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에서 국도로 1시간 정도 달리면 하동에 닿는다. 하동. 이름이 마음에 든다. “하동”이라고 말할 때 “하”에서 입을 벌리게 된다. 입꼬리를 양옆으로 찢는 것보다 아래위 턱을 마음껏 벌려 발음하는 게 마음에 든다. 하늘, 하루, 하양, 하마, 하품 같은 말이 떠오른다. “동”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도 참 좋다. 동쪽, 동녘, 동그라미, 동네, 동무, 동생 같은 말이 떠오른다. “동”이라는 말끝은 ‘ㅇ’으로 끝나기 때문에 ‘ㄱ’이나 ‘ㅂ’으로 끝나는 말과 달리 여운이 길다. “하동”이라는 말을 되풀이해서 발음해 보면 꼭 노래 같다. 저절로 곡이 붙는다.
하동(河東)이라는 이름은 중국에 있는 어느 지명에서 빌려왔을 것 같다. 삼국시대에는 신라 땅이었고, 이곳에 한다사군(韓多沙郡)이 있었다는데 삼국통일 후 757년 하동군으로 동네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 것을 기록으로 남긴 선조들도 대단하고 그 기록을 찾아내어 동네 이름의 역사를 꿰맞춰내는 역사가 실력도 대단하다. 아무튼 ‘하동’이라는 이름이 슬며시 내게 다가왔다.
하동을 처음 간 것은 대학 1학년 때이다. 남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녀공학인 대학의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58명 동기 가운데 남학생은 7명이고 여학생은 51명이다. 3월 말이었던가 4월 초였던가. 우리는 하동 송림 백사장에 소풍을 갔다. 조별로 중앙시장을 찾아가 갖가지 반찬거리를 샀다. 촌놈으로 자라온 나에게 그런 기억은 어쩌면 추억으로, 어쩌면 충격으로 남았다. ‘카레’라는 것을 처음 맛본 날도 그날이다.
하동에 사는 지인이 있어 가끔씩 갔다. 진주청년문학회를 하던 때 하동 사는 형의 모친이 돌아가셔서 조문 간 적 있다. 횡천에 사는 형의 집에도 조문을 갔다. 그때는 남의 차를 얻어 타고 가던 것이라 길도 잘 모르고 동네 이름도 잘 기억할 수 없었다. 1998년 가을 내 차를 타고 남해고속도로 하동 나들목에서부터 구례 화엄사까지 달려본 적이 있다. 신혼 때다. 그때 보던 섬진강과 갈대와 모래사장은 잊히지 않는다. 구불구불한 길은 정겨웠다. 지금 스무 살이 된 아들이 두세 살 때 어느 가을날 온가족이 하동으로 나들이 갔다. 칠불사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환장할 정도로 빛나던 노란 은행잎이 뇌리에 뚜렷이 각인됐다. ‘하동’이라는 땅이름을 예쁘고 사랑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사연이라면 사연이다.
2018년과 2019년 두 해 동안 하동을 열 번 넘게 갔다. 처음에는 진주에서 출발하여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까지 갔다가 곧장 돌아왔다. 최참판댁에서 열리는 극단 큰들의 마당극 <최참판댁 경사 났네>를 보러 갔다 왔다 했다. 가는 데 1시간 10분, 오는 데 1시간 10분 걸렸다. 혼자 갈 때도 있었고 아내와 갈 때도 있었고 다른 친구들과 갈 때도 있었다. 가는 길과 오는 길은 같으면서도 달랐다. 갈 때는 마당극을 본다는 설렘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돌아올 때는 찍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다시 보면서 감상문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지루한 줄 몰랐다.
2018년 8월 15일 그 무덥던 날 처음 한산사 앞 전망대에서 무딤이들을 내려다 보았다.
2018년 8월 15일 한산사에 처음 올라갔다. 한산사라는 절 이름은 진작에 알았다. 평사리 상평마을 들머리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절이 있는데 길 입구에 한산사라는 이정표가 보이기 때문이다. 8월 초였던가. 신문에서 평사리 너른 들판 사진을 보았다. 초록색 나락이 좍 깔려 있는 가운데 검은색으로 무슨 글씨를 써 놓았다. 물감을 물들인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일반 벼와 검은색 벼를 이용하여 글씨를 새긴 것이라고 한다. 궁금증이 발동했다. 그 전까지 무심코 갔다 왔다 하던 악양면 평사리 넓은 들을 보고 싶어졌다.
