 13일 추수하여 9월 15일 도정한 쌀을 오늘 받았다. 페이스북에는 여러 후원회원들이 큰들로부터 받은 쌀을 소개했다. 길고 짧은 그들의 글에서 감동과 고마움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나도 똑같은 마음이다. 그런 날, 즉 오늘 큰들로부터 받은 고마움과 감동을 거창 공연장에서 뜨거운 박수와 함성으로써 조금이나마 되돌려 주었으니 무척 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섯째, 가을이 가기 전에 마당극을 두세 번이나 서너 번이나 대여섯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날이다. 10-11월에 공연이 더 있을 것으로 강력하게 추측, 기대하는바, 나에게 행운의 신이 따라주고 행복의 신이 미소를 지어준다면 나는 적어도 서너 번은 공연을 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올해도, 많이 아쉽지만, 마음과 정신에 여유와 감동이라는 큰 선물을 받은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날이다.
공연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달렸다. 서진주 나들목 통과하니 9시 17분이다. 평일 저녁의 짧은 나들이에 기분 참 좋다. 오는 내내 큰들과 마당극을 생각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정도로 무궁무진 재미있고 의미있고 감동있고 진정성있는 큰들과 큰들의 작품이다.
2021. 9. 28.(화)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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