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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큰들 마당극 보러 가기

무릉도원

by 이우기, yiwoogi 2021. 9. 18.

<무릉도원>

 

태풍이 지나간 뒤 공기는 맑았다. 하늘은 쾌청했고 구름은 하얬다. 마당극 공연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이고 마당극 관람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이런 날 재미있고 유익하고 즐거운 마당극 한 편 관람하는 것 이상 좋은 게 있을까 싶었다.

 

2021년 산청한방약초축제가 한창인 산청 동의보감촌으로 향했다. 6월 13일 일요일 오후 <오작교 아리랑>을 본 뒤 거의 석 달 만에 가는 발걸음이었다. 그때는 큰형님, 형수님과 함께 갔는데 오늘은 아내와 동행했다. 오늘 공연 작품은 <효자전>이다.

 

축제 기간인 9월 17일부터 22일까지 엿새 동안 날마다 마당극을 공연하는데 모두 비대면 공연이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관객 없이 공연하는 것이다. 첫날인 17일에는 오후 2시에 공연하는 <효자전>을 유튜브 생중계로 보여주었다. 나는 유튜브 대화창에다 온갖 수다를 풀어놓으며 온라인으로나마 모처럼 실시간 공연 관람의 흥분을 만끽했다.

 

오늘은 동의보감촌 잔디마당에서 공연을 하는데, 관객은 마당극 공연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숫자만 함께하게 했다. 객석에 의자를 20개 남짓 띄엄띄엄 놓았다. 공연장 주변에는 산청한방약초축제를 찾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직거래장터가 벌어져 있었다. 직거래장터에 들어갈 때 출입자 이름 등록을 위한 080 전화를 하고, 마당극 객석에 들어갈 때 또 080 전화를 하고 체온을 재고 손 소독을 했다. 마스크는 어딜 가나 필수다.

 

오랜만에 관객들 앞에 선 배우들은 아주 신이 났다. 이전에 보던 <효자전>과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작품인데도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다. 대사 하나하나가 찰지고 몸동작은 날렵하고 가벼웠다. 비록 20명도 채 되지 않은 적은 수의 관객들 앞이지만 관객과 함께하는 공연이라는 설렘의 표정이 가득했다.

 

 

파란 하늘을 예쁘게 수놓은 흰 구름과 마당판의 검은 천과 직거래장터를 장식한 뾰족 텐트의 녹색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 가운데 배우들은 우리를 웃기고 울렸다. 어머니, 귀남이와 갑동이, 임뻥 아재와 그의 어머니, 한양의 대감들과 기생들, 지리산 산신령들, 저승사자들이 펼쳐나가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리는가 하면 어느 순간 그 긴장을 확 풀어버린다. 그렇게 울고 웃는다. 한 시간이 금방 간다.

 

<효자전>을 본 것이 몇 번이랴. 오늘 본 <효자전>은 어제 유튜브로 본 것과 다르고 5월 29일 동의보감촌에서 본 작품과 달랐다. 똑같은 대사도 다르게 들리고 똑같은 몸짓도 다르게 느껴진다. 신입단원이라는 이름표를 뗀 민서 배우도, 올해 새로 투입된 정경 배우도 다른 배우들 사이에서 제 몫을 차분하고도 진지하게 잘 해내면서도 도드라지지도 않게 잘 녹아들었다.

 

내일은 <오작교 아리랑>을 유튜브 생중계 공연한다. 현장에 가면 필수 관객 중 한 명이 되어 손뼉이라도 보태고 함성이라도 조금 끼워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축제이자 추석 연휴 동안 여섯 번 공연을 이어간다. <효자전>은 이제 다 했고, 내일과 모레는 <오작교 아리랑>, 그리고 추석날과 다음날에는 <남명>을 공연한다. 욕심으로는 모두 다 현장에서 직접 보고 싶은데, 그건 무리이지 싶다.

 

공연을 다 본 뒤 나와 아내는 기바위가 있는 ‘기천문’ 앞으로 올라갔다. 새로 놓은 ‘무릉교’를 건너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데다 큰들에서 푸드트럭 ‘청이네’를 새로 ‘개업’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푸드트럭’이라는 말은 ‘먹거리 트럭, 음식 판매 트럭’이라고 하면 되겠는데(국립국어원), 아무튼 코로나19를 이겨내기 위한 새로운 지혜를 짜낸 큰들을 응원하기 위해서라도 꼭 가 봐야 하는 곳이었다. 극단 2팀(막공팀)이 팽팽 잘 돌아갔더라면 그런 시절이었더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먹거리 트럭이다.

 

손바닥 위에 하얗게 보이는 트럭이 큰들이 운영하는 먹거리 트럭 '청이네'이다. 

 

큰들 단원 두 명이 샌드위치, 커피, 아이스크림 같은 걸 팔고 있었다. 크지 않은 트럭을 맞춤하게 개조하여 부지런히 손발을 움직이며 손님을 맞았다. 우리는 샌드위치와 아이스크림과 냉커피(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마당극 보면서 따가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았더니 시원한 그 무엇이 절실해졌던 것이다. 아메리카노는 시원 찹찹해서 좋았고 샌드위치는 보드랍고 고소한 빵과 그 속에 들어찬 갖가지 과일들이 정말 맛있었다. 배가 고팠던 탓도 있을 것이지만, 보통 빵집이나 편의점에서 사 먹던 샌드위치와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하고 사랑스러운 맛이었다.

 

이 먹거리 트럭은 한방약초축제 기간뿐만 아니라 상설 운영한다고 하니 동의보감촌 갈 적마다 꼭 한 번씩 들러 이것저것 사 먹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당극 공연을 하는 잔디광장 주변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운동 삼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15분은 족히 걸릴 거리이고, 잰걸음을 놓으면 5분쯤 걸릴 거리이다. 힘들겠다 싶거나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면 차를 타고 올라가도 된다. 무릉교 입구에도 너른 주차장이 있으니까. 필봉이나 왕산을 등산한 뒤 내려오던 사람들이 배낭을 멘 채 나무 그늘에 앉아 키위주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는 장면은 참 편해 보였다. 알맞은 위치에 먹거리 트럭이 생겼으니 모두에게 큰 복이다.

 

무릉교는 무릉도원으로 가는 다리이겠다. 다리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구조이다. 심하게 출렁이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장난으로 흔들어대면 좀 흔들거릴 정도였다.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중간쯤 가다가 돌아왔다. 중간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힘차게 솟아오르는 분수대가 무지개를 그려내고 왼쪽으로 보면 드넓게 펼쳐진 동의보감촌과 멀리멀리 하늘과 구름과 산들을 볼 수 있는 비경이 우리를 반긴다. 무릉도원은 그 다리 건너에 있지 아니하고, 무릉도원은 함께하는 사람과 마주보고 웃는 여유 속에 있을 것이고 마당판에서 벌어지는 마당극을 보면서 신명 나게 웃고 울면서 손뼉 치는 그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마침내 우리들 마음에 있을 것이므로 굳이 다리를 건너야 할 까닭을 모르겠던 것이었다.

 

아내와 산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마당판을 걸어보면서, 무릉교를 건너갔다 오면서, 그리고 큰들의 먹거리 트럭 ‘청이네’ 곁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오늘 날씨 정말 참 좋다”라는 말이다. 그다음 많이 나눈 말은 “오랜만에 마당극을 볼 수 있어서 참 좋다”라는 것이다. 그다음 많이 한 말은 “군대 간 아들도 건강히 잘 지냈으면” 하는 것이었다. 닷새 연휴 중 이제 겨우 하루 지났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2021. 9. 18.(토)
이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