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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운돌 가는 길

by 이우기, yiwoogi 2019. 6. 4.

 


오후 540분에 집을 나섰다. 혹시나 싶어 작은 배낭에 초코파이 하나와 쌀과자 두 개를 넣었다. 물병은 늘 필수다. 왕산 다녀온 뒤 허벅지 살이 퍽퍽하고 은근하게 당기는 게 영 마음에 걸린 때문이다. 뭉친 근육을 풀어주자는 생각이다. 저녁밥 걱정하던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두곡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틀면 대아고, 석갑산 방향이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명석 쪽이다. 오늘은 기어이 명석으로 가리라 다짐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내가 다니는 직장의 구호가 개척이다. 내 모교의 교훈이 곧 개척이라는 말이다. 개척은 늘 외롭고 고독한 것이다. 그 끝은... 가봐야 안다. 창대하리라 믿는다.

 


고등학교 동문회 체육대회 때 받은 기념품 색안경을 끼고 마침 오늘 배달돼 온 고급 모자를 얹었다. 머리가 가볍다. 내 몸에 두르는 물건을 스스로 산 것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만족스럽다. 머리통이 모자 둘레보다 조금 작은 건 흠이라면 흠이지만, 목끈이 있으니 개의치 않는다. 지팡이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뉴스공장을 귀에 꽂았다. 의기양양 분기탱천 길을 재촉했다.

 

갈림길에서 예정대로 오른쪽으로 꺾었다. 한 사내를 만났다. 길을 물었다. 이 일대, 그러니까 석갑산, 판문산, 숙호산을 모르는 곳이 없다는 그의 설명은 친절하고 자세하고 고마웠다. 설명하는 동안 얼굴에 흐르는 땀을 몇 번이나 닦았는지 모른다. 갈 길도 바쁠 터인데. 정말 고맙다. 덕산아파트 산다 하니 또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다음엔 막걸리 한잔 대접해야겠다. 어쩐지 한두 번은 마주친 이웃 같다.

 


걸었다. 사내가 설명해준 그대로였다. 그는 인간 지도였던 것이다. 어려운 말로 인간 네비게이션이었다. 작은 협곡을 만났다. 직진했다. 산불감시 초소를 끼고 오른쪽으로 걸었다. 매실 밭도 지났다. 진주에서 국도로 산청 가다 보면 처음 만나는 터널 위를 걸었다. 명석에 가까웠다. 마지막 내리막에서, ‘!’ 하고 끈이 끊어졌다. 허기가 찾아오고 혈당이 내려가는 느낌. 준비해간 초코파이 하나와 쌀과자 하나를 먹었다. 든든해졌다. 신기한 일이다. 어슴푸레하게 마을이 보인다.

 

숙호산 등산로 입구라고 적힌 팻말을 만났다. 산길을 다 걸은 것이다. 650분이었다. 1시간 10분이면 족했다. 좀 빨리 걸은 덕분이다. 쉬엄쉬엄 걸으면 1시간 30분쯤 걸릴 것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알맞게 배치돼 있었다. 길은 넓었고 폭신폭신했으며 그늘이었다. 이마와 콧등에 땀이 흐르는 건 더위 때문이 아니라, 지난 한 주 동안 마신 술 때문이다.

 



명석 양조장으로 빠졌다. ‘볼일을 보러 명석치안센터로 발길을 돌리는 순간 시내버스가 지나갔다. 그것을 탔으면 집에 와서 볼일을 봐도 됐을 것을. 그 뒤로 버스는 한동안 오지 않았다. 문이 잠긴 치안센터 덕분에 명석양조장 막걸리를 사게 됐다. 세 병을 사서 한 병은 이웃사촌에게 드리고, 두 병은 집으로 갖고 왔다. 일주일, 또는 이 주일 보양식이다.

 

버스는 735분에 왔다. 한 노인은 이현동 사는 사람이 교통편을 그렇게 모르느냐며 힐난한다. 학교 가방을 멘 중학생은 버스 시간에 맞춰 나왔다. 이방인이 되는 길은 아주 쉽다. 그동안 동신아파트를 비롯하여 어탕국수집, 찜전문집, 무슨무슨 마트 따위 동네 건물들을 눈에 넣었다. 지루하지도 배고프지도 않았다. 쉽게 정들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끌리는 명석이다. 오늘은, 일단, 어탕국수를 눈여겨봐 둔다.

 



명석에서 내가 사는 이현동까지는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다. 나불천 따라 편편하게 이어진 길은 좀 지루할지는 몰라도 걸음을 옮겨놓기엔 아주 그만이다. 그렇게 아내의 말을 들은 적 있다. 만약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것을 생각해 냈더라면 나는 내처 걸어서 왔을 것이다. 하지만 버스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끝까지 기다릴 것인가, 택시를 탈 것인가, 누구를 부를 것인가, 그것만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한 모퉁이를 돌자마자 생각했다. ‘다음부터는 우리집까지 걸어가도 되겠구나하고...

 



밥 대신 명석막걸리 두 잔 반을 마셨다. 물만두와 달걀구이와 참외가 안주였다. 먹다 보니 김치가 빠졌다 싶어 냉장고를 열었다. 어쩜 이렇게 내가 먹고 싶은 만큼, 그것도 앙증맞게 썰어놨을까. 세상 사는 사람들은 이 정도 안주도 진수성찬이라고 할 것이다. 몇 가지 더 얹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만의 안주를 선택했다.

 



62일 산청 동의보감촌에서 찍은 마당극 <남명> 동영상을 틀었다. 마당 왼쪽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찍은 것이다. 번번이 정면에서 촬영한 것만 보다가 왼쪽 귀퉁이에서 찍은 것을 감상하노라니 이전에는 모르던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배우들이 객석의 오른쪽, 가운데, 왼쪽을 향하여 서서 연기를 할 때 정면에서는 안 보이던 모습이 보인다. 저 건너 반대편에는 장구와 북과 징 따위 악기로써 분위기를 올렸다가 밀었다가 하는 악사도 보인다. 마당극을 열심히 관람하면서 웃고 손뼉치는 관객들의 표정도 보인다. 남명 무대에 있는 선비의 갓과, 동의보감촌 주제관 처마와, 왕산 전망대의 끝이 아슬아슬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 최고의 안주 아닌가. 나도 모르게 웃다가 손뼉을 친다. 초저녁잠에 빠졌던 아들이 깨어났다.

 



한 잔만 하려던 술을 두 잔 반이나 마셨으니 이건 무슨 조화일까. 두곡마을에서 명석까지 열심히 산길 걸어간 스스로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40분 넘게 시내버스를 기다리면서도 택시의 유혹을 뿌리친 인내에 대한 보답이다. 그 와중에 명성이 자자한 명석막걸리를 산 안목에 대한 보답일 수도 있겠지. 아니다. 정답은, 마당극 한 편을 한 시간 동안 집중해서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술잔에, 술병에 손이 간 탓이다. 오늘도 기---마당극이다. 할 수 없지 뭐...

 

2019. 6. 4.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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