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마당극을 가장 잘 하는 극단 큰들의 마당극을 100번 보았다. 본 작품 수는 6편이다. <효자전>, <오작교 아리랑>, <최참판댁 경사 났네>, <역마>, <남명>, <정기룡>이 그것이다. 관람한 횟수가 들쭉날쭉한 만큼 평균 몇 번으로 퉁칠 수는 없다. 2017년 6월 큰들 창립 33주년 기념 정기공연을 경남도문화예술회관에서 보았다. 작품은 <오작교 아리랑>이었다.
본격적으로 공연장을 쫓아다닌 건 2018년 5월부터다. 산청 동의보감촌에서 <효자전>을 처음 본 뒤 나는 마당극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특히 극단 큰들 단원과 배우들이 연출해 내는 ‘극본 있는 마당극’과 ‘극본 없는 일상의 진정성’에 매료되어 버렸다. 마당극 공연장 쫓아다니기는 그렇게 시작했다.
2017년에 1번, 2018년에 33번, 2019년에 39번, 2020년에 27번 보았다. <오작교 아리랑>을 29번으로 가장 많이 보았고, <효자전>을 26번, <최참판댁 경사 났네>를 24번, 2018년 창작한 <남명>을 16번, 2020년 창작한 <정기룡>을 4번, 그리고 <역마>를 1번 보았다.
마당극을 본 뒤 감상문이랄까 후기랄까 아무튼 글을 썼는데 길고 짧은 글을 다 합하면 100편이 넘는다. 단순히 공연 일정을 안내한 것 등을 빼면 75편이다. 그래도 적어도 200자 원고지 30장 이상. 많게는 100장 가까이 되는 글들이다. 이 글을 묶어서 2018년에 ≪마당극에 미치다≫라는 책자를 만들었고 2019년에 ≪마당극에 빠지다≫라는 책자를 묶었다. 정식 출판은 아니다. 나 혼자 좋아서 열심히 공연 보러 다녔고 나 혼자 즐거워서 열심히 글 썼고 나 혼자 간직하려고 책자로 묶어 냈다. 그런 과정 자체가 행복이었다.
무엇 하나에 이렇게 몰입하는 순간이 즐거웠고 그 결과를 글과 사진, 책자로 기록해 두는 것이 행복했다. 큰들이 내 삶의 만족도를 높여 준 것이다. 이제 2020년에 쓴 글과 찍은 사진을 모아 작은 책자를 낼 꿈에 부풀어 있다. 12월쯤엔 그 결과가 나오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아내가 고맙다. 혼자 길을 나설 때는 함께해 준 적도 많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마당극 대사를 모두 외우겠다.” 그렇다. 외운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마당극을 마당극 공연장에서만 본 게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찍어 와서는 동영상을 보고 또 보았기 때문이다. 서울 출장 갈 때는 케이티엑스 3시간 30분 동안 마당극 3편을 각 한 번씩 보는 것으로 시간을 때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도 다 있다. 공연장에서 직접 마당극을 볼 때마다 웃기는 대사에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울리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찔끔찔끔 나온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그다음 장면이 어떤 것인지 다 아는 데도 번번이 처음 같고 날마다 낯설다. 내 머릿속 회로는 웃기면 무조건 웃고 울리면 앞뒤 재지 말고 울라고 하는 명령어가 입력돼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간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러다가 큰들에 스카우트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 큰들이 나를 스카우트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스카우트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은 500년쯤 뒤에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현재 내 직장에서 10년 동안 더 일한다. 재미있게 열심히 일한다. 이 직장을 그만두고 어디를 갈 생각이 전혀 없다. 큰들도 밥값만 축낼 중늙은이를 데려갈 생각이 1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말씀은 거두어 두시면 좋겠다. 다만, 나는 늘 큰들을 응원하고 후원하고 자랑할 것이다. 사랑할 것이다. 이것 하나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또 다른 사람은 말한다. “큰들에서 상 줘야겠다.” 그렇다. 이렇게 열심히 응원하고 후원하는데 상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음…. 그래서 받았다. 예상하지 못했고 더구나 기대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큰들 마당극을 100번 보았고, 마당극 관련 글을 100편 가량 썼고, 후원회원을 수십 명 소개해 주었다. 큰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공연장으로 모시고 갔다. 내 차에 태워서 밥 사드려 가면서 그렇게 했다. 이게 내가 큰들을 후원하는 방식이다. 어쨌든 큰들은 상 줄 만하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100번째 공연을 보던 날인 2020년 10월 10일 산청 동의보감촌에서(내가 처음 <효자전>을 보고 가슴에 커다란 무엇인가가 콱 박혔던 그 장소에서) 박춘우 무대감독님이 그린 그림과 정성 가득한 꽃다발을 받았다. 당혹스럽고 부끄러웠지만 기꺼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뺀다고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는 법이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이라기보다 감사패이다. 그래서 더 좋다.
