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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큰들 마당극 보러 가기

옥화주막에서 화개장터 막걸리를 들다

by 이우기, yiwoogi 2019. 3. 30.

극단 큰들의 마당극 <역마>를 보고

 

극단 큰들 누리집에 올려놓은 여러 마당극 작품 가운데 <역마>라는 게 있다는 것은 진작에 알았다. 그것이 소설가 김동리의 같은 이름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지난해 여러 마당극을 섭렵하는 가운데에도 <역마>를 내가 직접 보게 될 줄은 진정 몰랐다. 330일과 31일 이틀 동안 하동군 화개면 탑리 화개장터에서 <역마> 공연을 한다는 것을 알고나서부터는 마음이 설레었다. 고등학교 시절 읽고는 까맣게 까먹은 소설 역마를 다시 사 읽으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원래는 실내에서 조명을 멋지게 쏘아가면서 무대에 올리는 연극이었는데 야외에서 공연하게 되면서 마당극으로 탈바꿈한 작품이라고 들었다.

 

일기예보가 예사롭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 뉴스에서는 토요일 전국에 비가 오고 바람이 강하게 분다고 나왔다. 강원도나 내륙 지방에는 눈마저 온다고 했다. 330일에 눈이 온다니. 하긴 강원도 원통에서 군대생활할 때도 3월말에 제설작업을 한 적 있다. 아무튼 비가 오면 공연을 할 수 있을지, 바람이 불면 세워 놓은 무대장치들이 무사할지, 그런 것부터 걱정되었다. 일기예보를 자세히 읽어보니 경남전남 지방은 오후엔 갠다고 돼 있었다. 짐작하기로는 화개장터 주변은 오전까지는 비가 오더라도 오후엔 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내 좋은 대로 해석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깥을 살폈다. 밤새 비온 흔적이 역력했다. 하늘은 말갰다. 올 비가 다 온 것인지 올 비가 더 있는 것인지는 몰랐다. , 금요일 최선을 다한 술자리의 뒤끝이라 뒷덜미가 묵지근했다. 뱃속도 들끓었다. 음주 뒤 늘상 있는 일이다. 함께 가려던 지인이 사정이 생겨 못 가게 되었다. 집안 대사를 앞두고 이상하리만치 할 일이 없는 토요일을 맞이한 아내가 동행하기로 했다. 벚꽃축제를 할 시절이므로 차가 아주 많이 막히리라는 전망에 따라, 우리는 최대한 서둘렀다. 보통 최참판댁에 마당극 보러 갈 때는 집에서 11시쯤 출발했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날인지라 930분도 되지 않아 집을 나섰다.

 


서진주나들목 지나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벚꽃이었다. 고개를 돌려도 벚꽃이었고 눈을 감아도 벚꽃이었다. 온 세상이 벚꽃에 점령당해 있었다. 한두 해 보는 것도 아니고 올해만 해도 처음 본 게 아닌데 벚꽃에 시신경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진양호를 끼고 돌아 진주~하동 간 새로 뚫은 얌전한 국도를 차는 달렸다. 바람은 차가웠다. 차 문을 열면 춥고 닫으면 갑갑했다. 하늘은 역시 말갰다. 하동은 지척이었다. 너무나 낯익고 너무나 가까운 곳이 하동이다. 지난해와 올해 부지런히 다닌 덕분이다. 벚꽃에 유혹당하여 차를 하늘나라로 몰고 가지 않은 것은 지난해 마당극 보러 다니기 위해 새로 산 색안경, 일명 썬글라스 덕분이겠다.

 

차는 막히지 않았다. 뜻밖이었다. 섬진강을 왼쪽에 끼고 모래사장과 강 건너 벚나무들을 보면서 달렸다. 하동~구례 간 화려하고 우람한 벚나무들의 잔치를 보면서 차는 달렸다, 가 말았다. 최참판댁 들머리를 지나자마자 차들이 멈춰섰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행렬의 꽁무니에서 1분에 1미터씩 가는 듯했다. 다행인 건, 뒤쪽을 보니 벌써 수십 대 차들이 내 꽁무니에 붙어섰다는 것이다. 맨 뒤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중간 즈음에서 대열을 이루어 간다고 생각하니 견딜 만했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거리를 50분 가량 걸려서 갔다. 그래도 갔다. 화개장터까지.