최참판댁 근처 문학관에 근무하는 하아무 형에게 물었다. 그 들판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한산사라는 이름을 들었다. 그렇게 하여 8월 15일 한산사에 처음 올라간 것이다. 그 무덥던 날, 극단 큰들은 바람 한 점 없는 최참판댁 안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마당극을 공연했다. 그 무덥던 날인데도 관객은 제법 모여들어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다행이었다. 나는 손수건을 물에 적신 채 한산사로 올라갔다. 절 앞 전망대에서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판을 내려다본 순간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헛~!’ 하는 소리는 더위 먹은 소리인지 감탄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36.5도의 땡볕이 내려쪼이는데도 나는 한참 동안 서서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들판을 보는데 눈은 섬진강으로 향했다. 섬진강을 보는데 눈은 구재봉으로 향했다. 구재봉을 보는데 눈은 하늘의 구름으로 향했다. 구름을 보는데 눈은 상평마을 쪽으로 돌아갔다. 선풍기 날개 회전하듯, 시계추 왔다 갔다 하듯 내 눈은 상하좌우를 일별하고 이별하고 삼별했다. 그러잖아도 마음에 쏙 들어온 하동이라는 동네를 더 깊이, 더 많이 사랑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2019년 3월 9일 활짝핀 매화의 호위를 받고 있는 부부송에게서 사랑과 우정을 느꼈다.
2019년 3월 9일 마당극 <최참판댁 경사 났네>를 보기 위해 평사리를 찾았다. 때는 얼어붙었던 땅이 완전히 녹을 때요, 매화가 만개할 때요, 바람이 조금씩 포근해질 때이다. 나는 최참판댁 들머리에 있는 동정호과 악양루부터 찾았다. 먼발치에서만 보던 부부송도 가까이 가 보았다. 만개한 매화에 둘러싸인 부부송에게서 높은 기품과 깊은 사색의 운치를 느꼈다. 봄기운이 물씬물씬 묻어나는 악양들, 무딤이들에 서서 한참 동안 현기증을 느꼈다.
무딤이들을 소개해 놓은 팻말을 만났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협곡을 헤쳐 흐르던 섬진강이 들판을 만들어 사람을 부르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촌락을 이루고 문화를 만들어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가 이곳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그 기둥을 세운 이유 3가지 중의 첫 번째가 이곳 평사리들이다. 만석지기 두엇은 능히 낼 만한 이 넉넉한 들판이 있어 3대에 걸친 만석지기 사대부 집안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모태가 되었다. 생전 박경리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로 세 가지를 얘기하셨는데 그중 하나가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였다. 그렇듯 이 넉넉한 들판은 모든 생명을 거두고 자신이 키워낸 쌀과 보리로 뭇 생명들의 끈을 이어준다. 섬진강 오백 리 물길 중 가장 너른 들을 자랑하는 평사리들(무딤이들)은 83만여 평에 달한다.”
그날 마당극 감상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매화도 찍고 자두꽃도 찍고 동백도 찍고 생강나무꽃도 찍고 목련꽃도 찍고 새순 돋아나는 나무도 찍고 하늘도 찍고 들판도 찍고 산도 찍었다. 따뜻한 햇살 받으며 평사리 상평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하동이 만들어준 느림의 미학을 느끼며 하늘이 내려준 포근함의 미학을 즐기며 큰들이 초대해준 감동의 순간을 기다리며 주말 낮 시간을 오로지 나를 위해 소비하였다. 잡념은 머리를 흔들었고 집념은 입맛을 떨어지게 했지만, 그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는 만큼 시간은 나의 편이었다.”
2019년 5월 28일 모심기를 위해 못자리를 해놓은 무딤이들
5월 28일 다시 무딤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한산사보다 더 높은 고소산성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모습일까. 그 너른 들판과 강과 산과 하늘은 어떻게 어울릴까 궁금했던 것이다. 이날은 사실 사무실 출근하여 밀린 일을 하기로 했던 날이다. 사무실에서 하동으로 가려고 마음먹을 때 나는 이렇게 썼다. 조급증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아침 7시 30분에 사무실 나가서 급한 원고 정리하고 보도자료 보내고 나니 8시 30분이다. 앉아 있노라면, 일이야 섬진강가 모래알만큼이나 많겠지만 굳이 일요일까지 나가서 청승을 떨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부지런히 가면 9시 30분쯤 최참판댁 주차장에 도착하고, 잘하면 고소성을 지나 형제봉까지 한 바퀴 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동을 걸었다. 하동읍내 편의점에서 ‘지리산 하동 녹차’ 한 병과 꼬마 소시지 다섯 개를 샀다.”
