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먹고 7시까지 사무실 나오는 게 목표였다. 급한 일들을 10시까지 마치고 돌아가 오전에는 잘 생각이었다. 어떤 끌림이 있었을까. 무심코 텔레비전을 켰다. 평일이었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채널을 이리저리 맞추다가 <미나문방구>라는 영화와 마주쳤다. 시작한 지 10분쯤 된 듯했다.
경기도청 공무원 미나는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마침 여차저차한 일로 두 달 정직을 당한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간 미나는 계림초등학교 교문 앞 문방구를 지킨다. 찾아오는 아이 손님이 귀찮다. 얼른 문방구를 팔아치우고 아버지 빚을 갚고 싶었다.
먼지 쌓인 문방구 안을 돌아본다. 색종이 지우개 연필 크레파스 도화지 아코디언 훌라후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물건들은, 미나에게 어린 시절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해 준다. ‘문방구’집 딸이라고 ‘빵구’라고 놀리던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게 그렇게 싫었다.
미나는 문방구에서 어릴 적 자신을 만나고, 현재의 자신을 만난다. 아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순진하고 착하고 때로는 얄밉다. 이 학교 출신 젊은 남자 선생님이 부임한다. 그는 어릴 적 대표 왕따였다. 선생은 자기 반 아이들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방법을 가르친다.
문방구를 사려는 사람이 나타난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가게 안 가득하던 물건들을 헐값에 팔고 왕세일, 대박세일, 초대박세일로 팔아치운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났다. 마지막 남은 상자 하나를 연다. 아버지가 모아 놓은 자신의 어린 시절 물건들이다. 미나는 주저앉아 운다. 수많은 기억과 추억 속에서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던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죽도록 싫었던 문방구와 아버지가 사실은 오늘날까지 자신을 밀어준 그 무엇이었다는 것을 느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어릴 적 안간국민학교 앞 문방구를 떠올렸다. 우리는 서점이라고 불렀다. 서점집 아들이 부러웠다. 학교 뒤쪽에도 작은 문방구가 있었다. 연필을 사고 칼과 지우개를 샀었다. 공책을 사고 피리를 샀었다. 라면땅을 사고 알사탕을 샀었다. 없는 게 없는 문방구에서, 나도 나중에 학교 앞 문방구를 할까, 이런 생각도 했었다.
국민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땐 왕따라는 말은 없었지만 누구누구끼리 친하고 누구랑 안 놀고, 그러다가 너나없이 섞이고, 학년이 바뀌면 또 이러저리 헤쳐모여하고, 그랬었다. 구구단을 못 외어 청소당번이 되고 하굣길에 두꺼비 잡아먹는 뱀을 혼내주고 그랬었다.
골마루 밑에 기어들어가 아이들이 흘린 각종 학용품을 전리품처럼 주워 나왔다. 구린내 진동하는 변소청소를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청군이 이기든 백군이 이기든 그게 뭐라고 악을 써가며 응원했다. 4학년 때 반장을 맡았던 기억은 두고두고 부끄럽다. 지금도 어떤 단체든 대표 비슷한 걸 하지 않는 이유이다. 6학년 3월에 진주로 전학했다.
그 문방구 이름은 잊었지만 그 안에 가득하던 아름답고 멋진 물건들을 떠올려 보노라니, 내 어릴 적 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꿈도 없이 목표도 없이 그저 앞으로 나란히 하는 웬 중늙은이가 앉아 있다. 자기가 뭘 잘했다고, 뭐가 억울하다고 혼자 훌쩍이고 앉았다. 문방구에서 펼쳐지던 아련한 시절 그림은 색 바래고 찢어져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플라타너스 이파리 떨어지는 가을날 넓은 운동장 한쪽 구석에 앉아 교실건물 높이를 눈대중하던 아이는 세상 구석에 처박혀 오늘인지 내일인지도 모르는 날들을 일기장 넘기듯 넘기고 있다. 일찍 일 마치고 돌아가 쉬려던 목표도 퇴색해 버렸다.
2019. 10. 20.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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