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큰들이 올해 제작한 새 마당극 <정기룡>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한 정기룡 장군(1562-1622)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 마당극의 부제는 ‘영웅의 부활’이다. 공연 시작할 때 진은주 기획실장은 “이 마당극을 통하여 잊혀진 정기룡 장군이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부활하기를 바란다.”라고 소개한다. 영웅은 우리들 가슴속에서 부활할 것이다. 그렇게 부활한 영웅은 불멸한다.
정기룡 장군은 1562년 하동군 곤양현 중평, 지금의 하동군 금남면 중평에서 태어났다. 마당극에서 군무를 추며 부르는 군가 가사에서 “하동의 아들 용맹한 무사”라고 하는 것은 그의 고향이 하동인 때문이다. 요즘도 노래든 운동이든 무엇 하나 잘했다 하면 어디의 아들이라고 붙이는데 다 그 까닭이 있다. 유명한 사람의 이름에 얹혀 고장을 자랑하고자 하는 심리이자 전략이다.
정기룡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섬진강 전설을 들으며 자란다. 어머니는 자장가를 부를 때도 “아가야 우리 아가야. / 두꺼비 울음소리 들리니. / 왜구를 물리쳐 나라 구한 섬진강 두꺼비 우는구나. / 너도 너도 얼른 자라 훌륭한 장군님이 되려무나. / 이 나라 백성을 살리는 위대한 영웅이 되려무나. / 위대한 영웅이 되려무나.”라고 빌고 빌었다. 정기룡은 어릴 적 들은 자장가에서 두꺼비가 왜구를 물리쳤듯이 자기도 왜적을 물리치는 용맹한 장수가 되리라고 다짐했을 것이다.
정기룡 장군은 1592년 4월 13일 임란 최초 전투인 거창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금산전투에서 혈혈단신 적진에 뛰어들어 조경 장군을 구출하였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조선의 조자룡’이라 불렀다. 마당극 <정기룡>에서 동네 아낙들은 정기룡 장군이 조경 장군을 구출한 장면을 마치 직접 눈으로 본 듯이 이야기한다. 조경 장군을 구출해 오는데 왜놈의 칼에 조경 장군의 손가락 세 개가 잘렸다. 정기룡 장군이 그 손가락을 주워 와서는 붙여주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그 손가락이 잘 오무려지지 않아서 가운뎃손가락만 치켜세운 것처럼 보인다는 우스개도 들려준다. 왜놈을 향한 욕이다.
정기룡 장군은 상주판관(요즘의 소령급)으로 아군보다 열 배나 많은 왜군과 대치하여 격전 끝에 상주성을 탈환한다. 이 전과로 서애 유성룡은 정기룡 장군을 상주목사(요즘의 군수 이상급) 겸 감사군 대장으로 천거한다. 이때는 1593년으로 장군 나이는 31세에 불과했다. 감사군 대장은 ‘감히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군대의 대장’이라는 뜻이다. 백성들은 정기룡 장군의 감사군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물론 전투가 없을 때에는 병졸들이 농사일까지 도와주니 늘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따라서 ‘감사군’이라는 말은 중의적으로 쓰인다. 감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군대(敢死軍)이자 백성들이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는 군대(感謝軍)인 것이다.
이 동네는 정기룡 장군 덕분에 전쟁의 피해에서는 잠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다시피 한 논밭을 다시 일구자니 일손이 크게 부족하다. “젊어서는 서방 잃고 전쟁 통에 자식 잃은” 할머니와 아낙들은 남정네들이 있으면 자갈밭이라도 하루빨리 옥토로 바꿔줄 것이라며 탄식한다. 이때 정기룡 장군의 감사군이 말을 타고 나타난다. 병사들은 동네 주민들과 어울려 일을 시작한다.
군인과 마을 주민이 함께 어울려 자갈밭을 옥토로 바꿀 때 나오는 노래는 군가 ‘아리랑 겨레’이다. 군대 시절 아침저녁으로 제법 불렀다. 군가 치고는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전투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가사가 아니라서 더욱 맛깔스럽게 불렀다. 가사는 이렇다. “밟아도 뿌리 뻗는 잔디풀처럼 / 시들어도 다시 피는 무궁화처럼 / 끈질기게 지켜온 아침의 나라 / 옛날 옛적 조상들은 큰 나라 세웠지 /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로 뭉쳐 / 힘세고 튼튼한 나라 만드세 / 아리 아리 아리랑 아리 아리 아리랑 / 아리랑 가슴에 꽃을 피우세” 이런 군가를 군인과 민간인이 함께 부르며 농사 짓는 모습은 진정 평화가 무엇인지 일깨워 준다. 군인이 칼을 벼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 군인이 괭이질 삽질에 익숙해지는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이다.