이제 나는 큰일났다. 상 받았으니 앞으로 더 열심히 공연 보고 글 쓰고… 그래야 하니까. 이게 큰일인가. 큰일이다. 얼마나 좋은 큰일인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고마운 큰일인가.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큰일인가.
2020년 10월 10일 아침 머리가 아프고 배도 아팠다. 내가 쓰는 큰들 공연 관람 후기는 대체로 그 전날 저녁에 마신 술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무래도 산청 나들잇길이 부담됐다. 공연 보다가 중간에 들락날락할 것만 같았다. 100번째 공연을 보면 좋을 텐데, 못 봐도 괜찮다고 여겼다. 아직 올해 공연이 더 남았으니까.
그래서 책상에 잠시 앉아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았다. 2017년 이후 큰들 마당극을 보면서 내가 느끼고 감동하고 즐거워했던 일들을 몇 가지 주제로 정리해 보았다. 정리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일단 가 보자 하고 길을 나섰다. 그러다 보니 페이스북에 소문 내어 “함께 갈 사람 손 드세요.”라는 말도 못했다. 얼렁뚱땅 대충대충하다 보니 늘 이 모양이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한 지난날 정리하기를 돌아와서 마무리해 본다.
가. 기억에 남는 명장면 6가지
① <최참판댁 경사 났네>에서 임이가 끌려가는 장면
임이를 끌고 가려는 일본군과 그 임이를 놓지 않으려는 임이 엄마, 그 임이 엄마를 함께 붙들고 늘어지는 강청댁. 그들의 눈물, 그들의 목소리, 그들의 눈물이 내 눈앞을 가린다. 이 장면 이후 들려오는 곡조는 슬픔의 정한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두고두고 명장면이다.
② <남명>에서 임진왜란이 터지자 제자들이 한 명 한 명 달려나오는 장면
남명 조식 선생이 돌아가신 뒤 20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남명의 제자들은 평소 읽던 책을 덮어 놓고 전 재산을 팔고 가족과 생이별을 해 가면서 의병장이 된다. 의령 곽재우부터 합천 정인홍, 고령 김면, 함양 조종도, 초계 전치원, 산청 오장, 단성 이유성, 진주 이정, 거창 문위까지 뛰어나오는 의병장들의 칼과 깃발은 가슴을 요동친다. 이때 음악도 심장을 쾅쾅 두들긴다.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그들의 나라사랑, 백성사랑 정신이 전해져 와서이다.
③ <오작교 아리랑>에서 생선 회 뜨는 장면
아랫마을 남돌이 친구들이 윗마을 꽃분이네로 함을 팔러 간다. 함진애비와 꽃분이 이모 간에 실랑이가 벌어진다. 이때 남돌이 친구를 꼬드기기 위해 커다랗고 싱싱한 물고기를 가져 오고, 그 물고기를 즉석에서 회로 만들어 버린다. 마당극에서만 볼 수 있는 상상력을 소품을 이용하여 현실로 구체화해낸 명장면이다.
