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137m 짜리 진주 숙호산 한두 번 올라가는 다리 힘으로 그 두 배가 넘는 하동 고소성(姑蘇城)에 오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처음엔 형제봉(1115m)까지 갔다가 최참판댁으로 내려올 심산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고소성과 형제봉을 올려다 보았다. 정말 형제봉까지 가려고 했다간 탈진하여 실종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산행할 생각 없이 오고갈 때는 그저 그런 산이었는데 작심하고 쳐다보니 결코 쉬운 산이 아니었다. 더구나 오후 2시까지는 최참판댁으로 내려와야 했으니. 주차 안내를 하는 분들에게 물어보니 “너무 무리하지는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후 2시까지 내려와야 하는 것은 극단 큰들의 마당극 <최참판댁 경사 났네>가 2시에 시작되는 때문이다. 1시까지는 내려와야 국수라도 한 사발 말아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올해 상반기에는 마지막 공연이니 놓칠 수 없었다. 4월에는 이사를 하고 동문회도 가느라 공연을 못 보았다. 5월 둘째 주 공연 때도 몸이 좋지 않아, 부처님 오신 날이라 빼먹었다. 3월 9일 공연 이후 5월 25, 26일 하동을 찾은 것이다. 몸이 달아올랐던 것이다.
아침 7시 30분에 사무실 나가서 급한 원고 정리하고 보도자료 보내고 나니 8시 30분이다. 앉아 있노라면, 일이야 섬진강가 모래알만큼이나 많겠지만 굳이 일요일까지 나가서 청승을 떨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부지런히 가면 9시 30분쯤 최참판댁 주차장에 도착하고, 잘하면 고소성을 지나 형제봉까지 한 바퀴 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동을 걸었다. 하동읍내 편의점에서 ‘지리산 하동 녹차’ 한 병과 꼬마 소시지 다섯 개를 샀다.
주차장에서 한산사(寒山寺)까지는 그늘이 거의 없는 땡볕이다. 온나라 곳곳에 폭염특보가 발효될 것이라고 했는데 오전 10시 즈음엔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한산사로 오르는 길 양 옆에는 잘 여문 매실이 반갑게 인사했다. 지난 봄 매화향으로 나를 어지럽게 하던 길이다. 덩달아 밤꽃도 제철을 만났다. 가을엔 벌어진 밤송이와 길바닥에 떨어진 알밤을 제법 보게 생겼다. 잘 포장된 길은 열기를 내뿜었다. 자동차로 오고갈 때는 몰랐는데 굉장한 비탈이다. 장딴지가 단단해지고 허벅지가 퍽퍽했다. 금세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흐르고 등허리에도 끈적거림이 느껴졌다.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다니며 열심히 지저귀는 새들이 없었더라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등산복 차림의 젊은 사람 한 명이 뒤를 따랐고 얼마쯤 가다가 늙수그레한 보살 한 명을 만났다. 올라가면서 계속 뒤돌아보았지만 내 걸음을 따르지 못했다. 딴 데로 간 것이다.
한산사 앞 전망대에 섰다. 그 전경은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부지런한 땅 주인은 벌써 모내기를 마쳤고 조금 덜 부지런한 땅주인은 논을 갈고 물을 가두어 두었다. 며칠 내로 써레질을 하고 모를 심을 것이다. 써레질하고 모 심는 건 아마도 기계가 다 할 것이다. 기계로 영농을 하기 좋도록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하게 구획된 논이 넓게 펼쳐진다. 농사 짓는 분들께는 미안하지만, 구획정리된 논에서 나는 보리에는 기계소리가 나고 나락에는 기계냄새가 많이 날 것만 같다. 부부송도 보이고 동정호에 악양루도 보인다. 3월 방문 때 사진 찍느라 정신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곳이다. 복숭아, 살구, 매화들은 지금쯤 제각기 열매를 단단하게 하느라 정신 없을 것이다.
섬진강 쪽으로 눈길을 준다. 정말 기다랗고 누런 구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다. 햇빛에 반짝이는 윤슬을 보노라니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지는 듯하다. 강 둔치에는 지난밤 야영한 사람들의 자동차와 텐트가 눈에 들어온다. “오전 11시까지는 정리하고 나가야 한다”는 안내 방송이 절 앞까지 들려온다. 강바람 맞으며 한잔씩들 하고 늦잠 늘어지게 잤을 야영객들의 부은 눈두덩이 보일 듯하다.
들판 건너편 구재봉은 옅은 운무에 가렸다. 패러글라이딩이나 헹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산이다. 산 아래에는 빨갛고 파란 지붕을 인 집들이 즐겁고 고달픈 인생을 보듬고 앉았다. 논을 일구고 밭을 가꿔 자식을 키우는 하동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평사리 들녘을 사이에 두고 이쪽 저쪽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섬진강에서 재첩을 줍고 민박을 쳐서 돈을 벌고 술을 마시는 평범하고 멋진 나날들이 가득가득 쌓여가는 역사의 들판이다. 절 앞에서 잠시 망연자실 들판을 내려다 보다가 다시 발길을 돌렸다.
