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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어린이날

by 이우기, yiwoogi 2021. 5. 5.

출근하는 날과 똑같이 6시에 일어났다. 밥상을 차렸다. 때맞춰 일어난 아내와 간단하게 요기했다. 목욕을 갔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이지만 수칙을 지키면서 영업을 한다. 처음엔 나밖에 없다가 나올 즈음엔 서넛이었다. 떠들지 말라는 지침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 탕 안에서 전화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집에 와서 옷 갈아입고 사무실로 나갔다.

 

밀린 것이라고도, 밀리지 않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200자 원고지로 치자면 25장 정도 썼다. 오늘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굳이 그렇게 한 것은, 주말에 산청으로 마당극 보러 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해 둔다. 아들에게 편지도 썼다. 입대 후 쉰다섯 번째 편지다. 아들이 어린이였을 때 우리에게 얼마나 큰 행복을 안겨주었는지 추억을 더듬었다. 잠시 숨을 골라야 했던 시간이다. 미소를 품은 시간이기도 했다.

 

독서실에서 자격 시험 공부를 하는 아내에게 갔다. 사무실에서 먹으려던 김밥 한 줄을 그대로 들고 국숫집으로 들어갔다. 비빔국수 하나, 물국수 하나를 나눠 먹었다. 김밥은 앞뒤 꼭지부분만 먹었다. 아내는 다시 독서실로 나는 집으로 왔다. 잠이 쏟아졌다. 20분 정도 잔 것 같은데 꿈자리는 어지러웠다. 텔레비전에서는 어린이날 특집으로 영화 <슈퍼맨>을 하고 있었다. 고인이 된 크리스토퍼 리브가 주인공역을 맡았다.

 

산청에 갈 일이 있었다. 바람도 쐴 겸 쏜살같이 다녀왔다. 가는 길 오는 길에는 어린이날답지 않게 차가 많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명석막걸리 한 병을 샀다. 어느 분의 호평을 기억해낸 것이다. 그러고선 숙호산을 향했다. 들길 걸을 때는 제법 더웠고 숲속 길은 제법 서늘하였다. 오후 5시즈음이었는데 해는 그새 뉘엇뉘엇 넘어가고 있었다. 1시간 10분 걸었다. 땀은 그다지 나지 않았고 다리는 편안했다.

 

집에서 다시 대충 씻고 아내를 태우러 갔다. 버스를 타도 되고 택시를 타도 되고 걸어와도 될 거리이지만 굳이 태우러 갔다. 집에 놀면서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이다. 돌아와서는 김치찌개를 끓였다. 묵은 김치와 삼겹살과 기타 등등 온갖 야채를 넣었다. 이정희 선생이 준 상추와 나불천 언덕에서 뜯은 민들레 잎으로 쌈을 싸 먹었다. 나는 명석 막걸리 한 잔, 아내는 테라 맥주 하나로 목을 축였다. 이렇게 어린이날이 다 가고 있다.

 

국민학교 5학년까지 어린이날이 무엇인지 몰랐었다. 5학년이던 1978년 어린이날이었던가 보다. 그날 무슨 일로 큰집에서 놀았는데 큰어머니께서 맛있는 떡을 쪄주시면서 어린이날이라서 기념으로 맛있는 것을 해준다고 하신 것 같다. 사탕도 얻어 먹었겠지. 그렇게 기억한다.

 

아들을 키우면서 어린이날을 알뜰히 챙겼다. 생각해 보면 1년 365일이 어린이날이었다. 항상 아들 먼저 챙기고 늘 선물을 준비했다. 사 달라고 하면 다 사주었고 해 달라고 하면 다 해주었다. 굳이 따지면 안 사주고 안 해준 것도 많겠지만, 웬만하면 섭섭지 말라고, 기 죽지 말라고 다 해 주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알 것이라 믿었다. 이 믿음은 변함이 없다.

 

어린이날이 다 간다. 나름대로 바쁘게 보냈지만 돌아보니 무의미하게 보냈다. 이렇게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께 어린이마냥 재롱을 피워보고 싶었던 마음은 이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사랑도 그리움도 추억도 모두 화석이 되어버렸다. 내일이 꼭 월요일 같기만 하여 괜스레 심장 두근거리고 긴장되는 것을 보면, 어린이날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닌 듯하다.

 

2021. 5. 5.(수)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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