 

이번에는 주차가 문제였다. 동네방네 차들이 모여든 탓에 어디 빠끔한 곳이 없었다. 공영주차장들은 벌써 만차라는 팻말을 내걸었다. 그 와중에 극단 큰들의 공연 차량이 보였기로, 나는 모든 걸 참을 수 있었고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쌍계사까지 가는 건 처음부터 목적에 없었고 처음 가는 곳도 아닌 화개장터를 장똘뱅이처럼 뱅뱅 돌아다닐 생각도 아예 없었다. 복이 많았던지 화개면사무소 근처 비좁은 골목을 헤매다가 꼭 차 한 대 댈 만한 공터를 발견하여 능숙한 솜씨로 차를 세웠다. 바닥에 뾰족 솟아난 돌이 있었던 덕분에 차 바닥을 좀 긁혔다. 마당극 한 편을 보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수고로움과 귀찮음은 감내해야 한다는 게, 지난해부터 내가 터득한 인생살이 비법이다.

 

아내와 나는 장터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1130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잘도 도착했는데 공연시간 2시까지 기다리려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릴없이 똑같이 생긴 아주머니들이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제품들을 똑같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하동 화개장터를 구경하기로 했다. 큰들 단원들은 공연 연습에 한창이었다. 지나치다 눈이 마주친 몇몇 벗들과 가볍게 눈인사 나누고. 그러다가 배가 고파졌다. 큰들 기획실장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추적하여 영화 <역마>를 제작할 당시 만들었다는 옥화주막을 찾아갔다. 면사무소 앞에 있었다.

 


우리는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으므로 화개장터 막걸리 한 병과 주인이 권하는 호박전을 시켰다. 막걸리는 약간 텁텁하고 약간 달고 약간 썼다. 목넘김은 나쁘지 않았고 뒷맛은 개운했다. 첫잔을 비우자 바로 다음잔을 찾게 하는 맛이었다. 거기에다 호박전은 최고의 안주였다. 호박전 맛을 더욱 도드라지게 해준 건 갓김치였다. 사이다와 다르고 겨자와 다르게 톡 쏘는 갓김치를 호박전에 걸쳐서 한입 먹는 맛은 그만이었다. 순식간에 막걸리가 바닥을 보였다. 어제 마신 소맥의 기운을 쫓아버리고 새로운 마을의 새로운 물맛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곧이어 우리는 봄나물비빔밥을 시켰다. 이미 다 아는 머위, 취나물, 고사리, 동치미짠지 따위 별것 들어가지 않은 듯한데도 봄향기가 그득하였다. 주인장의 솜씨가 손님을 끌 만했다. 넓지 않은 식당에 손님이 끊기지 않고 들락거렸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안쪽에는 단체 손님을 받을 방이 있는데, 큰들 배우들이 이날 점심을 여기에서 드셨나 보다.

 

극단 큰들을 따라 공연장을 가다 보면, 그 동네에서 밥도 사 먹지만 다른 것도 사는 일이 많다. 지역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아내가 지갑을 열었다. 장터 안에서 함초환, 보리새싹가루를 샀고 길가에 쪼그리고 앉은 할머니에게서 두릅을 샀다. 두릅은 첫물이라 매우 비쌌다. 내일 반찬이다. 그것 말고도 두어 가지 더 장을 본 듯한데 나하고는 크게 상관 없는 것 같다. 130분을 넘어서자 눈치 빠른 관객들이 공연장 주변을 얼씬거렸고 큰들은 관객들이 앉을 간이의자를 배열하고 돗자리를 깔았다. 나도 의자 몇 개를 날라 주었다. 근처에선 엿장수가 장꾼들을 대상으로 엿팔이에 여념이 없고 봄나들이 나선 청춘 남녀들은 여기저기서 벚꽃을 배경으로 추억의 사진 남기기에 정신이 없다. 조영남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해 보고, 조영남 갤러리에 가서 그가 그렸다는 화투 그림들도 구경했다. 한두 시간 싸돌아다니면서 장똘뱅이 노릇 제대로 했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는 유명하다. 1948년 발표한 작품이다. 광복 후 3년쯤 된 해이다. 대충 검색해 보니, 1967년에 영화로 만들었던가 보다. 1967년이면 내가 태어나던 해이다. 김강윤이라는 분이 감독을 맡았던가 본데, 누군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작품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김동리 원작의 역마살 낀 인간 군상들의 운명을 담담히 그린 문예영화로 짙은 향토색을 바탕으로 한 서린 민중의 애환을 밀도 있게 그렸다’(동아일보 1967. 7. 27.)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2005년에 드라마로 제작돼 방영된 적도 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직 못 찾았다. 2017년에는 역마를 웹 드라마로 제작하기 위해 하동군과 ES그룹이 업무협약을 체결했다는 기사도 나온다. 옥화주막은 이 웹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지은 것인 듯한데, 그것까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지은 것 같아서이다. 다음에 가면 그러한 내용까지 자세히 좀 알아봐야겠다.

