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에서 캔디카메라 앱으로 스스로 찍었다. 좌우가 뒤집혔다.
산청군 금서면에 있는 왕산(해발 932m)을 올라가 보고 싶어졌다. 몇 해 전 학생들과 올라간 적 있는데 그 사이 길도 까먹었고 전경도 잊어버렸다. 왕산 옆 필봉(848m)도 가고 싶었다. 그러니까 왕산과 필봉을 한번에 둘러보고 싶은 심정이다. 왜일까. 산청군 금서면 동의보감촌에서 열리는 극단 큰들의 마당극을 수십 번 보면서 늘상 올려다보던 산이 왕산이고 필봉이기 때문이다. 왕산 꼭대기와 필봉 꼭대기에서 동의보감촌을 내려다보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기억에서는 사라져 버렸지만 몇 해 전에 본 것과 얼마나 다른지도 견줘보고 싶어진 것이다.
작전은 간단했다. 동의보감촌에서 마당극이 열리는 날을 택한다. 마당극은 오후 2시에 시작하므로 시간을 역으로 계산하면 된다. 1시쯤에는 점심식사를 마쳐야 한다. 그러자면 12시까지 하산하여야 한다. 그러자면 10시 30분 쯤에는 정상에 서야 한다. 그걸 성공하자면 구형왕릉 앞 등산로 입구에 8시 30분까지는 도착해야 한다. 집에서 7시에 일어나 7시 30분에 출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6월 2일 일요일 아침 6시도 되지 않아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나. 없었다. 전날 본가에서 어머니 모시고 큰형님과 한잔하긴 했지만 이럴 정도는 아니다. 아버지 산소 옆 대밭에 죽순 꺾으러 갔다가 허탕치고 점심 때 맞춰 마당극 열리는 동의보감촌 다녀온 것 말고는 달리 힘든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게으름을 피우고 싶던 것이다. 누구와 함께 가기로 한 약속도 없고, 가지 않는다고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아니고, 간다고 하여 칭찬 들을 일도 없다. 그런데도 혼자 갈까 말까 망설이는 시간이 제법 길었다.
7시쯤 벌떡 일어나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부산을 떨었다. 밥을 안치고 국을 끓였다. 자는 아들은 내버려두고 출장 간 아내에겐 문자를 보냈다. 모자 챙기고 안경 찾아 끼었다. 등산 양말 신고 등산화 신었다. 등에 맨 가방엔 초코파이 두 개와 쌀과자 두 개를 넣었다. 냉장고에 있던 시원한 물병 하나도 챙겼다.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왕산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속으로 외쳤다. ‘왕산아, 그동안 잘 있었느냐? 우리 몇 년 만이냐?’ 질문도 던졌다. 필봉은 자신이 없다. 왕산에 올라가서 시간을 확인해 보고 필봉까지 갈지 말지 판단해야 했다. 무엇보다 올라가는 입구와 내려오는 출구가 다르게 되면 끌고 간 자동차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자동차 짐칸에 지팡이가 있는지 확인하고 시동을 걸었다. 이 지팡이는 벌써 칠팔 년 전에 석갑산 모퉁이 어디에서 주운 것이다. 누가 쓰다가 버리고 간 것이 용케 내 눈에 띄었다. 석갑산, 숙호산 같은 뒷동산 오르내리면서 지팡이 들고 다니면 남 우세스러울까 봐 그동안 짐칸에 고이 모셔둔 나무토막이다. 딴 사람들은 ‘스틱’이란 물건을 들고 다니지만 나에겐 그냥 나무토막 지팡이가 훨씬 낫다.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좀 이른 시간인데도 차들은 많았다. 서로 앞다퉈 먼저 가려고 기를 쓴다. 뭐가 그리 바쁜지. 뭐가 그리 급한지. 나 또한 속도경쟁에서는 잘 뒤지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지만, 이날만큼은 내버려두었다. 오후 2시 마당극 공연 시간에 맞춰 동의보감촌에 돌아오는 것으로 정해놓고 올라가다가 늦으면 그냥 돌아서 내려오면 된다. 올라가다 허벅지, 장딴지 아프면 ‘에헤라디야’ 하면서 내려와 버리면 그만이다. 고지가 바로 눈앞이라도 힘들면 미련없이 돌아설 수 있다. 그러니 바쁠 것도 없고 급할 것도 없고 누구와 경쟁할 것 아무것도 없다. 말 그대로 빈둥거리며 느릿느릿 올랐다가 내 맘대로 내려오면 끝이다. 이런 등산이야말로 최고의 ‘치유’ 아닐까.