④ <효자전>에서 죽은 어머니가 산 아들을 꾸짖는 장면
이승과 저승은 엄연히 구분된다. 이승에서 목숨을 다하여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던 어머니는, 이승의 형제간에 크게 다투는 꼴을 보지 못하고 뇌성벽력 같은 호통을 친다. 저승을 가면서도 이승에 남은 자식들의 건강과 안녕, 그리고 형제간의 우애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잘 표현한 명장면이다. 가슴이 찌르르 아프게 된다.
⑤ <역마>에서 이야기꾼이 ‘홍길동전’을 들려주는 장면
역마살이 낀 성기는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한다. 마침 장터에서 이야기꾼이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홍길동전’이다. 부패한 조선을 버리고 율도국으로 가서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자는 이야기꾼의 웅변은 성기의 마음을 뒤흔든다. ‘나도 떠나고 싶다’는 성기는 충동에 휩싸인다. 이야기꾼의 신들린 연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⑥ <정기룡>에서 감사군이 괭이에서 칼을 뽑아드는 장면
상무(尙武) 정신은 언제나 필요하다. 평화로울 때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 백성들의 농사일을 돕던 정기룡 장군의 감사군은 왜놈이 쳐들어왔다는 기별을 받자마자 출동한다. 그들은 밭을 일구던 괭이자루에서 긴 칼을 뽑아들고 달려간다. 정교하고도 기발하게 소품을 만드는 큰들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심장이 쿵 내려앉을지도 모른다.
나. 기억에 남는 명대사 6가지
① <최참판댁 경사 났네>에서 “조선은 반드시 독립을 할 겁니다”
독립운동하던 김길상이 일본군에게 붙들려 가면서 하는 말이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광복을 위해 만주로, 간도로 달려간 독립군의 마음에 잠시 빙의해 보는 순간이다. 그러한 열정과 희생 덕분에 우리는 광복했다. 관객들은 들고 있던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 만세’를 외친다.
② <남명>에서 “나라의 모든 힘은 백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남명과 제자가 주고받는 대사에사 나오는 말이다. “너희들은 공부를 왜 하느냐?” “나를 알고 세상을 알기 위해 합니다.” “왜 알고자 하느냐?” “제대로 알아야 정의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느냐?” “그래야 백성이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남명은 말한다. “그렇다. 나라의 모든 힘은 백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보다 더 간결하고 정확하게 설명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③ <오작교 아리랑>에서 “그동안 서로 만나지도 않고 소통을 안해서 그렇지”
아랫마을 남돌이 부모와 윗마을 꽃분이 부모가 극적으로 화해했다. 이제 이 두 집안은 사돈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만나고 소통하면 서로 잘 통하는 것을, 그동안 서로 만나지도 않고 소통을 하지 않아서 원수처럼 지낸 것이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④ <효자전>에서 “자식은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느냐”
귀남이, 갑동이를 두고 어머니는 저승사자 뒤를 따라간다. 귀남이와 갑동이가 저승사자에게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사정한다. 하지만 저승의 법도는 냉엄한 것이다. 저승사자는 “자욕효이 친부대(子慾孝而 親不待)라!”라고 일갈하면서 혀를 끌끌 찬다. 풍수지탄(風樹之嘆)이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길 일이란 다 하여라’라는 말을 상기할 일이다.
⑤ <역마>에서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데서 살고 싶다”
역마살이 낀 성기는 구례에는 누가 사는지, 섬진강 건너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늘 궁금하다.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늘 같은 일상만 반복되는 현재보다는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데서 사는 게 더 좋겠다고 여긴다. 모르는 곳에서는 새로움이나 낯섦이나 희한함 따위가 호기심을 자극할 테니까. 성기의 역마살은 어쩔 수 없다.