 

공연 시작 전이다. 무대감독이 작은 짱돌 몇 개를 주워와서 마당 안쪽에 세워 놓은 담벼락 밑에 갖다 놓는다. 무슨 일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마당이 있고 축담이 있다. 축담 아랫부분에 빈틈이 생겼다. 공연을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차례 하다 보니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마모되었거나 부러진 것이다. 무대 세트나 소품은 때로 망가지기도 할 테니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극단 큰들이 누군가? 연출가는 그것을 발견하여 어찌할 것인가 물었을 것이고, 무대감독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변에서 돌멩이를 주워와서 살짝 가려놓는 것이었다. 섬세함. 세심함. 디테일의 힘. 관객들에게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진정성 있는 작품을 보여주려는 그들의 정신, 배울 점이다. 큰들 마당극 공연을 보면서 전혀 예상하지 않은 엉뚱한 곳에서 감동받곤 하는데 이날 본 것도 그런 경우이다.

 


드디어 오후 2시가 되었다. 관객들이 빼곡이 모여든 가운데 공연이 시작됐다. 줄거리는 익히 아는 바와 같다. 체 장수 노인은 젊은 시절 떠돌이 광대였는데 어느날 한 여자와 풋사랑에 빠졌다. 남자는 떠났고 여자는 딸을 낳았다. 그 딸이 옥화이다. 옥화는 또 어쩌다가 스님과 사랑에 빠졌다. 스님은 떠났고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은 성기다. 옥화는 자기 집안 남자들이 역마살이 낀 것으로 알고 성기를 절에 의탁하여 살을 다스리려 한다. 그렇게 옥화는 화개장터에서 옥화주막을 차려놓고 밥을 팔고 술을 빚는다.

 

어느날 늙은 체 장수가 열여섯 살 딸을 데리고 나타난다. 그 딸 이름은 계연이다. 성기와 계연은 눈이 맞게 된다. 옥화는 계연이 자기의 아들 성기와 함께 살게 되면 성기의 역마살도 누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은근히 둘의 사랑을 기대한다. 과연 어머니의 뜻대로 되어 간다. 하지만 체 장수 노인은 삼십몇 년 전 옥화를 낳게 하고 떠나버린 그 남자였으니, 체 장수는 옥화의 아버지이고 계연은 옥화에게 배다른 동생이다. 성기에게는 체 장수가 외할아버지이고 계연은 이모가 되는 셈이다. 운명의 장난도 이 정도면 얄궂다는 말로 얼버무릴 정도가 아니다. 시쳇말로 하자면 막장 드라마에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이 고스란히 담겼다. 웃지도 못한다.

 

소설에서는 이 간단하고 어처구니 없는 얄궂은 운명의 장난을 섬세하게 설명하고 묘사한다. 향토색 짙다는 말은 소설에 나오는 낱말과 문장 덕분이다. 백과사전 들에서는 김동리의 역마에 대해 역마는 역마살로 표상되는 한국인의 운명관이 인간 삶의 질서를 어떻게 형성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역마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끝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운명을 뜻하는데 이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운명의 힘이다. 아들 성기의 역마살을 없애기 위해 옥화가 보여주는 노력은 운명의 힘 앞에서 좌절되고 결국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순리이고 구원이라는 의미의 주제를 나타낸다.”라고 써놓았다.

 

하지만 마당극 <역마>는 이 작품을 풍자와 해학, 익살로 그려낸다. 한없이 진지하다가도 금세 웃음폭탄을 날리고, 그러다가 관객의 눈물을 자극하기도 한다. 원작에 없는 다양한 극적 요소를 집어넣어 마당극 특유의 새로운 작품으로 해석해 내는 것이다. 노래와 춤이 곁들여지고 관객과의 소통도 빼놓지 않는다. 하동군 지원으로 만들고 하동에서 공연하는 만큼 하동 자랑도 곳곳에 숨겨 놓았다.

 



주제곡으로 나오는 <봄날은 간다>는 다양하게 변주된다. 맨 처음 옥화가 평상의 먼지를 닦으면서 부르는 노래가 이 노래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한국인의 전통적 정서를 건드린다. 1954년 만들어진 이 노래가사는 <역마>에 흐르는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의 정서가 그대로 녹아 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라거나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는 후렴은 성기와 계연의 사랑과 이별에 꼭 들어맞는다. 3절은 더욱 그렇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처음 <봄날은 간다>는 서럽고 애잔하게 울려퍼진다. 맨 마지막에는 단조곡으로 시작하여 경쾌한 트롯으로 맺는다.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희망차게 새 출발하겠다는 다짐으로 읽힌다. 계연이 떠난 뒤 그녀가 좋아하던 엿장수로 변신한 성기가 길 떠나면서 부르는 노래기이도 하다. <봄날은 간다>의 가사와 정서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이 마당극을 받아들이는 데 하늘과 땅만큼 다르게 해석할 것이라고 본다. 탁월한 선곡이다. 앞으로 한동안은 <봄날은 간다>가 귓가에 쟁쟁거릴 것이다. 큰들 때문이다.

