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연극을 한 편 보았다. ‘우연한 기회’란, 애써 찾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보아도 그만 보지 않아도 그만이었다는 말이다. 연극은 대학 시절 <고도를 기다리며>를 경상대학교 의과대학 작은 강의실에서 본 것 말고는 그다지 기억에 없다. 이번에 본 연극을 30여 년 만에 처음 본 연극이라고 해도 된다. 제목은 <고추장수 서일록씨의 잔혹한 하룻밤>이다.
전문예술법인 극단현장이 8월 22일 오후 2시와 23일 오후 7시 30분 산청군 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무대에 올렸다. ‘2019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 창작공연’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산청군에서 이 작품 제작과 상연에 도움을 주었다고 보고, 덕분에 관람료가 1000원이 되었다는 것 정도로 이해한다.
산청군청 누리집에 올려놓은 보도자료(2019.4.9.)를 보니 이렇게 설명한다.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은 공연예술단체와 공연장 간 상생협력을 통해 공연장의 운영 활성화를 도모하는 사업이다. 공연단체의 예술적 창작역량 강화와 우수 작품 제작ㆍ발표를 촉진하며, 지역주민의 문화향유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추진한다. 경남도, (재)경남문화예술진흥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한다. 이번 공모사업에 선정된 극단현장은 지난 2016~2017년 2년 연속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 운영 부문 최우상을 수상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산청문화예술회관은 극단현장과 상호 협력해 올 한해 활발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펼칠 계획이다.”
처음엔 혼자 가려고 전화 예약을 했다가 아내와 둘이 가게 됐다. 23일 5시 일 마치자마자 집에 가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길을 나섰다. 공연 안내 포스터를 보고 대강 어떤 내용일지 감은 잡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가 어떤 배우의 연기에 의하여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했다.
산청군 문화예술회관은 참 좋은 곳에 있었다. 마침 해가 질 시간이어서 아름다운 석양이 우리를 반겼다. 공연 보러 온 극단 큰들 배우들과 잠시 노닥거렸다. 미리 좋은 자리를 잡았다. 공연장 입장 전에 고능석 대표와 손을 잡았다. 이마가 나보다 훨씬 넓어서 무척 다정한 대표님이다.
극단현장 누리집에는 이 작품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해 놨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착안하여 귀농 귀촌인들과 다문화 가정이 많은 산청군의 지역적 특성을 감안하여 창작한 작품으로, 토착민과 이방인과의 갈등을 해학적으로 표현하여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벼운 물음을 던지고자 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토착민과 이방인과의 갈등’이 이야기 소재다.
극단현장 누리집에 올려놓은 줄거리를 그대로 옮겨 본다. 연극을 딱 한 번 보고 이야기 전개를 정갈하게 정리할 만큼 재주는 없으니...
“가상의 마을 뱅이술 마을에 서일록이 들어와서 살려고 했으나 마을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텃세가 매우 심했다. 농사를 지으려 해도 땅을 주는 사람이 없었고 장사를 하려 해도 그의 물건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서일록은 할 수 없이 배곯아 가면서 모은 돈으로 대부업을 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를 돈벌레라고 손가락질 한다.
한편 부모님이 물려주신 선산까지 다 털어먹은 뱅이술 마을의 한량 박산이는 배꽃마을 부잣집 딸내미랑 결혼하기 위한 예물을 마련할 요량으로 거상인 친구 안돈희에게 돈을 빌리러 간다. 마침 세계 도처에 재산이 분산되어 있어 현금이 없었던 안돈희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서일록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한다.
평소 자신을 업신여겼던 안돈희에게 앙금이 깊었던 서일록은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살을 한 근 내 놓으라고 요구하는데......”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빌려 왔는데 한국적 정서에 맞게, 이방인과 토착민이라는 구조에 걸맞게 잘 풀어 나간다. 마을 이름의 유래에서부터 갈등이 전개되는 부분도 잘 넘어간다. 돈을 빌려준 뒤 갚지 않자 재판을 걸고 재판정에서 살 한 근을 내놓으라고 하는 부분, 그것을 솔로몬의 지혜처럼 판결하는 포소녀(판관 포청천의 손녀?)의 등장까지 이야기는 매끄럽게 이어진다.
이야기가 모난 데 없이 부드럽게 이어지게 하는 존재는 주모이다. 주모는 처음 등장하여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고 중간 중간 관객과 대화도 하고 마지막에 묵직한 주제를 던지는 화자이다. 주모를 중심으로 서일록과 그의 딸, 동네 청년들 들이 들락날락하며 이야기에 살을 붙이기도 하고 이야기에 마디를 지어놓기도 한다. 건너뛰어야 할 때는 슬쩍 건너뛰기도 한다. 하나 하나 장면을 설명하지는 못하겠다.
