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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커피

by 이우기, yiwoogi 2021. 4. 27.

젊을 적, 그러니까 30대 시절엔 싸돌아다니면서 하루에 믹스커피 서너 잔씩 마셨다. 새벽 두세 시까지 책 읽고 인터넷 보면서 놀았다. 체력이 강한 줄 알았다.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듯하기에 ‘청춘의 피는 끓는다’던 민태원의 ‘청춘예찬’이 틀리지 않구나 생각했다.

40대를 넘어가면서 깨달았다. 커피를 마시면 심장 박동이 일정하지 않아지고 잠이 오지 않는다. 밤새도록 엎치락뒤치락 거리며 동서고금 온갖 상상과 걱정은 혼자서 다 했다. 전전반측이라는 말을 수만 번 곱씹었다. 다음날 낯이 푸석푸석해지고 골은 멍해졌다. 커피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쯤 온 나라에 커피가 대유행하기 시작했다. 건강 검진 때는 위장에 좋지 않으니 커피를 줄이라고 했다. 술보다 커피를 먼저 들먹였던가….

술 약속 있는 날엔 아메뭐라고 하는 커피를 한두 잔 마셨다. 알코올이 카페인을 이길 줄 알았다. 알코올과 카페인이라는 두 낯선 외국어는 사이가 나빴을까, 좋았을까. 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새벽부터 화장실 들락날락하게 하는 두 웬수가 되었다. 커피를 아예 피해야 했다.

둘뿐이던 사무실에 상대적으로 젊은, 정신적으로는 아주 젊은 직원이 잇달아 둘 들어왔다. 커피를 아주 좋아했고 아주 잘 탔고 아주 잘 권했다. 커피와 크게 다툰 뒤인지라 사양하다가 조금씩 마시다가 어쩌다 조금 더 마셨다. 맛은 “쓰다”와 “시다”, 그리고 조금 문학적으로 “고구마 탄 냄새 같다”, “어릴 때 맡던 밀대 타는 냄새 같다”라고 평했다. 커피보다는 커피를 사이에 둔 짧은 시간이 좋았다. 좋은 시간을 보상받은 덕분에 밤은 길었다. 괜찮았다. 아침엔 좀 둔중한 머리를 흔들면서 임상실험 결과를 공유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커피 쟁이’ 직원 가운데 하나가 그만둔다.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는다. 원두를 사서 커피를 볶고, 볶은 커피를 갖고 와서 아침, 점심으로 갈고, 커피 물을 내리던 장면은 이제 기억에서나 볼 수 있게 됐다. 지구 어느 구석에 붙었는지 모를 나라 이름과 제품 이름 따위를 줄줄 외며 무게와 온도와 시간을 재던 모습은 한동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열흘 전부터는 아예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심장 두근거리는 일은 커피 말고도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커피 아니라도 밤새도록 전전반측하며 걱정하고 고민해야 할 일이 지천에 늘렸기 때문이다. 좁아터진 새가슴을 녹아내리게 하는 일도 사흘거리로 일어나니까. 그러던 중 예상했다고도 예상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없는 겨를에 사직서를 냈다는 것을 알았다.

커피 향은 묘한 매력이 있다. 쓴가 하면 시고 신가 하면 달고 단가 하면 다시 쓰다. 그런 맛을 종합하면 고소한 맛이라고 할지. 그런 맛의 세포 속에 스며드는 것은 마주앉은 이와의 추억이다. 추억의 맛은 단가 하면 쓰고 쓴가 하면 시고 신가 하면 다시 단 법이다. 추억을 이어가던 커피의 맛은 이제 어찌 이어질지 모르겠고 커피와 함께 쌓아가던 추억은 어느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쓸지 알 수 없다. 정지상도 말하지 못하였고 김소월도 상상하지 못하였을 어떤 것이 며칠째 내 주변을 감싸고 있다.

돌아갈 수는 없지만 다시 30대로 또는 40대로 돌아간다면, 믹스커피든 아메리카노든 커피와 더 친해지도록 노력할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아니, 이제부터라도 커피든 피아노든 음악이든 여행이든 하나라도 제대로 배워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후회랄지 미련이랄지 다짐이랄지 망상이랄지 아무튼 그런 애매한 감정이 생긴다. 아니, 이미 생기고 있었는데 애써 모른 척해 왔다고 해야 옳다. 오늘 어쩌다, 마신 커피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2021. 4. 27.(화)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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