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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큰들 마당극 보러 가기

어버이날에 생각해보는 마당극 <효자전>

by 이우기, yiwoogi 2020. 5. 8.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어버이 은혜에 감사하고, 효 사상의 미덕을 함양하기 위해 지정한 법정기념일이라고 한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날’이라고 했는데 언젠가 ‘어버이날’로 바뀌었다. 아버지들의 섭섭한 마음을 헤아린 것일까. 1956년부터 어머니날이라고 하던 것을 1973년에 어버이날로 바꾸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입학한 게 1974년이니 오래전 일을 기억해낸 셈이다. 어버이라면 중국글자말로 ‘부모’인데, ‘부모의 날’이라고 하지 않은 게 무척 다행이다.

 

어버이날이라고 하면 당연히 ‘효도’라는 말이 떠오른다.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도 덩달아 떠오른다.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효라는 뜻이다. 자식이 자라서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성을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인다. 이를 우리말로 ‘안갚음’이라고 한다. 은혜를 갚지 않는다는 말로 오해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다. 안갚음은,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효도라는 말을 떠올리면 공자가 말했다는 ‘효는 백행지본’이라는 말이 연결된다. 고등학교 때 국어시간에 배운 말인데 잊히지 않는다. 효도는 인간으로서 해야 할 백 가지 행동 가운데 가장 근본 되는 일이라는 뜻이다. 백 가지 행동은 모든 행동을 가리킨다.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해야 할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 효도라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뜻이다. 어버이 없이 내가 태어날 수 없었으니 그 근본을 좇아 어버이를 지극정성으로 잘 모시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요즘은 ‘어버이날’, ‘효도’ 이런 말 생각하면 극단 큰들 마당극 <효자전>을 떠올린다. 극단 큰들이 절찬리에 공연 중인 마당극 <효자전>은 산청군 지리산 약초골에서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두 아들의 지극정성 효도 이야기다. 큰아들 귀남과 작은아들 갑동이 들려주는 사람 이야기다. 나는 2018~2019년 2년 동안 10번 넘게 이 마당극 작품을 공연장에서 봤다. 내가 직접 촬영한 동영상은 50번 넘게 봤다.

 

공연을 보는 사람은 울다가 웃다가 하는데 마지막에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내는 사람이 아주 많다. ‘효’라는 주제 앞에 마음이 숙연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생각하면 송구스럽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다. 마당극 한 편을 보면서 돌아가신, 또는 살아 계신, 또는 편찮으신 어버이를 떠올리게 되고 자연스럽게 눈물이 흐르게 된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음 아픈 사연 한 자락, 가슴 시린 추억 한 도막이 떠오르는 것이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사이에 눈물이 먼저 나올지도 모른다.

 

어버이날에 마당극 <효자전>을 생각해 본다.

 

첫 번째, 어머니와 두 아들 사이를 본다. <효자전>에 나오는 어머니는 홀로 두 아들을 키운다. 어머니 모든 인생은 두 아들에게 달렸다. 머리가 좋아 공부를 많이 한 큰아들은 의사가 되기를 바란다. 그의 성공을 위해 집안 기둥뿌리를 뽑아준다. 무엇을 주더라도 아깝지 않다. 귀한 장남을 향한 어머니 마음은 바다보다 넓고 깊고 하늘보다 높고 넓다. 무조건이다.

 

한양에서 내의원 시험에 합격한 큰아들이 “어머니 돈”이라는 전보를 보내오자 있는 살림 없는 살림 다 끌어모아 한양으로 향한다. 큰아들이 좋아하는 산청 곶감을 챙겨 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큰아들은 한양까지 찾아온 어머니와 동생을 모른 척한다. 돈만 챙겨서 대감들 회식 장소로 가 버린다. 그러잖아도 지병이 있던 어머니는 병이 깊어진다. 형님을 원망하는 동생 갑동에게 어머니는 “너거 형님 너무 원망하지 마라. 내 죽고 나면 너거 형님밖에 없는 기라.”라고 말한다. 그 자리에서 무거운 작대기로 큰아들 엉덩이를 때려줘야 했는데, 관객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머니는 그렇지 않다.