감사군 덕분에 쉽게 농사를 마친 마을 사람들이 감사군에게 머리 숙여 고맙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장군님, 이렇게 일을 도와 주셨는데, 묵을 기 없어갖고 대접할 기 없네예.” 진정 고마워하는 마음과 아무것도 보답할 게 없는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묻어나온다. 감사군 대장은 “괜찮네.”라고 흔쾌히 말한 뒤 병사들을 향하여 “그것 가지고 오게.”라고 지시하고 다시 마을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 감사군이 죽을 끓여 왔네.”라고 말한다.
이런 대사를 들으면 울컥해진다. 1989-1991년 강원도에서 군대 생활할 때 대민 지원을 나갔다. 그럴 땐 항상 부대 안에서 쌀을 비롯해 그날 먹을 부식을 가지고 나갔다. 민간인에게 무엇이라도 신세를 지면 안 된다는 철칙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지나가다가 무 뿌리 하나 마음대로 캐 먹지 않았고 풋고추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 경험이 부지불식간에 머리를 스쳐간다. 가슴속 가느다란 감동의 끈을 툭 건드린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사일 도왔다고 밥 지어내라 소리치는 군대도 없지 않을 것이다.
정신 없이 죽을 퍼 먹던 한 아낙이 일어난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데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라면서 흐느낀다. 눈물이 죽 그릇에 뚝뚝 떨어진다.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먹을 것까지 챙겨주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것이다. 눈물 섞인 죽은 짭짤했을 것이다. 계속 죽을 퍼 먹던 다른 아낙이 말한다. “눈물은 떨어지는데 숟가락은 잘 올라간다.” 이 대사를 듣는 순간 목이 컥 막힌다.
눈물은 왜 떨어지는가. 감사군 병사들이 부르는 군가에 그 이유가 들어 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네. / 임금님은 도망가고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네.”(1절) “임진왜란 정유재란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네. / 백성들은 끌려가고 삼천리 왜놈 천지 되었네.”(2절) 이런 세상에서는 하루하루가 눈물이고 날이날마다 한숨뿐일 것 아닌가. 전쟁 나간 서방과 자식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게 오히려 다행이고 대부분은 죽었다는 기별만 있을 뿐 시신조차 거두지 못하던 시절 아닌가. 그 와중에 정기룡 장군의 감사군이 나타나 농사일을 거들어 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먹을 것까지 마련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고맙고 미안하여 눈물이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다.
숟가락은 왜 잘 올라가는가. 백성들은 끌려가고 삼천리가 왜놈 천지가 됐다. 지옥보다 더한 지옥이 삼천리 금수강산에 펼쳐졌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백성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만 이길 수 있고 이겨야만 역사를 증명할 수 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죽 그릇에 숟가락이 자꾸 드나드는 이유이다.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인간 존재의 비극성이 잘 드러난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들려오는 삶과 죽음에 대한 비탄적 독백은 관객들의 마음을 저 아래로 아득하게 떨어뜨린다.
그런데 관객의 마음을 더욱 쓰라리게 하는 대목이 있다. 정기룡 장군의 감사군이 백성들에게 죽으로 끓여 먹이는 쌀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조정에 군량미가 많아서 조선 팔도 모든 병사들에게 풍족하게 먹이는 시절이 아니었다. 전쟁 5년 정도 겪고 나면 어딜 가든 먹을 게 없다. 연전연승을 이어가던 정기룡 장군은 왜놈의 수급(首級; 전쟁에서 베어 얻은 적군의 머리)를 다른 장군에게 주는 대신 쌀 30가마를 얻는다. 그 수급을 자신이 갖고 가면 상을 받고 계급이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정기룡 장군은 자신과 병사들이 상을 받는 것보다 백성들이 죽이라도 끓여 먹도록 하여 목숨을 이어가게 돕는다. 병사들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전쟁에서 얻은 수급을 다른 장군이 가져가 버리자 한 병사가 말한다. “대장님, 이기 우찌 된 일입니꺼?” 장군이 대답한다. “쌀이 없으니 나라에서 군량미도 내려오지 않고 백성들도 이미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네.” 좀더 혈기 왕성한 젊은 병사가 대든다. “그렇다고 수급을 내어 주면 우짭니꺼? 수급을 내어주모 우리가 목숨 걸고 싸운 공적은 누가 알아줍니꺼?” 다시 정기룡 장군이 정색을 하며 대답한다. “우리가 언제부터 공적을 바라고 싸웠는가?” “그런 건 아니지마는….” 그런 상황이 충분히 이해된다. 목숨 걸고 싸워 이겨 수급을 전리품으로 가져 왔는데 다른 장수가 쌀과 바꿔치기해 버리니 울화통이 터지지 않을 수 있나. 다른 동료 병사가 말린다.