⑥ <정기룡>에서 “백성을 구하는 것이 곧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정기룡 장군의 감사군은 자신들이 베어온 왜놈의 머리를 다른 장수가 가져가 버리자 화가 난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세운 전공은 어디로 가겠는가. 정기룡 장군은 그렇게 바꾼 쌀로써 죽을 끓여 백성들을 구휼한다. 백성을 구하는 것이 곧 나라를 구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전공을 바라고 싸운 게 아니므로. 가슴에 찌르르 전기가 통하게 하는 말이다.
다. 기억에 남는 공연 6가지
① 2018년 5월 19일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효자전>
2017년 6월 큰들 창립 33주년 기념 정기공연을 실내에서 본 뒤 거의 1년 만에 야외 잔디마당에서 처음으로 마당극을 보았다. 정색을 하고 보았다. 눈앞에서 배우들이 땀 흘리는 것, 가쁘게 숨 쉬는 것을 보았다. 마당극이라는 당시로서는 낯선 이 전통 연극 양식에 반해 버렸다. 잊을 수 없는 관람 기억이다. 돌아와서 장문의 후기를 썼더랬다. 이때부터 마당극을 보고 나면 곧바로 돌아와서 감동이 식기 전에, 기억이 흐릿해지기 전에 후기를 썼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다.
② 2019년 4월 28일 생초 국제조각공원 공연 <효자전>
마당극을 1년 남짓 보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가고 싶어졌다. 거리도 멀지 않고 공연 시간도 길지 않다.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좋아하셨고 경로당 친구분도 몇 분 데리고 가자 하셨다. 그렇게 시작하여 어머니는 <오작교 아리랑>, <최참판댁 경사 났네>, <남명>을 잇따라 관람하셨다. 친구분들도 무척 재미있어 하셨다. 남의 아들 덕분에 호강한다고 했다. 한 친구분은 찹쌀 한 되 남짓 되는 양을 나에게 전해주셨다. 올해는 안 가고 싶으신가 보다.
③ 2018년 10월 20일 새 마당극 <남명> 첫 공연
내가 마당극을 보기 시작한 때 그 작품들은 이미 100회 이상 공연해온 명작들이었다. <남명>은 2018년에 경남도와 산청군의 지원으로 창작하여 10월 20일 남명선비문화축제 기간에 처음 공연했다. 그 첫 공연을 보기 위해 수많은 큰들 마당극 애호가들이 몰려들었다. 큰들은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영상 촬영도 못하게 했다. 나는 스마트폰을 감추고 소리를 녹음했다. 듣고 또 들으면서 공연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창작한 작품의 첫 공연을 보는 것은 매우 설레는 일이다. 2020년 올해는 <정기룡>을 창작했는데 두 번째(야외에서는 첫 번째) 공연부터 보기 시작했다.
④ 2018년 11월 17일 아들과 함께 보러 간 진해루 공연 <오작교 아리랑>
2018년에 아들은 고3이었다. 대입 수학능력시험을 끝내자마자 세 가족이 진해로 놀러 갔다. 진해는 나에겐 추억이 서린 동네이지만 아내와 아들에겐 낯선 곳이다. 아들은 고3이었을 때 <효자전> 동영상을 보고 감상문을 강제로 쓴 적도 있다. 시험 마치고 아버지에게 꾀여 마당극 보러 간 아들을 큰들 단원들이 격려해 주었다. 고마웠다. 대학에 입학한 2019년 9월에도 역시 꼬임에 빠져 삼천포로 <남명>을 보러 간 적 있다.
⑤ 2018년 6월 1일 처음으로 휴가 내고 마당극 보러 간 남해 공연
남해 스포츠파크에서 마당극 <오작교 아리랑>을 공연한다는데 하필 평일이다. 그 앞날부터 몸이 근질근질하고 발바닥이 간질간질했다. 직장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휴가를 내라고 권고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오로지 마당극을 보기 위해 그날 오후를 휴가 냈다. 점심을 대충 때우고 부지런히 남해로 달렸다. 빽빽이 들어찬 남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맨 앞으로 나가 앉아서 보았다. 마당극 사랑의 온도가 한창 올라가던 중이었다.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다음 해에도 보러 갔는데, 이날은 주말이었다.
