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시가 4월 29일 발표한 보도자료 첫머리다.
“허성무 창원시장은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포스트 코로나19 이후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일자리 창출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창원형 디지털 SOC 뉴딜 프로젝트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포스트 코로나19 이후’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보통 ‘포스트 코로나19’라고 하면 ‘코로나19 사태가 끝난 뒤’를 가리킨다. ‘포스트 모더니즘’ 즉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19 이후’라고 하면 ‘흰 백고무신’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냥 ‘코로나19 이후’라고 하면 좋았겠다. 이건 약과다.
‘창원형 디지털 SOC 뉴딜 포르젝트 가이드라인’은 무슨 말일까. ‘디지털’은 대충 알겠다. ‘SOC’도 알 만하다. ‘뉴딜’도 요즘 한국형 뉴딜 어쩌구 저쩌구들 하니까 안다고 치자. ‘프로젝트’도 하도 들어온 말이라서 모른다고 하기 어렵다. ‘가이드라인’도 안다고 해야겠지. 이 말들의 조합인 ‘디지털 SOC 뉴딜 포르젝트 가이드라인’은 무슨 말일까.
시장의 발표를 들은 시민들은 다 알아들을까.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기자들은 알아들을까. 창원시가 경제 활력 회복을 위해 그럴싸한 멋진 정책을 만들었으면 시민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발표하는 게 맞았다. 발표 내용을 보면 알 만한 것도 있고 통 모르겠는 것도 있는데, 이런 것을 싸잡아 표현하는 제목은 무척 어렵다.
나는 보도자료를 쓰는 사람이다. 보도자료는 내가 속한 기관의 주요 정책, 행사, 장점, 동정 따위를 언론사에 보내는 문서다. 우리 대학교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으니 보도해 달라고 요청하는 공문서다. 국민들은 그 언론 보도를 보고 우리 대학교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정보를 알게 된다.
보도자료는 최대한 쉽게 쓰려고 노력한다. 어려운 용어는 풀어 쓰고 한자나 영어 같은 외국어는 필요한 경우에 괄호 안에 넣는다. 문장도 짧게 써야 이해하기 쉽다. 보도자료는 엄연한 공공언어이기 때문에 어문 규정에 맞춰 써야 한다. 국어기본법을 염두에 둬야 한다. 국민들의 말글살이에 미치는 영향이 무척 크기 때문에 신중하게 작성해야 한다. 하지만 잘 안 된다.
가령 ‘사회 맞춤형 산학협력 선도대학 육성사업’이라는 말이 있다. 대학 바깥에 있는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대학과 연결돼 있는 기업체 들은 잘 알 것이다. 이 말을 보도자료에 쓰자면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이름이 너무 길다. 짧은 영어 약자로 줄인 게 있다. ‘LINC+’(링크플러스)가 그것이다. 처음엔 한글 이름을 적고 괄호 안에 영어 약자를 쓴다. 다음부터는 영어 약자만 쓴다.
대학에서 쓰는 용어는 교육부 등 중앙부서에서 정해준 게 많다. 대학 홍보실 직원이 이 이름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따라간다. 교육부에서 정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대학 내 다른 부서, 이를 테면 행사를 계획하거나 제도를 입안하거나 사업을 추진하는 부서에서 이름을 붙이는 일도 많다.
가령 ‘우리 같이 공부하자~! GNU또래튜터링’이라는 제목을 붙인 공고문이 있다. ‘튜터링’이라는 말에서 눈길이 옮겨가지를 못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요즘 학생들은 다 알아듣는다고 한다. 이 사업을 보도자료에 써서 언론에 알리려고 할 경우, 신문기자는 이 말을 다 알까, 신문 기사를 보는 독자들은 다 알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학생들만 상대로 하는 사업이라서 그런 애매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어떤 행사든, 사업이든, 계획이든, 제도든, 법률이든, 건물이든 맨 처음 이름을 지을 때 잘 지어야 한다.”
맨 처음 이름을 붙일 때 그 이름을 사용할 사람들, 그 이름을 들을 사람들의 처지에서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한자나 영어를 그대로 쓰지 말고 쉬운 한글을 써야 한다. 미국말, 중국말 쓰지 말고 우리말을 써야 한다. 이른바 공공기관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한다. 중앙정부, 지방정부, 공기업, 교육기관, 정부투자기관, 지방정부투자기관, 언론기관 들에서 먼저 앞장서야 한다. 그렇게 이름을 지어 놓으면 두고두고 칭찬 받을 것이다. 왜냐? 그 이름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매우 쉽게 이름을 적고 말하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이름을 지어주면 중간에서 보도자료 쓰고 기사 쓰는 사람들 피곤해진다. 명색 이름이니 ‘고유명사’라고 하여 그대로 써야 할 것인데, 그 말이 너무 어려우면 여러 곳에서 항의를 하게 된다. 이름 지은 사람 따로 있고 꾸지람 듣는 사람 따로 있게 된다.
요즘 이런 저런 신문을 읽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못된 제목들을 하나 하나 들추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신세타령이 나왔다. 나 같은 사람이 다른 기관ㆍ단체에서 쓰는 말을 시비 걸면, “그럼 너희들은 똑바로 잘 하느냐?”라고 하는 반문이 돌아올 듯하다. 미리 자백해 두는 것이다.
2020. 5. 2.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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