정기룡 장군은 말한다. “오랜 전쟁으로 조선은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지고 굶주린 백성들이 도처에서 죽어가고 있네. 왜놈에게 죽는 것도 억울한데 굶어죽는 백성이 있어야 되겠는가?” 이런 말은 사실 조정 대신이 해야 할 말이다. 임금이 해야 할 말이다. 전쟁 중에라도 행정은 돌아갈 것이다. 그 행정을 맡은 사람이 해야 할 말이다. 전투 현장의 일개 지휘관이 할 말은 아니다. 정기룡 장군은 쐐기를 박듯이 한마디 더 한다. 이 한마디가 가슴에 와서 콱 박힌다. 가슴보다 머리로 모든 상황을 판단하려는 먹물들에게 쏘는 화살 같다. “백성을 구하는 것이 곧 나라를 구하는 것일세.” 이 말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대들던 병사도 고개를 숙인다. 평소 정기룡 장군의 생각이나 인품을 보아온바 가히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기룡 장군은 이렇게 얻은 쌀로써 백성들에게 죽을 끓여 먹인다. 백성들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 않을 수 없다. 진정 위대한 장군이 갖춰야 할 인간적인 면, 이성적인 면을 엿보게 한다. 마당극 <정기룡>이 전쟁, 전투, 싸움, 죽음과 같은 상황만을 연출했다면 감동이 훨씬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극단 큰들은 63전 63승의 명장의 일대기를 아주 짧은 마당극으로 다루면서도 이런 인간적인 면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덕분에 마당극 <정기룡>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장군의 용맹성에 대한 감격·흥분을 고양시키는 것과 더불어 한 영웅의 지극히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매력으로 관객들을 매료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정기룡 장군은 1597년 정유재란 때 고령현 전투의 승리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고, 1617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되기에 이른다. 1622년 통영 진중에서 직무를 수행하다가 향년 61세의 나이로 순직하였다. 현재 하동군 금남면에는 정기룡 장군의 사당인 ‘경충사’와 유물 전시관이 있고 사당 입구에는 장군의 생가가 초가집으로 복원돼 있다고 한다. 한번 가 보아야겠다.
정기룡 장군은 육전의 명장으로 왜적과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63전 63승의 불패의 신화를 이루었다. 선조는 “정기룡 장군이 없었더라면 영남이 없어졌을 것이고, 영남이 없어졌다면 우리 조선이 없어졌을 것이다.”라고 했다 하니 그 공을 짐작할 만하다. 사람들은 “바다에 이순신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이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 명성은 자자했다.
마당극 <정기룡>은 2020년 7월 1일 하동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처음 공연한 뒤 9월 19일·20일과 10월 3일·4일 네 번 더 공연했다. 나는 9월 공연과 10월 공연을 모두 보았다. 잇따라 네 번 연속 같은 마당극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행운이다. 9월 19일과 20일 공연에서 무어라 딱 잘라 말할 수 없이 느끼던 긴장감을 10월 3일과 4일 공연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고 연기를 하는 사람을 빼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을 작은 실수들도 없어져 가고 있다. 큰들이 공연장에서만 공연하는 게 아니라 마당극마을에서도 쉬지 않고 연습한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다.
극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달라지는 부분도 눈치껏 알아본다. 왜군 병사들이 처음엔 얼굴을 가리는 게 없었는데 10월 3일 공연부터는 마스크 비슷한 것을 쓰고 나온다는 것도 알아본다. 할매와 마을 아낙들이 힘들게 농사 지을 때 느린 동작에 맞춰 들려오는 장구 소리는 처음엔 미리 녹음한 음향인 줄 알았는데 관람 위치를 바꾼 오늘에서야 구석 자리에서 배우 한 명(아마도 송병갑)이 직접 장구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라는 것도 본다. 같은 작품이라도 여러 번 봐야 하고, 여러 번 보더라도 자리를 바꿔 가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오늘은 최승제 박사와 동행했다. 하동에서 열리는 <정기룡>을 네 번 본 것 중에 두 번을 함께했다. 처음엔 ‘토지장터주막’에서 비빔밥을 먹었고 오늘은 ‘남의 어머니 칼국수’에서 칼국수를 먹었다. 두 번 다 막걸리 한잔했다. “하동에서는 무슨 음식이든 참 많이 준다.”라는 게 공통 의견이고 “그런데다 맛도 좋다.”라는 것도 공통 생각이다. 네 번 가운데 두 번은 아내와 동행했다.