⑥ 2019년 5월 21일 코로나19 시대 비대면 공연
2020년 코로나19가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을 휩쓸었다. 일상이라고 여기던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공연예술 분야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었다. 큰들은 날마다 공연 취소 전화를 받아야 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관객 없는 비대면 공연을 하게 하고 그것을 유튜브로 중계하는 꾀를 냈다. 그렇게 공연한 데 대해 대금을 지급했을 것이다. 큰들은 극단 현장 공연장을 빌려 비대면 공연을 했다. 나는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 중 한 명으로 선택받아 갔다. 그날 나는 난데없이 남돌이 역을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 만약 내가 ‘남돌이’나 ‘길상이’나 ‘5분 사또’가 된다면 다시는 공연장에 가지 못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도 가고 있다. 그래도 그때 그 장면을 떠올리기만 하면 얼굴이 화끈해진다.
라. 스스로 뽑은, 잘 쓴 마당극 감상문 6가지
① 2017년 6월 25일 큰들 창립 33주년 정기공연을 보고
큰들 마당극을 보고 처음으로 쓴 감상문이다. 길게 쓸 생각이 없었는데 공연 장면을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 할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어서 환장할 뻔했다. 큰들 단원들이 누리방(블로그)에 댓글을 많이 달아 주었다. 내 글이 조그마한 응원이 되는 것 같아 기뻤다. 그땐 몰랐다. 그러던 내가 지금의 나로 바뀌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저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결과라고 해두자.
② 2018년 5월 19일 우리 시대 ‘효’에 대하여
마당극을 보자마자 집으로 달려왔다. 마당극 보면서 흘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글을 썼다. 뭐라고 쓸 것인지 생각하지 않고 되는대로 썼다. 평소 효에 대해 생각해온 것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글을 쓰면서 그렇게 내 마음을 확 끄집어 당기는 경우는 잘 없었다. 책 몇 권을 읽거나 유명한 강사의 특강을 듣는 것보다 마당극 한 편이 더 울림이 클 수 있다는 것을 느낀 날이다.
③ 2018년 8월 11일 <오작교 아리랑> 대사로 읽는 우리 세상
더운 여름날 밤에 객석 맨 뒤에서 희미한 조명에 의지하여 대사를 받아 적었다. 이때만 해도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촬영할 것을 생각지 못했다. 그렇게 적은 대사 하나하나에 내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했다. 쓰고 보니 200자 원고지 100장에 가까웠다. 시답잖은 잡설일지라도 한때 내 정신의 끝부분은 되겠다 싶어 누리방에 올려 두었다. 내용보다는 양에서 기억에 남는 후기이다.
④ 2019년 2월 9일 큰들의 마당극 <남명>에서 돋보이는 점
마당극 <남명>은 창작 초연부터 보아온 작품이기에 애정이 많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에서도 남명을 들은 바 많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 많은 사람에게 이 작품을 쉽게 해설해 주고 싶었다. 사실, <남명>은 다른 작품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혹시라도 마당극 <남명>을 보러 가는 사람이 내가 쓴 글을 미리 읽고 간다면 더 재미있게 마당극을 감상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쓴 글이다. 마당극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글을 읽으면 남명의 경의사상(敬義思想)에 관심을 가지고, 또한 마당극이라는 전통 연극 양식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쓴 글이다.
⑤ 2020년 4월 13일 명품 조연의 힘-마당극 <효자전>의 경우
<효자전>에 대해 글을 많이 썼다. 그만큼 요모조모 뜯어보면 볼수록 잘 만든 작품이다. 기승전결이 잘 연결되어 있고 각종 소품들의 역할도 제법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중요한 대사는 처음과 뒷부분에 두 번씩 되풀이되도록 짜 놓았다. 그런 가운데 치매 걸린 할머니의 역할에 눈길이 갔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효자전>의 이야기 속에 치매 걸린 할머니의 삶과 애환이 또 하나의 작품으로 들어앉아 있는 구조였다. 할머니 역을 맡은 류연람 씨의 빼어난 연기 덕분이기도 하다.