상평마을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5월말인데도 날씨는 무척 더웠다. 땡볕이 내려 쪼이는 비탈길을 혼자 부지런히 걸었다. 한산사까지 올라가는 데 시간은 20분 정도밖에 안 걸렸지만 그날 내가 써야 할 에너지의 3분의 2는 소비한 것 같았다. 그 대목은 이러하다.
“주차장에서 한산사(寒山寺)까지는 그늘이 거의 없는 땡볕이다. 온나라 곳곳에 폭염특보가 발효될 것이라고 했는데 오전 10시 즈음엔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한산사로 오르는 길 양 옆에는 잘 여문 매실이 반갑게 인사했다. 지난 봄 매화향으로 나를 어지럽게 하던 길이다. 덩달아 밤꽃도 제철을 만났다. 가을엔 벌어진 밤송이와 길바닥에 떨어진 알밤을 제법 보게 생겼다. 잘 포장된 길은 열기를 내뿜었다. 자동차로 오고갈 때는 몰랐는데 굉장한 비탈이다. 장딴지가 단단해지고 허벅지가 퍽퍽했다. 금세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흐르고 등허리에도 끈적거림이 느껴졌다.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열심히 지저귀는 새들이 없었더라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고소산성에 올라가는 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기어 올라간 고소산성은, 과연 그 이름값을 하였다. 산성 자체도 볼 만했지만 거기서 내려다본 하등 들녘은 가히 장관이었다. 쓰고 싶은 낱말을 이미 여러 곳에다 써버린 터여서 나는 겨우 몇 마디로 감동을 적었다. 들판은 모내기 준비로 한창이었다. 들판에 가득한 물은 거울이 되어 하늘을 되받고 산을 되받았다. 여차하면 내 얼굴도 비칠 듯했다.
“성돌 위에 앉아 평사리 들녘을 내려다보고, 섬진강을 굽어보고, 강 건너 광양면 다압마을을 건너다보았다. 이렇게 평화롭고 이렇게 묵직한 전경을 본 적 있었던가. 내리쬐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안으며 흙을 부풀리고 물을 에둘리며 식물과 동물을 키워 마침내 인간이 살도록 한 너른 품을 내려다보았다. 거지가 들어와도 굶어 죽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너른 평사리 들녘(무딤이들)을 고마운 마음으로 보고 또 보았다. 하동이라는 이름과 악양이라는 이름과 고소성이라는 이름의 연관성을 어림짐작해 보았다. 섬진강이라는 이름이 나온 전설도 기억해 보았다. 지금까지 본 섬진강 가운데 가장 멋지고 가장 길고 가장 작은 강을 나는 고소성에서 보았다. 지금까지 본 악양 들판 가운데 가장 작고 가장 넓은 들판을 나는 고소성 위 소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2019년 9월 16일 추석 연휴 마지막날 다시 찾아간 무딤이들. 벌써 노릇노릇한 기운이 감돈다. 자연은 어김이 없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던 9월 16일 다시 한산사로 올라가 들판을 보았다. 구름은 멋졌고 섬진강은 조금 말랐으며 들판은 초록과 노랑을 조금씩 섞어가고 있었다. 구름 아래 엎드린 구재봉은 시커멨다. 아직은 더위가 한창인 때라 그늘 아래 산과 들판이 부러웠다. 어머니와 친구 두 분을 모시고 간 날이다. 나이 지긋한 분들은 잠시 동안 들판을 내려다보고는 절로 향했다.
나는 “너른 악양 들판과 섬진강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 들판에는 ‘2022년 하동 야생차 세계 엑스포 유치’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너른 들판을 바라보며 안간에서 남 땅에 농사짓던 젊을 적을 떠올려 보거나 섬진강 바라보며 재첩 잡는 사람들 삶을 짐작해 보기를 바랐다. 그건 오산이었다. 어른들은 들판과 강은 대충 보고 한산사 절에 가고 싶어 했다.”라고 썼다.