무대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뉜다. ‘둘로 나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은유한다. 좌와 우, 이방인과 토착인, 농촌과 도시, 금수저와 흙수저 등등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이 둘로 나뉘기 쉽다는 것을 은연중 보여주는 듯하다. 아닐 수도 있다. 왼쪽은 주모와 서일록이 차지한다. 오른쪽은 노영조, 안돈희, 박산이 같은 마을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한다. 서일록은 왼쪽에서 주모와의 대화를 통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데, 오른쪽 마을사람들 쪽으로 자주 왔다 갔다 한다. 재판정에 갔다가 주막으로 돌아오고 다시 재판정에 가기를 반복한다. 우리 사회가 좌우로 나뉘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장벽을 넘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의도하였든 아니든.
배우들의 대사가 무척 많다. 잠시라도 딴 짓을 하면 따발총처럼 쏟아내는 대사를 따라가기 힘들다. 대사가 많은 것은 어렵다는 말과는 다르다. 대사는 한국의 현대 농촌 사람들이 흔히 주고받음 직한 말들로 가득하다. 피식 웃음을 나오게 하기도 하고 헛웃음을 터뜨리게 하기도 하고 박장대소를 부르기도 하며 간혹 어금니를 지그시 누르게 하기도 한다. 대사 속에 주제가 있고 웃음이 있고 질문이 있고 해답이 있다. 귀를 쫑긋 세워야 할 까닭이다.
재미있는 것은 따로 있다. 어떤 이야기가 있다. 서일록은 그 이야기를 ‘이렇게 이렇게’ 들었다. 주모는 같은 이야기를 ‘저렇게 저렇게’ 들었다. ‘이렇게’와 ‘저렇게’의 차이는 크지 않아 보인다. 크지 않은 차이로 시작된 오해는 점점 커지게 된다. 이러한 점을 <잔혹한 하룻밤>에서는 몇 번씩 보여준다. 마을사람들이 수군대는 이야기를 몇 가지 다른 ‘버전’으로 들려준다. 관객들은 자기도 모르게 ‘아, 오해란 그래서 생기는구나!’라고 깨달을 것이다. 소문을 진실로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하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까지 깨달으면 더 좋겠지.
연극은 좀 답답하게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답답한 이야기를 갑갑한 의자에 앉아서 1시간 동안 봐야 하는 불편함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아마도 <고도를 기다리며> 때문일 것이다. <잔혹한 하룻밤>은 답답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단순하고 가벼웠다. 곳곳에 웃음요소를 지뢰처럼 묻어두었다. 그게 언제 터질지 기다리는 아슬아슬함과 막상 터졌을 때 폭발력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커서 재미있다. 웃음요소들은 배우들의 대사와 표정, 몸짓연기 들을 통해 드러나는데, 그런 장면들만 모아보면 연극이 아니라 한 편의 코미디처럼 보일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진지한 연극적 요소와 희극적 요소가 적절하게 잘 비벼진 맛있는 비빔밥 또는 얼큰한 짬뽕 같았다고나 할까. 연극에 대한 편견, 선입견을 많이 해소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양극화’라는 칼에 의하여 둘로 나뉘어 있다. 그중 <잔혹한 하룻밤>은 극단현장이 기획의도에서 밝혔듯 ‘토착민과 이방인과의 갈등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를 통하여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벼운 물음’을 던지고 있다. 작품에서는 서일록과 마을사람들 간에 화해할지 아니할지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물음’을 던질 뿐이다. 연극은 가볍고 재미있게 진행됐지만 질문은 무겁고 엄중하다.
극단현장은 ‘가벼운 물음’이라고 했지만 가볍지 않다. 무겁다. 대답은 관객 각자가 스스로 내놔야 한다. 관객들의 대답을 긁어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가 귀농ㆍ귀촌 문제 또는 다문화가정과 관련한 정책을 입안하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극단현장이 나라를 바꿀 수도 있는 화두를 던진 것이다.
연극 제목에 나오는 ‘고추장수 서일록씨’에서 서일록 씨의 별명 또는 직업이 왜 ‘고추장수’일까. 줄거리에 따르자면 ‘대부업’, ‘고리대금업자’인데 말이다. 눈치 빠른 관객들이야 벌써 손뼉을 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혹시 기회가 오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길 권한다. 무슨 대단한 반전이 기다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의 궁금증 하나쯤은 갖고 가는 게 바람직한 관객의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잘 몰랐다. 극단현장이 1974년에 창단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극단인 줄. 극단현장이 운영하는 현장아트홀에 이런저런 일로 몇 번 놀러간 적도 있는데 정작 극단현장에 대해서는 깊이 알 기회가 없었다. 대표가 고능석 씨이고 상근단원이 10명이며 회원이 43명이라는 것을 누리집에서 보고 알았다. 극단현장은 전국 극단 가운데 가장 먼저 사단법인으로 등록한 전문예술단체라고 하고, 2008년 경상남도로부터 전문예술법인으로 지정받았다고 한다. 지속적인 창작활동을 하고, ‘놀이하는 이모네’의 연극놀이 교육도 하며, 지역문화축제를 기획하고 참여하는 줄 이제 조금 알았다. 앞으로 더 알아나가게 되겠지.
2019. 8. 27.
시윤
*공연 장면 사진은 산청군청 공식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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