⑥ 2018년 9월 30일 극단 큰들의 마당극에서 배우는 것들
경남민예총 기관지 ≪예술IN 예술人≫에 기고한 글이다. 큰들 마당극을 보면서 느낀 것, 배운 것, 깨달은 것 들을 6가지 열쇠 말로 정리한 글이다. 대략 마당극을 17-18회 정도 보았을 시점에 쓴 글인데 지금 읽어도 참 잘 정리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글이다. 자화자찬도 가끔은 해야 한다. 큰들 마당극을 몇 번 본 사람이라면 이 글 내용에 대부분 공감하리라고 생각한다.
마. 듣기 좋고 부르기 좋은 주제곡(삽입곡) 6곡
① <역마>에 나오는 ‘봄날은 간다’
마당극 <역마>를 보던 날은 2019년 3월 30일이다. 화개장터에서 제24회 화개장터 벚꽃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가는 길에 바람에 날린 벚꽃잎들이 눈처럼 휘날렸다. ‘봄날은 간다’의 가사는 슬프다. 이별의 정한이 묻어난다. 비련의 주인공 성기와 계련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암시한다. 하지만 맨 뒷부분에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옥화가 이 노래를 부름으로써 희망차고 밝은 미래를 상징하기도 한다. 같은 노래가 비극과 희망을 동시에 안고 있다. 참 부르고 싶은 노래이고 노래 잘 부르는 이로부터 듣고 싶은 노래이다.
② <남명>에 나오는 ‘배움의 길’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배라.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 부른다. 이 노래의 가사에는 남명 사상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안으로는 경, 밖으로는 의, 청렴하고 정의로운 선비들이 되세’라는 말은 곧 남명사상(敬義思想)의 고갱이이고,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시대정신이다. <남명>을 몇 번 본 뒤에 술자리에서도, 집에서 설거지하다가도, 운전해 가다가도 문득 문득 부르는 노래다. 가사도 쉽고 곡도 쉽다.
③ <오작교 아리랑>에서 꽃분이가 부르는 ‘아리랑’
아리랑에 대해서는 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아랫마을 남돌이와 결혼하려는데 양 집안 어른들끼리 싸우고서는 결혼을 파탄내려고 한다. 이때 꽃분이는 우리 겨레가 수천 년 동안 불러온 ‘아리랑’을 조용히 부른다. 아리랑은 양 집안 사람들의 가슴에 엉겨붙어 있는 불신과 대립의 감정을 봄바람이 눈 녹여 주듯이 누그러뜨려 준다. 우리는 아리랑 민족 아닌가.
④ <최참판댁 경사 났네>에 나오는 ‘내 거야’
조준구와 그의 부인 홍씨가 어린 서희만 남은 최참판댁에 나타나서 전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혈안이 된다. 곳간 열쇠를 가로채 흥청망청 써댄다. 온갖 금은보화를 팔아넘긴다. 이때 경쾌한 곡조와 신나는 춤으로 즐기는 노래다. “이제 이 최참판댁은 바로 이 조준구의 것이야!”라고 외치는 대목에서는 좀 섬칫하다. 그런 조준구의 앞날에는 어떤 운명이 펼쳐질 것인가.
⑤ <정기룡>에 나오는 ‘영웅 정기룡’
정기룡 어머니가 기룡에게 섬진강 전설을 들려준다. 섬진강의 두꺼비처럼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장수가 되라고 축원한다. 세월은 삽시간에 30년 가까이 흘러 정기룡은 장군이 되어 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한가운데이다. 병사들이 힘차게 군무를 추면서 이 노래를 부른다. 박력이 넘친다. 가사 또한 멋지다. ‘하동의 아들, 용맹한 무사’ 정기룡의 지략과 용맹성을 잘 드러낸 노래다. 앞으로 한동안은 이 노래가 귓가에 맴돌 것 같다.