 

작은아들 갑동이는 천둥벌거숭이다. 개구쟁이다. 어머니 지갑에서 돈을 훔쳐 친구들과 논다. 동네 아재가 낚은 쏘가리를 중간에 가로채 간다. 어머니는 그 아들이 제발 훌륭하고 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니가 운제 사람 될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속을 썩이고 애를 먹이는 작은아들을 향한 마음은 큰아들을 향한 그것과 다르지 않다. 작은아들이 산삼을 구하려고 지리산 천왕봉을 갔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지 걱정이 태산이다. 마침내 작은아들이 돌아왔다.“아이고 이놈아, 거 먼데를 우찌 갔다 왔노?”라는 말에 그동안의 걱정이 다 담겼다.

 

작은아들 갑동이 천신만고 끝에 어머니 병환을 구완할 산삼을 구했다. 이 약만 달여 먹으면 어머니는 건강을 회복한다. 바로 그때 임금께 산삼을 구해 바침으로써 높은 벼슬에 오를 욕심으로 가득 찬 큰아들 귀남이 집에 들어선다. 앞뒤 재지 않고 곧장 산삼을 가져 가려는 큰아들과 절대 안 된다고 맞서는 작은아들이 다툰다. 어머니는 산삼을 뺏어서 큰아들에게 준다. 자신의 건강보다는 큰아들 출세가 더 중요한 것이다. 어머니의 가 없는 희생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날은 어머니 생일이었다. 산삼을 대감에게 뺏기고 거지가 된 큰아들이 초상집에 나타난다. 당연히 작은아들과 싸울 수밖에 없다. 귀남과 갑동이 서로 네 탓을 하며 다툰다. 저승사자 뒤를 따라가던 어머니는 이 꼴을 보고 있을 수 없다. 이승으로 잠시 돌아온 어머니는 큰아들 귀남을 꾸짖는다. “오냐 오냐 하며 키웠더니 사람 다 베리놨네!” 어머니 말 한마디에 잘못 키운 자식을 바라보는 한이 서렸다. 갑동을 먼저 꾸짖는다. “오데 형님한테 대드노? 내가 그리 가르쳤더나?”라고 호통친다. 죽어서도 자식들의 우애와 안녕을 염려하는 어머니 마음의 안쪽을 들여다본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다.

 

두 번째, 임뻥아재와 치매 걸린 그의 어머니를 본다. 귀남이와 갑동이는 임뻥아재를 ‘아재’라고 부른다. 동네 어른이다. 그는 한의사이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다. 자기 아들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똥을 눠 놓고는 떡 만든다고 한다. 남의 것인데도 눈에 띄기만 하면 냉큼 뺏어가 버린다. 그러고선 자기 것이라고 우긴다. “메에~롱!” 하면서. 임뻥아재는 어머니를 지극하게 모신다.

 

어머니가 자기더러 “아부지~!”라고 부르는데 “어머니, 아들 보고 아부지가 뭐입니꺼? 아들아 해보이소!”라고 말하는데 애정이 담긴 말투다. 서로 말도 잘 안 통하고 아들조차 아버지라고 할 정도로 심한 치매 노인을 모시는 태도가 아니다. 쏘가리를 잡는 것도 어머니께 매운탕을 끓여드리기 위해서다. 반포지효의 표본이다. 안갚음의 실천이다. 지금은 비록 치매에 걸려서 사리분간을 잘 못하지만, 젊었을 적, 그러니까 임뻥아재가 어렸을 적에는 이 어머니가 경호강에서 쏘가리를 잡아 회도 떠 주고 매운탕도 끓여주었을 것 아닌가. 이제 그것을 되갚는 것이다.

