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봄날
한 인생이 있다
늙었고 가난하였다
6월 같은 4월 하순 어느날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검정 외투에 파묻힌 검정 비닐봉지
벤치에 놓고 돌아앉아 중얼거린다
지갑을 어디 두고 온 것일까
잃어버린 가족이 그리운 걸까
놓쳐버린 정신을 찾는 걸까
가여운 인생의
가벼운 몸부림에 비닐봉지가 엎어졌다
갈아입을 옷인가 했더니 아니고
허기를 채울 빵인가 했더니 아니고
밥벌이할 망치인가 했더니 아니다
목마른 인생의 비닐봉지에는
천만 뜻밖에 아메리카노 한 잔이
고이 담겨 있었던 것인데
거꾸러진 채로 국물을 흘려보낸다
빨대를 타고 벤치를 적시고 콘크리트에 스며
추운 인생의 발바닥을 적신다
허공을 헤매는 그의 눈에 보일 리 없고
미몽에 빠진 그의 정신에 느껴질 리 없고
낡아빠진 겨울 등산화 밑창을
적시고 적셔도 알아챌 리 없다
송홧가루 날리고 잔디 잎새 꼿꼿한
6월 같은 4월 하순 어느날 오후
그는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
그는 무슨 생각을 하던 것일까
가여운 인생의 넋은
어디로 흘러내리고 있었던 걸까
잡담하는 동네 아주머니도 있고
오가는 젊은 직장인도 많았지만
누구 하나 가여운 인생을 거들떠보지 않았고
풀린 눈동자를 의식하지 않았고
두툼한 외투를 살펴보지 않았다
빨대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 같은 그의 커피를
봄바람도 외면하고 하늘도 모른 척했다
피 철철 흘리는 늙고 가여운 인생의
추운 봄날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2021. 4. 20.(화)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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