10월 3일 토요일 오후 3시경 공연 보고 아내와 최참판댁 마을을 내려오면서 한 가게에 전시해 놓은 생활한복을 유심히 보았다. 모양이나 색깔이 딱 내 마음에 들었다. 10월 4일 일요일 오후 1시경 최 박사와 최참판댁 마을을 올라가면서 생활한복을 다시 유심히 보았다. 값을 물었다. 현금가 4만 8000원이란다. 외상이나 카드를 쓰면 5만 원을 넘겠지. 나는 다짐했다. 10월 11일 일요일 <최참판댁 경사 났네>를 보러 올 때까지 그 옷이 그 자리에 있으면 그건 필시 나와 인연을 맺으라는 형제봉 산신령의 계시일 것이다. 현금 5만 원을 꼭 들고 가야겠다.
반가운 분들도 만났다. 경남일보 동료였다가 요즘은 통 못 만난 이규섭 씨가 나타났다. 그를 태워 온 사람은 몇 해 전 대통령 선거날 장대동 어느 국숫집에서 막걸리 마시며 당선인의 득표율 내기를 하던 조형돈 씨이다. 그때 내기에서 이긴 주인공이다. 평거동 10호 광장 근처에서 휴대폰 대리점을 하는데 아직 가 보지는 못했다. 아무튼 반가웠다. 페이스북에서 이름만 알던 이도 만났고, 언론에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던 사람이 오늘 민방위 대장 노릇을 했다는 것도 알았다.
극단 큰들이 새 마당극 <정기룡>을 준비하면서 기념품을 만들었다. 이름은 ‘정기룡 움직이는 메모지’이다. 가로·세로 6cm쯤 되는 이 메모지를 촤르륵 넘기면 말 탄 정기룡 장군이 칼을 높이 치켜 들고 왜놈들을 쫓아가는 장면이 동영상처럼 나타난다. 그래서 움직이는 메모지이다. 한 개에 3500원이고 3개 사면 1만 원이다. 첫 공연 때 여러 개 사서 나눠준 적 있다. 얼마나 팔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마당극을 본 관객들이 감동과 흥분, 그리고 묘하고 즐거운 여운을 안고 가도록 하기엔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오늘은 이 그림을 직접 그린 쿠미 씨가 공연장에서 판촉활동을 했다. 오늘은 제법 팔린 모양이다.
이런 기념품을 ‘굿즈’라고들 한다. 나는 2018년 1월 8일 이 말에 대하여 의견을 정리하여 쓴 적 있다. 누리방에 올려둔 글의 요지는 이렇다. ①‘굿즈’의 원래 뜻은 상품, 제품, 물품이다. ②대중문화에서는 특정한 인물, 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나오는 파생 상품을 가리킨다. ③‘굿즈’는 일본에서 주로 쓰는 말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머천다이즈’라고 쓴다. ④우리나라 언론 등에서는 주로 ‘캐릭터 상품’, ‘관련 상품’으로 쓴다. ⑤우리가 대중문화에서 쓰는 ‘굿즈’는 미국말이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에서 바로 들어온 것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날살이에서 바로 쓰기엔 적당하지 않은 말이다. ⑥이 말은 ‘팬 상품’, ‘캐릭터 상품’, ‘관련 상품’, ‘선물’, ‘기념품’ 등으로 적당하게 바꿔 쓰면 좋겠다. ⑦마지막으로, 이 말이 살아남을지, 뜻이 다르게 번져갈지, 이 말 때문에 잘 안 쓰게 되는 우리말에는 무엇이 있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도록 한다.
마당극 <정기룡>의 올해 공연은 끝났다. 모두 5회 공연 가운데 1회는 실내에서 4회는 실외에서 공연했다. 그중 나는 실외 공연 4회를 모두 보았다. 내년에는 얼마나 공연할지 궁금하다. 하동의 자랑, 하동의 아들을 선양하는 마당극이니만큼 주로 하동에서 공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최참판댁 경사 났네>와 어쩔 수 없는 선의의 대결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어느 작품을 더 많이 공연할지를 보는 것도 내겐 즐거움이다. 새 작품 만드느라 고생한 극단 큰들에 손뼉 크게 쳐 드리고, 역사 속 위대한 영웅을 부활하게 해준 하동군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모든 게 고마움뿐이다.
2020. 10. 4.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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