 

치매 걸린 어머니가 자기가 눈 똥을 집어 들고 떡이라며, 돈이라며 아들에게 내민다. 그 아들, 즉 임뻥아재는 “어머이 떡 싫십니더. 떡 어머이 잡수이소~!”라며 뿌리친다. 그런데 그 장면조차 정겹다. 치매에 걸린 노인이 이 방 저 방에 똥을 눠 놓으면 얼마나 기겁할 일인가. 환장할 일 아닌가.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임뻥아재에게는 똥을 들이미는 어머니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눈치가 없다. 오히려 인정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는 분위기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어 보는 게 아니라서 알아서 잘 처리하고 알아서 잘 해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평소 그의 행동과 말투가 눈에 들어온다. 배우의 찰진 연기력 덕분일 것이다.

 

치매 걸린 어머니는 몽유병까지 갖고 있다. 공동묘지에서 서성이는 임뻥아재와 갑동이 앞에 나타난다. 처음엔 혼비백산하던 두 사람은 귀신처럼 나타난 사람이 임뻥아재의 노모라는 것을 알고는 마음을 놓는다. “몽유병일세. 저렇게 집에까지 잘 돌아가시네~!”라는 말 속에도 어머니를 향한 평소의 그의 태도가 들어 있다. 어머니의 생활 습관이나 버릇, 몸에 지닌 병 같은 것을 훤히 꿰고 있다. 위험한 병에 걸렸는데도 진맥 한번 하지 않던 귀남이와 대조된다. 내의원 의사이면서도 어머니 병환이 어느 정도인지 관심이 없던 귀남이와 비교된다. 효도란 어버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몸이 아픈지를 살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임뻥아재는 효자다. 어머니가 멋도 모르고 저승사자를 따라가자 “어머이, 그리 가면 안 됩니더~!”라면서도 따라간다. 따라가는 게 효도다.

 

세 번째, 갑동이를 시험 보는 산신령들의 생각을 본다. 갑동이 임뻥아재와 함께 지리산 천왕봉으로 산삼을 구하러 간다. 산신령들이 갑동을 시험한다. 그토록 어머니 말을 안 듣고 제 마음대로 놀던 갑동이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아차’ 하는 깨달음을 얻고 약을 구하러 떠난 것이다. 그동안 잘못을 깊이 뉘우쳤다는 뜻이다. 이제라도 어머니를 위해 무엇이든 해보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 갑동이를 시험한다. 산삼을 관장하는 산신령이 갑동 앞에 나타난다. 천왕봉에 가고자 하는데 좀 데려다 달라고 한다. 함께 간 임뻥아재는 첫마디에 “됐십니더!”라고 뿌리치지만 갑동이는 다르다. 할머니를 업고 천왕봉을 오른다. 중간에 만난 반달곰도 물리친다. 보통 사람이라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아났을 테지만 갑동은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곰과 싸운다.

 

산신령들이 일부러 갑동이를 시험한 것은 다른 뜻이 아니다. 자기 어버이를 섬기고 효도하는 것이란 곧 다른 사람의 어버이도 똑같은 마음으로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은연중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 어버이만 소중하고 내 어버이에게만 잘하는 것이란 이기주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 없는 말로 일러준다. 갑동은 비록 자신의 어머니 병환을 고치기 위해 산삼 찾아 먼 길 나섰지만 중간에 만난 나이 많은 어르신을 결코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경로효친’이라는 말을 일깨운다. 노인을 공경하고 부모를 섬긴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효도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겠다.

 

네 번째, 두 아들의 행동과 태도 변화를 본다. 귀남은 어릴 때부터 너무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다. 이름부터 남다르다. 큰아들이라는 이유에서다. 자라면서 공부도 잘했다. 어머니는 집안의 명운을 큰아들에게 걸었다. 어머니 기대에 부응하여 내의원 시험에 합격했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바라는 자식의 모습이다. 어머니 마음은 하늘을 떠다녔을 것이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돈 없어도 걱정이 없었다. 효도다. 어버이는 자식이 이름을 날리면 덩달아 훌륭해지는 것이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예전에는 어떤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하면 “뉘 집 자식인고?”라고 먼저 물었다. 자식의 출세가 곧 부모의 출세이던 시절이니까.

