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를 숙였다. 무릎을 꺾었다.
이름을 모르겠는 봄풀 사이에 돌나물이 제법 물이 올랐다. 보름쯤 뒤 돌나물은 꽃을 피워낼 것인지 어느 집 밥반찬으로 고추장을 뒤집어쓴 채 생을 마감할지 궁금하다.
아름드리나무 밑에 어린 느티나무가 아등바등 자라고 있다. 겨우 네다섯 개뿐인 이파리로 햇빛을 받아들여 광합성을 해낼지 사뭇 걱정된다. 뿌리를 어디로 뻗어야 겨우 목숨이라도 부지할지 알기나 할는지….
겨우내 습기를 잃어버린 풀숲엔 낙엽만 바스락거리는데 그 사이사이로 연초록 어리고 여린 나무들이 숨쉬고 있다. 썩어서 썩어서 마침내 거름이 되어버린 아비의 흔적을 자양분 삼아 조금씩 조금씩 커가고 있다.
바위 틈서리에 날려 온 꽃씨가 온힘을 다해 공기 속 온도와 습도를 붙잡았다. 가느다란 햇살과 엷디엷은 바람은 노랑으로 분홍으로 되살아났다. 꽃 이름은 있으되 그 빛깔 이름은 감히 지어 붙여줄 수 없는 신묘와 황홀이 피고 있다.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꺾으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무릎 아래 숙호산은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
길 가에 싹을 틔운 굴밤나무 어린 싹은 초록별이 되어 눈길을 끈다.
순정 무구한 목련 잎은 처참하지만 의연한, 모순을 안고 드러누웠다.
흙 바깥으로 튀어나온 뿌리는 발목 아픈 산꾼의 디딤돌이 된다.
자박자박 걸어왔다가 뚜벅뚜벅 스쳐가는 나그네 콧노래를 들으며 그렇게 나무가 되고 숲이 되어간다. 자연의 일부가 되고 스스로 주인이 된다.
이미 주인인 나무 아래에서 새 주인이 금을 긋고 집을 짓고 명패를 붙이고 향기를 뿜는다.
지금은 비록 작지만 작다고 깔보지 말라 한다. 어쩔 수 없이 아직은 여리고 약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푸른빛이 더해지고 밑동도 굵어져 괄목상대하게 달라질 것이라 외친다.
겉으로는 비록 산꾼의 발받침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내면을 파고들면 숙호산을 움켜쥐고 지구를 떠 받들었음을 누가 알겠는가. 가벼운 산바람에 꽃잎 떨어뜨리고 말지라도 꽃잎 진 자리에 아름찬 열매 맺고 그 열매가 숲을 바꿔나갈지 어찌 모르겠는가.
십년이 지나고 백년이 지나 사람이 나고 죽고 나고 죽는 사이에 숲은 오로지 숲으로만 있을 것이다.
돌나물 옆에 굴밤나무 자라고 그 옆에 느티나무 커가고 그 뒤에 소나무 굵어지고 그 앞에 노란 꽃 분홍 꽃 두루두루 피우며 숲을 가꿔나갈 것이다.
숙호산 걷는 산꾼 무릎 아래엔 길고 긴 세월이 있고 머나 먼 미래가 있고 넓디 넒은 포용이 있고 깊디 깊은 철학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걷는다. 걷고 또 걷는다.
2020. 4. 8.
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