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를 좀 꺾고 싶었다. 아른아른 눈앞에 떠오르는 고사리를 어째볼까 싶던 터였다. 고사리는 당장 어떻게 해먹지는 못하더라도 잘 데쳐서 말려 놓으면 아버지 기일이나 추석에 요긴하게 쓰인다. 아버지 산소 아래 손바닥만한 언덕배기에 고사리가 모른 체하기엔 좀 많고 작정하고 달려들기엔 한심한 정도로 적게 돋아난다. 한번에 많이 모을 수 없으니 주말마다 신경써야 한다. 이맘때부터 5월말까지 주말마다 되도록 달려가는데 열심히 꺾어 모으면 제삿상에 올릴 만큼은 된다.
일요일 아침 꿈자리에서 벗어나니 6시 30분이다. 출근하는 날인 줄 알고 ‘지각’을 떠올렸다. 몸이 뻣뻣해졌다. 그러다가 ‘아차, 일요일이구나!’ 휴~ 한숨을 내쉰다. 뜻뜻한 등짝을 미련없이 털고 일어났다. 옷 입고 차를 몰았다. 아버지 산소까지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조선낫과 호미를 챙겼다. 공기는 쌀쌀하고 쾌청했다. 지퍼를 올리고 장갑을 끼었다. 고사리나 좀 꺾어갈 요량이어서, 아버지 상석에 놓을 소주와 안주는, 오늘은 생략했다.
고사리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였다. 윗부분이 뎅겅뎅겅 잘려나간 고사리들이 가시덤불 사이에, 잡초들 사이에 언듯언듯 보였다. 누군가 먼저 다녀간 게 분명했다. 철 따라 나물 캐러 다니는 아주머니들의 소행은 아니다. 몇 줌 되지도 않을 고사리 꺾으러 이런 데까지 올 분들이 아니다. 짐작되는 바 없지 않았다. 큰형이 토요일 아침에 다녀간 것이 분명했다.
집 나설 때부터 고사리를 머릿속 회로에 입력해 둔 터라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온통 잘려나간 고사리 밑둥만 눈에 들어왔다. 그런 잠시 후 드디어 내 눈에 들어온 게 있으니 그것은 취나물이었다. 취나물은 봄을 대표하는 나물이다. 참나물이라고 불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물 가운데 참된 나물이라는 뜻 아닌가. 취나물이라고도 하고 참취라고도 하는 까닭이다. 머릿속 회로를 고사리에서 취나물로 바꾸자 주변은 취나물 밭으로 변해 버렸다. 신기한 체험이다. 꿩을 포기하자 닭이 나타난 꼴이다.
1시간 남짓 망개덩굴 줄기를 비집고 도토리나무 가지를 의지해 가며 취나물을 뜯었다. 고소한 향기가 상큼하게 번진다. 엄지손가락만한 것에서부터 제법 넓어진 이파리를 뜯어 모았다. 뿌리째 뽑힌 건 다시 심어주었다. 한두 끼니 나물로 먹을 만큼은 된다. 이만하면 됐다. 다음주에 와도 소득을 기대할 수 있겠고 혹시 동생 가족이 찾더라도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을 만큼 남긴 듯하다.
늘어지게 잠만 자도 부족할 일요일 아침의 여유를 고사리와 취나물 생각으로 소비했다. 고사리는 억지로 억지로 너댓 개 꺾었고 취나물은 양손으로 감싸 쥘 만큼 수확했다. 자연이 주는 고귀한 선물을 감사히 받았다. 봄햇살 봄바람 소식 듣고 일찌감치 고개 내밀었다가 나 같은 놈팡이에게 들켜 목이 잘린 나물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기왕지사 이 세상 빛을 보았으니 참기름, 깨소금, 파, 소고기 들과 엉기고 섞여 인간의 뱃속 구경을 한번 하는 것도 가히 나쁘지는 않으리라, 그리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햇살이 골고루 퍼졌고 바람은 잠잠했으며 산새 노랫소리는 청아했다.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세상은 연두가 점령했다. 파릇파릇 되살아나는 나뭇잎들의 교향악이 숲을 물들였다. 영산홍은 발갛고 빨갛고 벌겋고 발가스름한 꽃을 토해냈다. 어쩌면 이렇게 이쁠 수 있을까. 어쩜 이렇게 고울 수 있을까. 나무들은 기나긴 겨울 동안 제 몸속에 무엇을 감추고 있기에 이토록 거룩한 아름다움을 내뿜을 수 있을까. 신기하고 신비롭다. 위대한 자연의 말없는 고함이 들리는 듯하다.
2020. 4. 26.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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