이날은 하동이라는 동네에 대한 감상도 좀 썼다. “하동이라는 동네는 참 신기하다. 우리나라 현대문학 최고봉인 소설 《토지》의 배경을 소설속 내용과 흡사하게 꾸며놓은 것이 신기하다. 그 동네, 즉 최참판댁이 있는 악양면 평사리를 아기자기 오밀조밀 배치하여 밥집과 기념품 가게들이 지루하지 않게 들어서 있는 것도 신기하다. 천연 재료로 염색한 목도리, 옷, 모자, 손수건, 가방 들이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노라면 그 어느 명승지 못지않은 흐뭇함이 배어난다. 고소산성에 올라보면 너른 악양 들판과 섬진강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어떤 이는 숨 막힌다 하고 어떤 이는 숨이 탁 트인다고 한다. 이율배반이 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고 할까. 동정호와 악양루는 중국 어디에 있는 것을 베껴온 것이겠지만, 악양 들판의 넓이와 깊이에 질식할 듯한 사람은 잠시 숨고르기를 할 수 있겠다. 부부송 두 나무는 멀리서 보든 가까이에서 보든 그냥 그 자체로 기념품이다. 관객이 눈에 간직하고 가슴에 간직하고 사진에 간직하는 기념품이다. 부부가 보든 연인이 보든 가족이 보든, 두말없이 지난날과 지날 날을 생각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하동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벚꽃이 찬란하고 배가 향긋하며 꽃게탕이 얼큰하다. 녹차는 깊고 매실은 달고 대봉감은 크다. 재첩은 새첩다. 이런 갖가지 것들이 서로 얽히고 섞이고 배려하고 부추기며 느릿느릿 울긋불긋 알록달록 향기를 뿜는다. 그런 동네에서 우리네 전통 연희 양식인 마당극 한 편을 보노라면 오감(五感)이 열리고 삼대가 함께 웃고 백이면 백, 천이면 천이 모두 감동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돼 있다. 가 보면 안다.”
2019년 10월 13일 한산사에서 내려다본 무딤이들. 들과 강과 산과 하늘이 이토록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줄이야.
그리고 10월 13일 한산사 앞 전망대에 섰다. 9월 16일에서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벼 베기를 마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 다 맞았다. 들판은 누렇게 변해 있었고 군데군데 추수를 마친 흔적이 보였다. 허수아비 축제를 한 뒤끝인데도 아직 들판에서 할 일이 남은 허새비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섬진강은 여전히 말없이 흐르고 구재봉은 여전히 말없이 앉았고 동정호도, 악양루도 변함이 없이 그대로다.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은 동안 무슨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무리이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변하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늘 신기하고 반갑기만 하다.
나는 “마당극을 보는 게 제1의 목표라면 이 들판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제2의 목표”였는데 함께 간 일행은 “가로세로 반듯하게 구획을 그어 놓은 논보다는 구불구불하고 삐뚤빼둘하던 예전의 악양들이 더 좋았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손대지 않은 원래 그대로의 자연의 미가 더 귀하고 그리운 시절이다.”라는 말도 하게 된다.
10월 26일이나 27일 다시 하동을 찾으면, 다시 악양 들판을 만나면 어떻게 변해 있을까. 오뉴월 하루 땡볕에도 풀들의 키가 한 뼘이나 자라듯, 가을 하루 햇살에도 나뭇잎은 갈색으로 갈아입고 들판은 여름옷을 훌훌 벗어던져 버리지나 않았을까. 부지런한 하동 사람들이 서둘러 추수를 해버리고 나면 들판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창고에 쌀자루 쌓인 만큼 들판에는 허허로움과 헛헛함이 남지나 않을까. 그곳엔 숱한 사람들의 발자국과 많은 연인들의 애정과 조선팔도 관광객의 웃음소리만 낭자하게 흘러 있지 않을까. 찬바람 맞을 준비를 하는 부부송은, 외로움도 둘이라서 익숙하다는 듯 그렇게 서 있지 않을까. 피아골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섬진강에 적셔져 악양 들판을 휘돌아나가려 할 때 어디쯤에선가부터 살얼음도 살살 얼지 않을까.
하동으로 가는 첫 번째 목표는 극단 큰들의 마당극을 보는 것이고 두 번째 목표는 무딤이들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극단 큰들이 상설마당극 공연을 끝내버린 11월이나 12월, 혹은 1월에는 무딤이들에 부는 겨울바람을 위로하러 가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땐 목표가 하나라서 오히려 내가 외로워지면 어쩌지. 알 수 없지. 하루 종일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부부송이 내 귀에다 대고 “하동, 하동~ㅎ ㅏ ㄷ ㅗ ㅇ~”이라고 노래라도 불러줄지.
2019. 10. 14.
시윤
* 2018년 8월부터 2019년 10월까지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열린 극단 큰들의 마당극을 본 뒤 감상문을 여러 차례 썼습니다. 이 글은 그 감상문 가운데 무딤이들(평사리 들판)과 관련한 부분을 가려 모은 것입니다.(주로 따옴표 안) 이 글을 쓰면서 새롭게 지어 넣은 부분도 제법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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