⑥ <효자전>에 나오는 ‘황진이’
내의원 시험 치러 간 귀남이 마침내 합격했다. 그러나 그는 내의원 선배와 대감에게 잘 보여야 한다. 대감은 벌건 대낮부터 기생집을 찾아가 술판을 벌인다. 이때 나오는 노래다. 우리가 아는 기생의 대명사는 황진이 아닌가. 마침 ‘황진이’라는 제목의 유행가가 있다. 유행가를 마당극 속으로 적절하게 잘 끌고 들어갔다. 이 노래가 딱 멈춰지는 대목을 눈여겨보면 그것도 재미있다.
바. 기억에 남는 관객 배우 6명
① 2018년 7월 14일 사천 공연에서 시의원 남돌이
사천시의회 전재석 시의원이 남돌이로 지목됐다. 내 생각에는 시의원은 남돌이 역에 맞지 않았다. ‘‘아차, 뭔가 잘못 짚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대충 나이로 봐서도 그런데다(의원님 죄송합니다^^), 점잖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시의원 아닌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 뒤 이야기는 상상에 맡긴다. 사람을 선입감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 이런 공연에서 자기에게 어떤 역할이 주어지면 열에 아홉은 잘해 낸다. 그런 걸 깨달은 날이다. 자기 때문에 공연을 망치면 안 된다는 어떤 사명감 같은 게 순식간에 솟아난다.
② 2019년 11월 2일 화개장터 공연에서 먼저 가버린 남돌이
하동 화개장터에서 <오작교 아리랑>을 공연할 때 남돌이가 중간에 가 버렸다. 마당 한가운데서 펼쳐지는 공연에 집중하느라 나는 그 사람이 갔는지 어쨌는지 몰랐다. 남돌이 집안과 꽃분이 집안이 화해하여 결혼식을 재개할 때였다. 남돌이가 다시 마당으로 불려나와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내 옆에 앉은 어린이들이 “남돌이 갔어요!”를 외친다. 분명 남돌이 아버지, 어머니가 공연 끝날 때까지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으라고 했건만, 그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덕분에 다른 관객 한 분이 긴급 대타로 남돌이 역을 해야 했다. 그래도 무난하게 잘 이끌어 나가고 관객들도 다 그렇게 이해한다. 그런 일도 있더라.
③ 2018년 7월 18일 대사를 먼저 치는 건방진 남돌이
정형상 동네 형님, 서동하 동네 누님과 함께 산청 동의보감촌에 <오작교 아리랑>을 보러 갔다. 맨 앞줄에 앉았던 형상 형님이 남돌이가 됐다. 형님은 이 작품을 처음 보는데도 불구하고 극의 흐름을 짐작하고 있었던가 보다. 배우가 대사를 하기 전에 먼저 대사를 치고 나가는 바람에 요절복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남돌이 아버지가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물은 뒤 남돌이가 우물쭈물 아무 말도 못하면 “내가 니 애비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해 왔다. 그런데 형상 형님은 “예, 아버지!”라고 먼저 말해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니 애비다!”라고 함으로써 더 큰 웃음을 이끌어 내려던 애초의 대사는 어긋나 버렸다. 그날 진주로 돌아와서 세 사람은 팔선주 됫병을 비웠다. 처음엔 달달 고소하지만 나중엔 확 취하는 술을 그 뒤로 나는 자주 사 먹었다.
④ 2020년 5월 24일 자기 연기에 빠진 길상이
나의 직장 동료인 김동주 선생이 나와 함께 마당극을 보러 하동으로 갔다. 김 선생은 끼가 많고 장난도 곧잘 친다. 맨 앞줄에 앉았다가 기타등등, 등등동지, 길상이 등의 역할을 느닷없이 하게 됐다. 그런데 이 친구는 배우들이 이끄는 대로만 따라갈 성격이 아니다. 갑자기 자기도 배우가 된 듯 열심히 자기 연기를 하는 게 아닌가. 보통 때와 다르게 연기하는 등등동지를 다루자니 배우들이 진땀을 흘린다. 그만큼 관객들은 더 웃었다. 김동주 선생은 처음 함께 간 마당극 공연을 보고 곧바로 큰들 후원회원이 되었다. 멋진 친구다.