왕산, 필봉 등산로는 모두 6가지다. 체력에 따라, 시간에 따라 코스를 정하면 된다. 나는 2번 코스를 택했다.
오전 8시 50분 구형왕릉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검은색 고급 승용차 2대가 먼저 얌전히 주차돼 있다. 등산로 안내도가 있다. 1코스부터 6코스까지 있다. 가장 짧은 3코스와 6코스는 1시간 30분 거리고 나머지는 2시간, 2시간 30분씩이다. 나는 2시간 걸린다는 2코스로 오를 예정이다. 류의태 약수터를 지나 평전샘을 거쳐 왕산 정상에 오른 뒤 망바위와 망경대를 거쳐 출발지점으로 돌아올 계획이다. 이전에는 잘 몰랐는데 ‘동의보감둘레길’도 있고 ‘지리산둘레길’도 근처에 있다. 다음에 둘러보기로 하고 일단 신발끈을 다시 조인다.
구형왕릉 앞에서 왕산 정상까지는 4.8 km이다. 멀고 높다. 그래서 한 걸음부터 떼고 나면 금방이다.
본격 등산은 시작도 안했는데 산청 왕산을 설명하는 표지판이 보인다. 잠시 읽어본다. “산청 방장산(지리산) 중 왕산은 장대한 지리산맥의 동북쪽 끝으로 가락국 시조 대왕 김수로의 태왕궁지(太王宮趾)이다. 서기 612년 김수로대왕은 첫째 왕자인 거등(居登)에게 나라를 양위하고, 가락지품천 방장산 자락에 별궁을 짓고 태후와 함께 이거하여 왕의 호를 보주황태왕(普州皇太王), 왕후를 보주황태후(普州皇太后)로, 궁은 태왕궁(太王宮)으로, 산은 태왕산(太王山)으로 명명하셨다. 대왕께서는 태왕원군으로 38년간 계시다가 기묘년 3월 23일 서거하셨다. 330여 년이 흐른 후, 서기 532년 가락국 마지막 10대 양왕(구형왕)께서 시조대왕의 태왕산으로 들어오셨다. 가락지품천 태왕산은 구형왕(仇衡王)께서 이거한 당시에도 수정같이 맑은 물이 샘솟고 있어, 궁궐의 이름을 ‘수정궁(水晶宮)’으로 편액하고 수년간 은거하다가 붕어하시니 존호를 양(讓)이라 하였다.(생략)” 어려운 말이 보인다.
“훗날 김유신 대장군은 이곳에 사당을 지어 7년 동안 시능을 하였으며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하여 삼국통일의 바탕을 이루는 호연지기의 기상을 닦았다”고도 한다. 그래서 근처에 김유신 장군 시사대, 김유신 장군 시능터, 김유신 장군 사대비가 있다.
류의태 약수터는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약수터 안내 표지판도 보인다. 이 또한 읽어본다. “류의태 약수터에 얽힌 전설이나 설화로는 류의태 자신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의 난치병을 ‘千蚓水’(萬蚓水라고도 함)를 마셔 고쳤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신의 류의태의 가르침 속에 무릇 물에는 서른세 가지 종류가 있고 그 약효가 달라 의원은 약효를 내는데 물을 가려 써야 한다며 물 중에 정화수(井華水)에 이어 두 번째로 치는 여름에 차고 겨울에 온(溫)한 ‘한천수(寒天水)’로 감히 장복하면 반위(反胃: 胃癌)를 다스린다는 물로 왕산의 약수가 이에 해당한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눈이 내린 한겨울에도 왕산의 약수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맛이 참으로 좋은 것을 느낄 수 있다.(생략)”
여기까지 읽다가 숨을 돌렸다. 무슨 말이야?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동네 물이 좋다는 뜻이다. 누가 시간 되고 돈 있으면 이 표지판 좀 고쳐주면 좋겠다. 다음 한 단락 건너뛰어 류의태에 대한 설명을 읽어본다. “류의태 선생은 경남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상정(옛지명: 山陰縣 丁台) 마을에서 출생하여 당대 제일의 하늘이 내린 신의(神醫)로 칭송받았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술하여 의성(醫聖)으로 칭송받는 허준의 의학적 재질과 지식을 키워준 스승이며, 특히 의술의 발전을 위해 허준에게 자신의 몸을 해부용으로 제공하여 해부학의 효시를 이룬 살신성인의 위대한 의학자로 전해진다.”고 써놨다.
