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기사 본문이나 제목, 방송 자막에서 영어를 만나는 일은 대부분 불쾌하다.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굳이 영어를 쓰는 게 못마땅하다. 조상 대대로 우리말을 쓰다가 중국 영향권에 놓이자 중국글자말(한자)을 쓰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말과 글을 쓰다가 이제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되니까 영어를 갖다 쓴다. 우리말과 글을 쓰는 게 왜 중요한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지 않는 무신경이 불쾌하다. 말과 글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을 놓치거나 외면하는 꼴이다.
불쾌한 게 대부분인데 아주 간혹 고개를 끄덕일 때도 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는 서양 문물을 우리가 따라가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 때문이다. 서양에서 만든 물건(또는 제도)이 들어왔는데 그 이름까지 따라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다. 우리말로 얼른 바꿔 쓰도록 해야 하는데 이런 일은 늘 더디다. 좀 늦더라도 새로운 우리말 이름을 붙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고개를 끄덕이는 건 좋다거나 옳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어차피 영어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신문 기사나 제목을 보면서 영어 한두 마디 익혀 볼까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니지만. 낯선 영어를 보면서 한 단어 배우고 알던 영어를 보면서 기억을 되살리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신문들이 한자를 마구 섞어 쓸 때 신문에 나오는 한자를 따라 쓰면서 한자 공부를 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코로나19 상황과 관련하여 참 많은 낯선 말을 배운다. ‘코로나’라는 말 자체가 어렵다. 어쨌든 배웠다. ‘드라이브 스루’라는 말도 배웠다. ‘차 탄 채 검사를 받는다’는 말인데 ‘승차 검사’로 바꿔 씀 직하다. ‘드라이브 스루’라는 말은 코로나19 검사 때뿐만 아니라 여러 상황에서 곧잘 썼다. ‘코호트 격리’라는 말도 보았다. 일생에 한두 번 들을까 말까 한두 번 쓸까 말까 한 말이다. ‘동일집단 격리’라는 말이라고 하는데, ‘코로나’나 ‘사스’, ‘메르스’ 같은 감염증이 앞으로도 더러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바, 기억해 둠 직하다고 본다.
가령 이런 말은 어떤가. ‘언택트’. 신문 방송에서는 자주 나온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물건을 사고 파는 거래 현장에서 직접 손과 손, 얼굴과 얼굴을 맞닿지 않고 거래하는 방식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고들 한다.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고 물품을 구매하거나 서비스 따위를 받는 일’이라고 들머리사이트 ‘다음’과 ‘네이버’의 어학사전에 나온다. 영어권 나라에서 쓰는 말 같다.
이게 뭔고 싶어 찾아보니 ‘un-contact’를 줄여서 하는 말이라고 한다. 더 파고들어가 본다. ‘contact’는 ‘접촉’이다. ‘uncontact’는 ‘비접촉’이다. ‘un-’이 부정,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가 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말하는 의미의 ‘비대면, 비접촉’의 뜻을 가진 영어는 ‘uncontact’가 아니라 ‘noncontact’라고 한다. 굳이 설명하자면 ‘uncontact’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이라는 뜻에 가깝다. ‘논컨택트’라고 할 것을 우리는 ‘언컨택트’라고 하는 셈이다.
그건 그렇고. 멀쩡하게 있는 ‘uncontact’ 즉 ‘언컨택트’를 줄여서 ‘언택트’라고 할 건 뭔가. 그러니 영어 좀 안다는 사람(나는 통 모르는 사람이지만)도 헷갈리게 생기지 않았나. 신문 기사나 제목을 보며 영어 공부 좀 하려는 사람이 엉뚱한 길로 가게 생기지 않았나. ‘언택트’를 ‘비접촉’이라는 말의 영어인 줄 알고 외운 사람이 미국이나 영국 가면 바보가 되게 생겨먹지 않았느냐 말이다. ‘논컨택트’라고 해야 할 때 ‘언컨택트’라고 하면 웃기는 일이고 이를 줄여서 ‘언택트’라고 하면 더 웃기는 일이다. 전형적인 ‘콩글리시’다.
얼마나 자주 쓰이는지 검색해 본다.
• 증시 반등..언택트·바이오株 신고가 경신(4.27. 뉴시스)
• [포스트 코로나] 언택트 산업이 열린다(4.27. 매일신문)
• LG유플러스, 가정의 달 ‘언택트’ 응원메시지 캠페인(4.27. 전자신문)
• 참치회도 언택트…동원산업, 쿠팡·주문배달 판매 시작(4.27. 한국경제)
• 언택트 수혜 네이버·카카오 실적 ‘장군멍군’(4.26. 서울경제)
• “가자! 비대면 영업”…보험도 ‘언택트’ 확산(4.27. 한국보험신문)
• 경남도 ‘언택트(untact) 힐링 관광 18선’ 추천(4.27. 국민일보)
• “코로나로 촉발된 언택트 사회, 4차 산업혁명 앞당긴다”(4.28. 한국일보)
경남도청은 4월 27일 ‘드라이브 여행에 이은 ‘언택트 힐링관광 18선’ 추천’이라는 제목으로 보도자료를 냈다. 부제목으로 ‘‘5월 가정의 달’, 사회적 거리 유지하며 자연에서 휴양할 수 있는 힐링 관광지 18선 소개, 접촉 최소화하는 비대면(untact) 여행 확산으로 점진적 관광시장 회복 견인’이라고 썼다. 이 보도자료를 받아서 국민일보는 위에 나온 보기처럼 썼다. 4월 28일자 아침 국제신문은 ‘경남 비대면 관광지 18곳서 힐링하세요’라고 썼다. 국민일보처럼 쓴 곳도 있고 국제신문처럼 쓴 곳도 있다. 어느 쪽이 더 잘한 것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국제신문을 칭찬하려는 건 아니다. 4월 28일자 국제신문에는 ‘백화점ㆍ시장 북적북적 옛말, 언택트 쇼핑 대비해야 한다’라는 제목이 보인다. 그러니까 이 신문은 ‘언택트’라는 말이 잘못된 말이라서, 또는 미국말이라서 쓰지 말자고 작정한 게 아니다. 기자에 따라서, 편집자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같다. ‘비대면, 비접촉’이라는 말도 쉬운 말은 아니다. 그래도 ‘언택트’보다는 백 배는 더 쉽다.
한 가지 덧붙인다. ‘언택트’라는 해괴한 말이 신문사와 방송국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기어다닌다. 바퀴벌레 때려잡듯 파리채로 잡아 없애야 할 그 무엇이다. 신문사, 방송국 사람들이 이 무엇을 때려잡지 않고 먹여살리고 있으니, 이제 일반 사람들도 쓰기 시작한다. 나날살이에서 이 말을 무심코 쓰게 된다. 일반 사람들이 쓰니까 공무원도 보도자료에 쓴다. 그러면 이 말은 유행어가 되었다가 신조어가 되었다가 마침내 사전에 오를지도 모른다. 그런 날이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런 과정을 막을 수 있을까. 어떤 말이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 걸 ‘누군가,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막을 수 있다고 보는 쪽이다. 만약 영향력이 큰 언론사나 정치인이 “언택트라는 말은 잘못된 콩글리시이니 쓰지 맙시다.”라고 주장하고 나선다면 뜻밖에 쉽게 이 말은 사라질 것이다. 나는 그리 믿는다.
2020. 4. 28.
이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