한산사. “중국의 한산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바로 하동 악양면 고소성 아래에 있는 한산사라는 아주 작은 절이다. 한산사가 위치한 악양은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평사리 강변 모래밭을 금당이라 하고, 모래밭 안에 있는 호수를 동정호라 했으며, 하동의 고소성 또한 중국의 고소성과 같은 이름이다.”라고 한다. 한산사는 요사이 불사를 일으키는 것 같다. 곳곳에 새로 바른 시멘트 흔적이 보인다. 높다란 담벼락은 이국적이다. 석가모니의 일대기나, 아니면 소설 <토지> 또는 <역마>의 내용을 그림으로 형상화하든, 무슨 그림을 좀 그려넣었으면 좋겠다 싶다. 소나무들은 제 멋대로 컸는가 싶으면 손길이 닿은 듯하고 또 손길을 많이 탔는가 싶으면 자연 그대로이다.
소나무들은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녘을 굽어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소설 <토지>의 무대였던 이곳이 실제 토지의 배경처럼 바뀌어가는 과정을 생각할까. 온나라에서 남녀 사람들이 몰려들어 공차기하는 겨울 풍경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주말은 물론이요, 평일에도 가족들끼리 연인들끼리 차를 타고 몰려드는 최참판댁의 북적거림을 듣고 있을까. 스님 독경 소리, 목탁 소리 자장가 삼아 천년을 넘나드는 낮잠을 자고 있을까. 한산사 옆으로 난 등산길을 따라 걷는다. 온갖 잡념과 상상이 뒤따른다. 메뚜기, 여치 같은 풀벌레들 날개 비비는 소리도 아름다운 교향곡이 되어 내 뒤를 쫓는다. 간혹 앞서 가 있기도 하고.
고소성은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던 곳이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산성으로 1966년 9월 사적 제151호로 지정됐다. 지금은 이 일대가 군립공원이다. 성은 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300m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산복식(山腹式) 산성으로, 평면은 5각형에 가깝다고 한다. 현재 성 안에는 특별한 시설물이 없는 듯하다. 이 성의 유래에 대해 ‘신라가 백제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라는 말을 본 듯하다. 하동군 악양면의 옛 지명은 소다사현(小多沙縣)인데 고소성은 소다사현을 방어하고 섬진강 물길을 지키기 위해서 축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도 한다.
한산사에서 45도는 됨 직한 비탈길을 걸어 올라갔다. 중간 중간 맞춤한 돌바닥을 방석 삼아 숨을 돌리기도 하고 땀을 식히기도 했다. 하동 녹차는 이미 미지근해져 있었지만 해갈에는 아주 그만이었다. 아침으로 먹은 건 어디로 갔는지 허기가 몰려왔다. 오뚜기 진라면 반 개를 끓여 식은 밥 두 숟갈을 말아먹었으니 그게 그 시간까지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오산이다. 편의점에서 산 꼬마 소시지 ‘맥스봉’ 하나를 먹었다. 치즈가 들어 있어 고소했다. 검지손가락만한 이 소시지 하나가 이렇게 원기를 북돋워 줄 줄이야. 길은 가팔랐지만 굴밤나무, 소나무, 벚나무 들이 만들어 주는 그늘 덕분에 지독한 더위는 없었다.
제법 많이 기어 올라갔다고 생각하던 순간, 형제봉과 외둔 마을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왔다. 해발 260m. 한산사에서 겨우 400m를 올라갔을 뿐이었다. 몸에 흐르는 땀과 다리의 고통을 생각하면 1km는 족히 걸은 듯한데 고작 400m라니. 형제봉까지는 5.3km라고 돼 있다. 그 거리라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할 수가 없다. 오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물어나 볼 텐데 가는 길, 오는 길에 인기척이라고는 없다. 이름 모를 새들만 노래하는 건지 우짖는 건지 꽥꽥거리고 삐약거리고 지지배거린다. 외둔으로는 1.2km다. 이 정도 거리라면 적당히 쉬어가면서 가볼 만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내 목표는 고소성이다. 할 수 없이 형제봉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가다 보면 무엇이라도 나오겠지, 가다 보면 누구라도 마주치겠지. 그것이 멧돼지라 한들 반갑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소성에 다다랐다. 높은 하늘엔 장마철 나무말미 때 같은 흰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다. 흰구름 뒤로 언듯번듯 보이는 하늘은 파랗다. 파란 우주와 하얀 구름과 고소성 돌덩어리와 소나무들은 묘한 대조와 조화를 이루었다. 내 머리통보다 큰 육면체 돌들을 정교하게 쌓은 고소성은, 지금까지 보아온 성들과는 사뭇 달랐다.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기에도 좀 요상했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목적이라고 해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이 높은 산 속에 할 일 없이 쇠뭉치 같은 돌덩이를 가져다 날라 성을 쌓았을 리도 만무하다.