류의태가 실존인물이냐, 허준이 정말 류의태에게 배웠느냐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 역사를 고증하는 분들은 따따부따 따지고 재고 밝히려 들지만, 일반 등산객들은 ‘아, 그만큼 류의태 약수터 물이 좋구나’라고 여기면 그만이다.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산청한방약초축제위원회는 조선시대 인물인 류의태와 그의 제자 허준 선생의 업적을 후세에 전승하기 위해 2004년부터 ‘류의태·허준상’을 시행해 왔었다. 2013년부터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의보감》의 우수성과 가치를 재조명한다는 취지에서 이 상의 이름을 ‘동의보감상’으로 바꾸었다. 그럴 듯하다.
그런데 2014년 사단법인 허준기념사업회가 동의보감상 제정 취지에 오류가 있다며 시정과 함께 시상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허준기념사업회는 축제위원회에 보낸 공문에서 류의태와 허준 선생은 사제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류의태에 대해 연구했지만 역사적으로 실존했다는 근거가 부실하며, 단지 《소설 동의보감》에 나오는 가공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일부 문헌에 ‘유이태’라는 이름이 거론되지만 이마저도 허준 선생보다 130~140년 가량 후대의 사람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언론 기사를 보면, “군은 사업회 측의 주장에 일부 수긍할 부분이 있지만 지자체 행사를 그만두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또 이미 올해의 수상자 접수가 시작된 상태이기 때문에 중단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와 함께 군은 행사가 시작된 지 10년이 되어 가는데 지금 와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국제신문> 2014년 7월 20일자 보도)
그러면서 한마디 더 덧붙여 놓았다. “군 관계자는 “일단 올해 행사를 치른 뒤 문제가 되는 부분에 대해선 차후에 변경을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군은 지난해 세계전통의약엑스포 개최 당시에도 유사한 항의를 받아 류의태와 허준 선생의 관계가 명시돼 있는 한의학박물관의 일부 전시 자료를 수정한 바 있다.”(같은 신문, 같은 날짜) 역사적 고증이 명쾌하게 마무리되지 않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한의사학 박사인 유철호 씨는 오래전부터 ‘허준의 스승이라는 류의태는 허구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수긍되는 부분이 많다.
아무튼 류의태 약수터를 겨냥하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등산로 들머리에서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 준 것은 칭찬받을 만하다. 문장과 띄어쓰기 같은 것도 생각하면서 만들었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마음은 감출 수 없다.
걸음을 조금 옮기자마자 오른쪽 산비탈에 구형왕릉이 모습을 드러낸다. 구형왕릉의 공식 명칭은 ‘가락국 10대 양왕릉’이다. 국가사적 제214호로 지정돼 있다. 설명글에는 이렇게 돼 있다. “국가사적 제214호 구형왕릉은 가락국 마지막 임금인 양왕께서 영면하고 계시는 능소입니다. 우리나라 유일의 가야시대 석릉(石陵)으로 귀한 역사 사적지이며, 700만 가락 후손들의 거룩한 성지입니다.” 그러니 참배를 할 사람들은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예를 갖추어야 할 곳이다. 모자 벗고 안경 벗고 이어폰 빼고 배낭 벗고 지팡이 놓고 두 손 모으고 고개 숙여 기도했다. 부디 편히 쉬시라고.
구형왕릉 앞에서 얌전한 자세로 잠시 기도했다. 부디 편히 쉬시라고.
구형왕릉은 국내 유일의 피라미드형 석릉이다. 일반 봉토 무덤과는 달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산기슭 경사면에 크고 작은 암석을 쌓아 총 일곱 단의 층을 이루며 정상부는 타원형이다. 전면 중앙에서부터 높이 1m 내외의 담이 둘러져 왕릉을 보호하고 있다. 앞면 전체의 높이는 7.15m이고 하단 길이는 25m이며 동쪽 4단 중앙에 가로, 세로 40cm, 깊이 68cm의 석문이 마련되어 있다.(안내 표지판 참조)
이제 구형왕께도 예를 표했으니 본격적으로 산으로 오를 차례다. 20분쯤 올라가니 ‘왕산 약용식물 관찰로’라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림은 투박하다. 보려면 보고 말려면 말아라는 퉁명스러움이 보인다. 퉁명스러움은 경상도식 예법이다. 속 깊은 곳엔 자잘한 정이 쌓여 있지만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는 방식이다. 이름은 약용식물 관찰로이지만 등산안내도와 다름없다. 그러니까 등산로 주변에 피어나는 갖가지 풀들과 꽃들과 나무들 모두 약용식물이라는 뜻인가 보다. 그런 느낌을 가지고 산을 오르라는 암시다.