 

귀남은 변했다.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다 보니 고향에서 고생하는 어머니를 잊어버렸다. ‘자신이 잘 돼야 집안이 잘 되는 것’이라는 독선에 빠졌다. 이런 신념을 갖게 된 건 역설적으로 어머니의 잘못된 교육관ㆍ자식관 때문이기도 하다. 높은 대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어렵게 어렵게 돈을 구해 온 어머니를 외면하고 기생집으로 달려간다. 어긋난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행동이 어머니께 얼마만 한 마음의 상처를 안기는지 안중에도 없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어머니는 늘 자기 편일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불효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깨닫는 바가 더 커야 하는데 반대로 가 버렸다.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명약 산삼을 뺏어갔지만 대감에게 배신당한다. 거지가 되었다. 추레한 몰골로 고향집을 찾아오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대성통곡하지만 이미 늦었다. 저승사자는 말한다.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느냐?” 동생 갑동이와 싸운다. 갑동이 구해 온 산삼을 뺏어갔으니,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당연한 일이다. 결국 귀남이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평생 어머니 모시고 효도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한다. 이제 효자가 되었다.

 

갑동이는 어릴적부터 모나게 살았다. 어머니 사랑을 독차지하는 형님 밑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반발심에서 더 어긋나게 놀았는지 모른다. 어머니 주머니에서 돈을 훔쳐 놀러 가는 것을 예사로 생각했다. 불효다. 어머니는 속으로 항상 말했을 것이다. “저기 운제 인간이 되겠노?” 집안 기둥뿌리를 한양 내의원 시험 보러 가는 큰아들에게 뽑아 주려는데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철딱서니 없는 억지로 들린다.

 

어머니가 아프다. 평소 지병이 있었던 데다 한양까지 가서 큰아들에게 문전박대 당한 뒤 더욱 심해졌다. 형님에게 어머니 진맥이라도 해 보라던 갑동이는 변했다. 어머니를 들쳐 업으며 “인자, 어머니 병은 내가 고칠 끼다!”라고 선언한다. 임뻥아재가 어머니를 치료하지만 효험이 없다. 공동묘지 처녀 무덤에서 시신 다리를 잘라 고면 산삼이 된다는 임뻥아재의 제안도 받아들여 본다. 마침내 산삼을 구하러 천왕봉으로 향한다. 불효 막심한 자식이던 갑동이는 어느새 어머니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고난과 역경을 감내하는 효자로 바뀌어 있다.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갑동의 행동과 말투를 좇아가던 관객들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물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빼어난 연출 덕분이다. 이야기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덕분이다.

 

마당극 <효자전>은 효도라는 불멸의 주제를 곰곰이 곱씹게 해준다. 이야기를 이리저리 재어보고 뜯어보면서 ‘효도란 무엇인가’, ‘효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걸 생각하면서 관람한다면 더 재미있다. 부모의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아들들의 생각 속으로 들어갔다가 하다 보면 문득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어머니와 두 아들의 이야기가 주제이지만, 조연으로 등장하는 임뻥아재와 그의 치매 걸린 어머니 이야기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특히 치매 걸린 어머니의 행동과 말투, 그 아들의 행동과 말투를 유심히 볼 필요도 있다. 마당극이니까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치매 걸린 어머니를 대하는 아들에게서 깊은 믿음과 넓은 아량을 느끼는 건 나뿐일까.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극단 큰들의 마당극을 보면서 느낀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이런 글은, 마당극을 한두 번 본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한번도 보지 않은 사람은 어리둥절할 뿐 재미없을 것이다. ‘백문불여일견’이라고 했다. 짐작하건대 6월에는 산청군 동의보감촌에서 마당극 상설공연이 열릴 것이다. <효자전>과 <오작교 아리랑>과 <남명>을 번갈아가면서 공연할 것으로 추측되는바, 일정을 잘 확인하여 꼭 한 번 보시기를 권한다. <효자전>은 주제와 이야기 전개와 연기와 연출, 모든 게 정말 잘 짜인 명작 마당극이다.

 

2020. 5. 8.

이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