⑤ 2018년 10월 20일 처음 만난 5분 사또
창작 마당극 <남명>을 처음 공연하던 날, 5분 사또도 처음 만났다. 이방을 비롯한 세 아전이 새로 부임하는 사또의 인상착의를 말할 때 나는 어떤 배우가 나올지 상상했다. 배우 가운데 그렇게 분장을 하여 사또 역할을 하는 것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새로 부임하는 사또는 바로 객석에 앉은 어떤 관객이었다. 큰들이 <오작교 아리랑>에서는 남돌이를, <최참판댁 경사 났네>에서는 등등동지, 길상이를, <정기룡>에서는 민방위 대장을 관객 중 한 분을 즉석 섭외하듯이 <남명>에서는 5분 동안 연기할 신임 사또를 관객 중에서 뽑는 것이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극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또는 자신의 끼를 주체하지 못해 쉽지 않은 역을 수락한다. 그러고선 최선을 다하여 연기를 해준다. 처음 만난 5분 사또, 그 분의 흰 머리카락은 사또라는 직급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모르는 분이었는데, 기억에 오래 남는다.
⑥ 2019년 5월 25일 안산에서 오신 노래하는 길상이
처갓댁이 있는 안산에서 노래강사 겸 전문사회자로 활동하시는 박정열 님이 노래교실 할머니들을 모시고 하동까지 오셨다.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고 사랑이다. 기념품 수건도 한 상자 싣고 오셨다. 큰들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진주-하동, 진주-산청을 밤마실 가듯이 가는 나는 그분의 열정 근처에도 못 미친다. 그분이 마침 등등동지 겸 길상이로 뽑혔다. 부끄러워하는 듯하면서도 공연을 즐기는 그를 보는 노래교실 할머니들은 자지러지듯 웃었다. 그의 희생 덕분에 할머니들은 더 오래 남을 추억 한 보따리씩 안고 돌아가게 됐다. 공연 끝나고 할머니들 모시고 안산에 도착했을 때는 아마도 밤 10시는 넘었으리라. 그렇게 하루를 모조리 투자하여 마당극을 보러 달려와 준 박 선생님이 잊히지 않는다. 지금은 나와 페이스북 친구로 글자로써 서로 안부를 전하는 사이가 됐다. 안산에 처가댁이 있는 덕분에 더 멋지게 보였고 더 다정스럽게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이 외에도 큰들 마당극과 관련한 일화는 수없이 많다. 생각나는 대로 모조리 정리해서 기록하려면 나는 죽고 말 것이다. 때때로 어떤 것은 망각하는 게 낫다. 때때로 어떤 것은 기록하지 말아야 한다. 마당극 말고 큰들 단원들과의 사이에서도 이야깃거리는 제법 있다. 3년 남짓 오며 가며 또는 가며 오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오고간 정도 많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아무튼 2020년 10월 10일 오늘은 한 극단의 마당극을 합하여 100번째 본 날이다. 모르긴 해도 100번보다 더 많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번번이 기록하고 정리해 둔 덕분에 횟수를 알 수 있었지만, 다른 많은 분들은 나처럼 기록하지 않아서 언제 100번을 넘어섰는지를 모를 뿐일 것이다. 이제 새롭게 101회부터 시작한다. 200회까지 갈지 어떨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큰들이 있고 마당극을 계속 공연한다면, 그리고 내 건강과 시간이 허락한다면, 또 하나 내 가족들도 유별난 취미를 용인해 준다면, 나는 200회를 달성할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참, 왜 여섯 가지 주제에 각 여섯 가지 이야기를 모았을까.
2020. 10. 10.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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