안내 지도는 투박하지만 매력 있다.
주차장에서 한 시간 남짓 올랐다. 처음엔 오른쪽에 계곡을 끼고 올랐다. 물은 많지 않았지만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까지 상쾌했다. 새들도 많았다. 휘파람처럼 노래하는 새, 풀피리소리처럼 노래하는 새, 묵직한 저음으로 노래하는 새 들이 있었다. 딱따구리도 있었다. 딱따르르르르르 나무를 파는 소리가 굴밤나무, 소나무 사이를 휘젓는다. 자신의 존재를 정확하게 알리는 새들은, 거꾸로, 산을 오르는 나의 존재도 의식하게 했다. 내가 존재하기에 그들을 인식할 수 있었으므로.
중간에 있었던 류의태 약수터는, 어쩌다 보니 그냥 지나쳤다. 머리를 비우려고 산에 숨어 들었는데 오히려 머릿속이 복잡했던 탓이다. 무엇을 그리 깊이 생각했을까. 노래에 정신을 뺏겼을까. 생각보다 힘들지 않은 산행이라 쉴 겨를도 없이, 주변을 둘러볼 겨를도 없이 냅다 달려간 것이었을까. 약수터에서 물 한잔 마시며 심호흡을 해야지 생각하던 애초의 계획은 날아가 버렸다. 한참 올라가다가 만난 이정표에서, 아차, 이미 약수터를 지나쳐 왔구나 깨달았다. 목표한 것이 약수터가 아니었으므로 다시 돌아내려갈 마음은 없었지만, 아쉬움마저 없지는 않았다.
산에 오르고 나서 처음으로 등산객 부부를 만났다. 길 중간에 서서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을 주고 받는 부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분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빼야 할 뱃살이 만만찮았다. 그분들이야 뱃살만 조금 빼면 그만일 테지만 나는 머릿속에 들어차 있는 온갖 잡동사니 잡념도 씻어내야 했으니 더 골치 아프고 미련한 건 오히려 나쪽이다.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그들을 지나쳐 쉬지 않고 길을 줄였다. 정상이 가까워진 것이다. 파란 하늘이 점점 넓어지고 나무들이 점점 낮아졌으며 건너편 산봉우리 기슭도 눈 아래에 보인다. 허벅지와 장딴지는 팽팽해졌고 손수건은 흠뻑 젖었으며 가방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물과 과자 두어 개를 먹은 덕분이다.
평전샘에서 잠시 쉬었다.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망설였다. 가까운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평전샘까지 올랐으면 4분의 3은 넘어선 것이다. 거기 어디 샘이 있었으므로 ‘평전샘’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터인데, 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애써 찾을 생각도 없었다. 있기나 하면 한번은 만나게 될 것이고 없어지고 말았다면 그래서 남긴 이름만으로도 충분할 터였으므로. 평전샘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든 왼쪽으로 돌아나가든 왕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한쪽은 720m, 한쪽은 980m이다. 가까운 쪽을 택한다. 가깝다는 것은 그만큼 가파르다는 뜻이겠지만 그건 상관없다. 일단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시간이 예정보다 늦어지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 소나무들의 위용에 압도되어 한참 동안 발길을 뗄 수 없었다.
소나무를 만난다. 소나무는 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밑둥치에서부터 너댓 개 가지가 뻗었는데, 그 가지 하나하나가 엄청나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분출하는 듯하다. 아니다. 100년 묵은 용이 틀임을 하면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하다. 아니다. 은하계 저 멀리서 달려온 우주인이 왕산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비로소 천지개벽을 외치며 발호하는 듯하다. 그것도 아니다. 한마디 필설로 표현하기 힘든 소나무를 보면서 잠시 숨을 가다듬는다. ‘너희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 높은 산골짝에서 활개를 편 채 길고 긴 삶을 이어가는 것이냐?’ ‘너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기에 길 가는 손님의 눈길을 끌고 발길을 붙드는 것이냐?’ ‘너희는 이제 무엇이 되려고 하느냐? 으리으리 기왓집 서까래는 애당초 글러먹었고 시골마을 담벼락 밑 장작으로 쌓여 있기에도 마땅치 않고 그저 거기서 천 년 만 년 살다가 그렇게 가려무나.’