성벽은 둘레가 약 800m, 높이는 3.5~4.5m라고 한다. 그 단면은 사다리꼴로 아랫부분 폭은 6m, 윗부분은 2m이다. 가공한 장방형의 석재를 써서 견고하게 쌓고 남북에 두 개의 성문을 설치하였다고 했는데, 성문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성을 찍고 하늘을 찍고 소나무를 찍고 나를 찍었다. 어쨌든 다녀간 표식을 남기고 싶었다. 조선시대, 고려시대 양반님네들이야 하인들이 이끄는 나귀를 타고, 가마를 타고 산에 올랐었어도 제 이름 석자를 바위에 새기곤 했지만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은 스마트폰 사진 한두 장으로 그 흔적을 남겨도 무방하다. 디지털 파일은 전파를 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전 세계 어디엔들 가지 못할 곳이 없으니 조선시대 양반님네들보다야 훨씬 윗길 아닌가.
성돌 위에 앉아 평사리 들녘을 내려다 보고, 섬진강을 굽어 보고, 강 건너 광양면 다압마을을 건너다 보았다. 이렇게 평화롭고 이렇게 묵직한 전경을 본 적 있었던가. 내리쬐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안으며 흙을 부풀리고 물을 에둘리며 식물과 동물을 키워 마침내 인간이 살도록 한 너른 품을 내려다 보았다. 거지가 들어와도 굶어 죽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너른 평사리 들녘(무딤이들)을 고마운 마음으로 보고 또 보았다.
하동이라는 이름과 악양이라는 이름과 고소성이라는 이름의 연관성을 어림짐작해 보았다. 섬진강이라는 이름이 나온 전설도 기억해 보았다. 지금까지 본 섬진강 가운데 가장 멋지고 가장 길고 가장 작은 강을 나는 고소성에서 보았다. 지금까지 본 악양들판 가운데 가장 작고 가장 넓은 들판을 나는 고소성 위 소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그 소나무 아래 퍼질러 앉아 주머니에 든 ‘맥스봉’ 네 개를 잇따라 까 먹고 하동 녹차 음료를 마셨다. 툭 꺼졌던 뱃속에 다시 휘발유를 주유한 느낌이었다.
성돌 위에 홀로 우뚝 선 소나무 이름을 흔히 ‘구천이소나무’라고 하는 모양이다. 나중에 극단 큰들 단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누군가 자기 누리집에 이렇게 적어놨다. “고소성 돌틈 사이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박혀 있다. 이 나무는 소설 <토지>에서 구천이가 소나무에 등을 기대 평사리 마을을 바라보았다는, 그 소나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구천이소나무다. 소설 <토지> 속 별당아씨와 구천이가 야반도주한 길이다.”(http://blog.daum.net/k-sanboo/16859297)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다. 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쓸 때 이 성은 있었겠는데 이 소나무도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소나무는 몇 해 동안 거기 돌틈 사이에서 비대해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있었을까. 구천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별당아씨 소나무도 하나 지목하여 줄 만도 한데, 그리하여 소설 속 인연이 송홧가루일망정 다시금 맺어지도록 해줄 만도 한데, 인간들은 거기까지는 이야기를 이어붙이지 못한 모양이다. 상상력을 조금이라도 더 키웠더라면….
고소성에서 한참 쉬었다. 땀은 다 식었다. 맨 꼭대기에서 마음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이 성을 쌓느라 오만 고생을 다하신 선조들을 위로하고 어쩌다 돌덩이를 안고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져 이승을 하직하였을 조상들의 넋에 마음으로 절했다. 고소성에서 형제봉으로 더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잠시 고민하다가 돌아섰다. 5km를 더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식량은 떨어졌고 다리힘은 빠졌으며, 무엇보다 2시까지 마당극 공연장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아서이다. 성을 한 바퀴 돌고 싶어져 아래쪽으로 미끌미끌 위태위태 내려섰으나 높은 성벽을 오를 수 없었으며 깊은 성벽을 내릴 수 없었다. 고소성을 중심으로 인근 지도와,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을 표시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올라간 길을 그대로 되짚어 하산을 서둘렀다.
해발 300m밖에 되지 않는 곳. 걸어서 1시간 30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 그러나 신라시대에서부터 무려 1400~1500년을 건너뛰어온 고소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더 많은 것을 반성하게 하는 힘을 가진 성이다. 돌멩이 하나하나에 묻었을 옛 어른들의 땀과 피는 고사하고, 숨가쁘게 진행된 우리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말없는 말로 이 터를 지켰을 돌과 나무들에 숙연해졌다. 내려오는 길에는 뱀도 만나고 형제나무도 만났다. 형제나무 전설은 억지로 지어낸 듯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개연성은 충분했다. 주차장에 내려서니 정오의 땡볕이 쨍쨍하다. 시원한 물국수가 아른거린다.
2019. 5. 28.
시윤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운돌 가는 길 (0) | 2019.06.04 |
---|---|
깔따구에게 이기다 (0) | 2019.05.29 |
뻬쉐 (0) | 2019.05.16 |
출근길 (0) | 2019.05.16 |
숙호산에서 두곡으로 걸었다 (0) | 2019.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