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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과 글을 보는 내 눈

그랜드 비전

by 이우기, yiwoogi 2020. 4. 29.

경남도청 보도자료에서 가져 옴

 

김천에서 거제까지 172㎞를 잇는 남부내륙고속철도는 철도가 지나가는 지역 사람들의 오랜 소원이었다. 합천, 진주, 고성, 통영, 거제 사람들은 이 고속철도가 완성되면 새 세상이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지 없을지 설왕설래하던 차에 도지사 공약 1호로 내건 김경수 지사가 당선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해 1월 국토균형발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했고 정부재정지원사업으로 확정했다. 이제 올해 11월까지 국토교통부 타당성 조사와 기본계획 수립, 기본ㆍ실시 설계를 거쳐 2022년 착공할 일이 남았다. 예정대로 잘 된다면 2028년 거제~김천까지, 더 이어서 서울까지 고속철도로 다닐 수 있게 된다. 

 

고속철도가 생기면 좋은 점은 무엇일까. 거제, 통영, 고성, 진주, 합천 사람들과 덩달아 산청, 거창, 하동, 남해 사람들이 서울까지 이동하기 좋을 것이다. 버스보다 안전하고 빠르게 갈 수 있을 것이다. 비행기 삯보다 싸게 빨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울과 경남을 뻔질나게 왔다 갔다 하는 사람 말고는 크게 와닿는 게 있을까 싶다.

 

‘관광활성화’라는 고색창연한 개념을 들이대 보더라도, 이 날랜 물건을 타고 경남 사람들이 서울로 많이 갈까, 서울 사람들이 경남으로 많이 올까. 나는 그 숫자나 비율이 비슷하게만 나온다면 성공이라고 본다. 좀더 기대해 본다면, 앞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친환경, 맑은 공기, 자연, 환경친화 같은 참살이 개념이 커지면서 경남으로 손님이 더 많이 올지도 모른다. 산업 물류도 그만큼 원활해질 것이다. 안 좋은 점보다 좋은 일이 많아지면 좋겠다.

 

경남도청 보도자료에서 가져 옴. '단디 만드는 더 좋은 경남'이라는 말은 무척 아름답고 쉽게 잘 붙였다.

경상남도가 4월 28일 ‘경남발전 그랜드비전이 여는 남부내륙고속철도 시대’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낸 건 다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꼼꼼히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우리 경남지역을 발전시킬 기발한 내용이 많이 담겼을 것이다. 교통, 물류, 문화, 관광, 산업, 경제, 지역개발 들 우리 지역을 완전히 탈바꿈시킬 묘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을 것이다. 보도자료 뼈대는 “경상남도가 경남발전연구원에 ‘남부내륙고속철도 연계 경남발전 그랜드비전 용역’을 맡겼는데 그 결과가 나왔다”라는 것이다. 그 결과는 궁금한 사람이 찾아보면 되겠다.

 

나는 ‘그랜드 비전’이라는 용역 제목과 보도자료 제목에 눈길을 준다. 쏘아보는 것이다. 도청에서 이런 제목을 붙여서 보도자료를 내었으니 많은 신문들이 그대로 신문 기사 제목으로 썼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신문도 있다. 한 신문은 ‘남부내륙철도 그랜드 비전 나왔다’라고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용역결과를 읽어보고 이런 제목을 달아도 되겠다고 여긴 것이다. 한 신문은 ‘남부내륙철 연계 권역별 발전 밑그림 나와’라는 제목을 붙여 4면에 창문틀만하게 배치했다. ‘밑그림’이라고 하는 게 더 알맞겠다 싶었으리라. 밑그림은 곧 계획서이기도 하고 청사진이기도 하다.

 

경남신문 2020년 4월 29일 1면. '그랜드 비전'을 그대로 인용해 보도했다.

들머리사이트 ‘다음’에서 ‘그랜드 비전’를 검색하면 경남도청의 이 보도자료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사들을 볼 수 있다. 대부분 ‘그랜드 비전’이라고 썼다. ‘그랜드 비전’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크고 웅장하고 찬란하다. 매우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며 성공적이다. 이미 일의 절반 이상을 해 놓은 듯한 느낌마저 든다. 보도자료를 낸 도청으로서는 대단한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나는 다르게 본다. 나는 좀 좀스런 사람이라서 그런지 이렇게 거창하게 꾸민 듯한 말을 보면 그 속내를 의심하는 편이다. 우리말보다는 미국말을 갖다붙여 놓으면 더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심각하게 의심하는 쪽이다. ‘그랜드’는 무엇이고 ‘비전’은 무엇이며, 그래서 만들어진 ‘그랜드 비전’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경남도민일보 2020년 4월 29일 4면. 본문에서는 '그랜드 비전'이라고 썼지만 제목에서는 '밑그림'이라고 썼다.

그랜드(grand)는 ‘웅장한, 위대한, 원대한, 위엄 있는’이라는 말이다. 비전(vision)은 ‘시야, 시력, 보이기, 미래’라는 뜻이다. 그랜드 비전은 ‘웅장한 미래, 위대한 미래, 원대한 미래’라는 뜻이겠다. 그럼 용역을 맡길 때부터 ‘남부내륙고속철도 연계 경남발전 원대한 미래 용역’이라고 하면 되었을 것을. 용역 결과를 홍보하는 보도자료 제목도 ‘경남발전 위대한 미래를 여는 남부내륙고속철도 시대’라고 해도 되었을 것을.

 

‘그랜드 비전’이라는 말은 뭔가 멋있어 보이고, ‘위대한 미래, 웅장한 미래, 원대한 미래’라는 말은 없어 보이고 초라해 보이는가. 다르게 물어본다. 우리 경남도내에 사는 320만 도민들은 ‘그랜드 비전’과 ‘위대한 미래’ 가운데 어느 것을 더 잘 알아볼까. 만약 도민들의 교육 수준이 매우 높아서 ‘그랜드 비전’을 훨씬 더 잘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국어기본법을 아는 공무원이라면 애써 ‘위대한 미래’라고 써야 한다. 국어기본법을 몰라도 그래야 한다고 본다. 그게 훌륭한 태도다.

나는 진주에 사는 사람으로서 남부내륙고속철도가 계획대로 잘 만들어지기를 진정 바란다. 이 고속철도 덕분에 경남 서부 지역 사람들도 좀 편리하게 나들이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더 편하고 더 안전하고 더 빠르고 더 쾌적하고 더 값싸게 서울 나들이를 한번 했으면 좋겠다. 그 덕분에 경남 서부 지역 시군들도 좀더 발전하기를 바란다. 모든 부문에서 남 부러울 것 없는 지역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자면 밑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 밑그림은 미술을 하는 사람이 주로 하는 말인데 ‘모양의 대강만을 잡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수예에서도 ‘수본(繡本)으로 쓰려고 종이나 헝겊에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이 밑그림이라는 말은 ‘작품이나 사업의 바탕에 깔려 있는 취지나 계획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곧잘 쓴다. 여기서 말하는 건 바로 이 뜻이다. 내가 보기에 경남도청이 이번에 발표한 용역은 밑그림에 해당하는 것 같다. 밑그림을 잘못 그리면 나중에 완성된 작품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져야 한다.

 

2020. 4. 29.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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