드디어 왕산에 올랐다. 시원하고 상쾌하다.
10시 23분에 왕산 표지석을 안고 사진을 찍는다. 왕산은 기억 속의 산과 다른 모습이다. 멀리 지리산 천왕봉 쪽으로 눈길을 한 번 준다. 그 아래에 마을이 보인다. 필봉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필봉으로 건너가서 동의보감촌으로 곧장 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주차장으로 다시 되돌아갈 것인가를 놓고 혼자서 5분 넘게 고민한다. 곧장 동의보감촌으로 내려간다면 누구든 차를 얻어타고 구형왕릉 주차장으로 갈 수 있을까, 그것이 문제였다. 아무나 붙들고 부탁하면 누구든 태워줄 것 같지만 행여 정말 아무도 태워주지 않으면 어쩌란 말인가. 4km를 넘는 길을 다시 걸어서 주차장으로 간다는 게 영 마뜩치 않았다. 사진 한 장 찍어줄 산꾼 한 명 없이 혼자 이리저리 사진을 찍다가 발길을 돌렸다. 필봉은 다음에 필히 간다.
그 언저리에서 동의보감촌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잔디마당이 푸른빛 널빤지를 만들어 놓았다. 그 귀퉁이에 극단 큰들의 마당극 공연장도 보인다. 객석 햇빛을 가려주기 위해 천막을 쳐 놓았는데, 새끼 손톱보다 작아 보인다. 저 공연장에서 400-500 관객들을 모셔 놓고 열너댓 배우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연기한다. 손에 모아 쥐면 한 줌도 안 될 터전에서 역사를 이야기하고 남북을 이야기하고 효도를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전국의 관광객들이 함께 웃고 울고 손뼉 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참 재미있는 세상이다. 흥미로운 일상이다.
소왕산 표지석이다. 만든 분들은 수고하셨지만 내가 보기엔 별로다. 자연훼손이다.
왕산에서 망바위로 발걸음을 옮긴다. 산등성이를 타고 걷는 길은 전혀 힘들지 않다. 노랫소리가 가볍고 경쾌하다. 양희은의 ‘한계령’을 듣는다. 이미 다 올라와 버렸는데 “내려가라”고 노래한다. 가볍게 웃어넘긴다. 서양 노래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이 나온다. ‘그린’으로 가득 찬 산들을 본다. 길바닥 염소똥을 피해 가며, 간혹 제멋대로 솟아난 뾰죽돌을 살며시 밟아가며 발걸음을 놓는다. 잰걸음 덕분에 길은 더욱 단축되어 1km 남짓 되는 망바위에 금방 도착한다. 중간에서 아까 만난 부부를 다시 만난다. 그들은 내가 걸은 길과 다른 길을 찾은 것이다. 망바위는 낯익다. 지난번 등산 때 이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망바위에서 조금 더 걸어가니 소왕산이 나온다. 어느 산악회에서 한자로 ‘小王山’이라고 새긴 표지석을 바위 틈에다 붙여 놓았다. 콘크리트 짊어지고 오르느라 수고하셨다.
망바위에서 내려다보는 동의보감촌은 아름답다. 가을에 오면 더 멋지겠다. 잔디광장과 마당극 공연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망바위에서 다시 동의보감촌을 내려다본다. 잔디광장이며 주제관이며 박물관이며 근처 식당들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왕산에서 본 것보다 훨씬 선명하고 넓다. 저 멀리 고속도로와 국도도 눈에 들어온다. 산청읍 한 부분도 그 옆에 보인다. ‘물안내마을’도 얼추 짐작된다. 시선이 탁 트이는 위치다. 박무(薄霧)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휴대폰 사진기 말고 일반 사진기를 들고 왔더라면 더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살짝 후회도 해 본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극단 큰들의 기획실장에게 보내준다. 사실 왕산에 올라온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 위에서 공연장을 내려다보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서였다. 오랫동안 벼르고 별러 올라온 만큼 사진도 여러 장 찍고 찍은 사진을 큰들 관계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혼자 온갖 표정을 지어가며 미친 놈처럼 사진을 찍었다.
