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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과 글을 보는 내 눈

고등보터

by 이우기, yiwoogi 2020. 4. 6.

이 신문 제목에 나오는 '고등보터'는 무슨 말일까. 말을 이렇게 만들어 붙여도 되는 걸까?

 

아침 일찍 출근하여 여러 신문을 넘기다가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기사를 발견했다. 대개 제목을 중심으로 경상대 관련 기사, 다른 대학 관련 기사, 교육부 관련 기사 들을 쭉 훑어가다가 난생 듣도 보도 못한 제목이 눈에 띈 것이다. 신문 이름은 안 밝힌다. 조금만 수고하면 금방 알아낼 수 있으니까.

 

‘고등보터’. 1면 머릿기사 제목 치고는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했다. 고등어, 고등학생, 보트라는 낱말이 동시에 떠올랐다. “‘고등학생부터’ 뭘 하겠다는 건가?”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기사와 붙여 편집한 사진에 눈길이 갔다. 자그마한 보트 위에 올라선 사람들이 저마다 손을 치켜들었다. 투표를 독려하는 캠페인이란다. 무슨 보트 관련 사고가 났는가 하는 생각도 머리를 스쳤다. ‘고등보터’라는 큰 글자 밑에 조그맣게 ‘만18세 유권자’라는 말이 있는데 그건 나중에 눈에 들어왔다.

 

공직선거법이 바뀐 덕분에 ‘만 열여덟 살’ 청년들이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만 열여덟 살 청년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본다면 우리나라가 과연 선진국,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뒤늦은 것이지만, 어쨌든 이번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부터 만 열여덟 살 청년 유권자의 등장은 새로운 선거문화와 정책대결을 가능하게 해줄 것으로 믿는다.

 

만 열여덟 살 청년 유권자를 이 신문은 ‘고등보터’라고 부른다. 난감하다. ‘고등’은 고등학생이라는 말이겠다. 고등어가 아닌 게 다행이다. ‘보터’는 ‘Voter’ 즉, 유권자, 투표자, 선거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고등학생 유권자’라는 말이다. 이 말을 줄여서 ‘고등보터’라고 불렀다. 대단한 말장난이고 엉뚱한 조어법이다.

 

만 열여덟 살인 청년은 모두 고등학생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대부분 고등학생일 테지만 어떤 사정으로 고등학생이 아닌 경우도 제법 있을 것이다. 열여덟 살이면 무조건 고등학생이라고 치고 ‘고등보터’라고 말을 붙인 건 지나친 처사이다. 열여덟 고등학생이면 대부분 3학년일 텐데, 그렇다면 고등학교 3학년이면 모두 유권자인가. 아니다. 태어난 날짜에 따라 선거권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경남지역의 경우 3만 6000여 명, 전국에서는 59만 9000여 명이라고 한다. ‘고등보터’라는 말이 근거도 애매하고 논리도 부정확한 조어라는 걸 알겠다.

 

‘열여덟 유권자’, ‘열여덟 살 유권자’, ‘십팔세 선거권자’라는 식으로 명칭을 붙이는 게 옳다고 본다. ‘유권자’, ‘선거권자’, ‘투표자’라는 말은 서로 이리저리 바꿔 써도 되겠지.

 

이 기사는, ‘고등보터’라는 해괴한 말만 빼면 꽤 괜찮은 내용이다. 이 신문사 기자가 만난 부산지역 18세 유권자들은 어른의 생각과 달리 청년 유권자로서 누구보다 진중한 자세로 한국정치를 대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일부 사안에 대해선 어른들의 의견보다 훨씬 객관적이고 냉철한 식견을 보였다고 했다. 그들의 진가는 결코 선거판의 ‘미미한 변수’로 폄하될 수 없다는 게 이 신문의 논조다. 눈여겨봐 둘 만한 기사라고 본다. 저들이 새로 만든 듯한 ‘고등보터’라는 말만 빼고.

 

2020. 4. 6.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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