망바위에서 바라본 필봉은 더욱 멋지다. 유혹하는 힘이 세다. 저 멀리 동의보감촌을 배경으로 한 장 찍는다.
망바위에서 필봉을 바라보니 더욱 가고 싶어진다. 마당극이고 뭐고 점심이고 뭐고 무작정 가볼 걸 그랬다, 싶어진다. 이젠 늦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하산이다. 등산보다 더 위험하고 힘든 하산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산길에는 망경대(望京臺)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망경대에는 고려시대 농은 민안부(閔安富)의 전설이 서려 있다. 딱 이름만 봐도 알겠다. 서울, 즉 한양, 아니지 고려시대니까 개경을 바라보는 높은 곳이다. 절절한 사연이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예의판서를 지낸 농은 민안부 선생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 역성혁명에 반대한 두문동 72현의 유신 가운데 한 분으로, 고려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키기 위해 지리산 기슭인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에 남하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선생은 ‘옳지 못한 부귀는 오히려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不義之富貴 於我如浮雲)는 말씀을 생활신조로 삼아 근검절약하는 검소한 삶과 만고충절을 실천함으로써 선비들의 귀감이 되어, 후세의 유림과 후손들이 매년 춘추계의 분향을 이어가고 있다. 선생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이곳 왕산 중턱 바위에 올라 송경(고려의 수도)을 향해 절을 하며 고려와 임금을 그리워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선생의 충절과 의리를 기리기 위해 이 바위를 망경대(望京臺)라 부르게 되었다.”(안내 표지판)
자기를 불러줄 왕조는 이미 망했는데, 북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렸을 민안부의 마음을 조금은 알 듯하다.
11시 10분을 지났다. 민안부의 삶과 태도를 기리며 잠시 앉았다. 한 가족이 다녀간다. 한 산악회 회원 몇몇이 지나간다. 물을 조금 마시고 숨을 가다듬었다. 마지막 남은 초코파이 하나를 먹었다. 망한 나라를 향한 지극한 정성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자기를 불러줄 임금이 더 이상 계시지 않는 궁궐을 향하여 매월 두 번씩 이곳에 올라 절을 하였을 농은 선생의 흉리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여, 왕조가 바뀌었을 때 대부분의 신하들이 새 왕조에 충성을 맹약하며 우르르 달려가더라도 “나는 죽어도 못 간다”며 모든 걸 버리고 낙향해버린 신하가 몇 명은 있어야 하지 않았겠나 싶다. 등산을 하다가 뜻밖에 역사 공부를 좀 많이 했다.
내려오는 길은 밋밋했다. 대구에서 온 산악회원들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바람에 길비낌을 하면서 정답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중 좀 힘든 사람은 한참 뒤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올라갔다. 그래도 걱정되지는 않았다. 명색 산악회원으로 함께 온 분들이라면 이 정도의 산에서 낙오하거나 실종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주차장에 내려서니 12시가 가깝다. 올라갈 때 잊어먹은 약수터가 생각났으나 다음으로 미루었다. 약수터를 거쳐 하산하면 20분은 더 걸릴 것이어서가 아니다. 아쉬움이 있어야 다음에 또 찾아올 것이어서다. 자연스럽게 약수터와 필봉이 다음 목표가 되었다.
늘 가던 ‘주암식당’ 건너편 수제비 집에 처음 갔다. 두 여인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다슬기수제비를 시켰다. 텔레비전에서는 요즘은 통 보지 않는 <개그콘서트-1000회 특집>이 재방송되고 있었다. 한 가족이 밥 먹은 뒤 나가고 나만 남았다. 이 두 여인은 내가 앉은 테이블에 마주앉아 자기 식사를 한다. 너나들이가 도를 넘었다. 싫지 않았다. 주인이 먹는 음식이나 손님이 먹는 음식이나 매 한가지라서 좋았다. 다슬기는 엄천강에서 잡았을까. 설마 외국산은 아닐 테지. 밀가루는 외국산이겠지. 이러거나 저러거나 한 그릇 잘 비우고 일어섰다. 뒤에 들어온 손님들이 접시에 놓인 다슬기 빨아먹는 소리를 쪽쪽쪽쪽 내며 즐거워한다. 다음엔 다시 ‘주암식당’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2019. 6. 11.
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