 

<낭랑 18>라는 노래도 나온다. 계연이 할아버지 같은 아버지 체 장수와 함께 옥화주막에 등장할 때다. 계연은 극중에서는 16살로 나온다. 이 노래는 1940년대에 만들어졌다. 계연이 처음 등장할 때 이 노래를 부르는 건 의미심장하다. “저고리 고름 말아쥐고서 누구를 기다리나 낭랑 18/ 버들잎 지는 앞개울에서 소쩍새 울기만을 기다립니다.” 여리디 여린 소녀의 감성이 잘 드러난다. “소쩍꿍새가 울기만 하면 떠나간 그리운 님 오신댔어요라는 가사도 이 극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16년 동안 아버지를 따라 조선 팔도를 유랑한 계연이 16살이나 되었으니 사랑을 기다리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 곧이어 만나게 될 성기와 곧장 사랑에 빠질 것임을 예고하는 것 같다. 노래 한 곡에도 복선이 있고 상징이 있는 것 같다. “오신댔어요를 몇 번 되풀이하는 건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 아닐까.

 


화개장터에서 지리산속으로 10리를 들어가면 쌍계사가 있다. 소설에서는 옥화가 성기의 역마살을 다스리기 위해 절에다 성기를 의탁한다. 그러자니 자연스럽게 마당극에서도 스님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이 스님이 관객을 웃긴다.

 

성기를 거두고 있는 스님은 나무등걸에 걸려 넘어지고서는 여기에 왜 나무가 있...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주문을 왼다. 이 장면은 초반부와 후반부에 두 번 반복된다.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장면을 연출한 스님의 외마디 비명과 독경 소리는 관객의 큰 웃음을 자아낸다. 이 스님은 성기와 계연이 사랑에 빠지자 성기더러 정신차리라고 훈계한다. “성기 네 이놈! 또 역마살이 도졌구나라며 목소리를 높인 뒤 끓어오르는 역마살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려다가 계연의 얼굴을 슬쩍 보고는 잘 다스릴 수가 없겠구나!”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러고 나서는 나무 사춘기 보살”이라더니 서엉~기는 좋겠~구나! 여자 만나 연애~하고!라며 2분의 2박자로 목탁을 친다.

 

또 한 스님이 등장한다. 옥화와 사랑에 빠졌다가 그녀를 배신하고 도망간 스님이다. 이 스님은 옷소매를 붙드는 옥화에게 소승은 머무는 인생이 아니외다. 나무 역마살 보살.이라며 목탁을 두드린다. “이리 가실 거면 어제는 와 그랬십니꺼?”라고 따지는 옥화에게 어제라니요? 우리에게는 어제도 내일도 없습니다. 오직 오늘만 있을 뿐! 나무 투데이 보살.이라고 능청을 떤다. 어젯밤에 얌전히 집에 있는 저를 찾아와 손목을 잡고 저 뒷산 물레방앗간...”이라고 한걸음 더 나아가자 나무 십구금 보살.이라고 외친다. 별별 보살이 다 있다. 끝이 아니다. 그렇게 된 사정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자 옥화가 뭔 소립니꺼?”라고 하니 나무 개소리 보살.이라고 달아난다. 옥화가 임신한 듯 보이자 나몰라라 하며 꽁무니를 내뺀다. “나무 줄행랑 보살!”을 외면서. 스님 복장을 한 배우들의 대사 몇 마디는 극의 흐름과는 직접 관계 없지만, 마당극을 찰지고 재미있게 하는 요소이고, 간혹 박장대소하게 하는 톡 쏘는 양념 같다.

 


성기가 화개장터에서 이야기꾼에 넋이 빠졌다. 도포에 갓을 쓴 이야기꾼이 홍길동전을 들고 등장했다. 이야기를 해야 하니 입부터 푼다. 입술을 부르르르 떨고, 아에이오우를 외고, 간장공장 공장장과 된장공장 공장장을 외고, 깐 콩깍지와 안 깐 콩깍지를 들먹인 뒤 홍길동전을 실연하듯이 구연하는데 걸작이다. 무성영화의 변사를 보는 듯하다. 홍길동전 한 대목을 읽어주는데 역마살이 도져 피가 끓는 성기를 추동하기에 충분하다. 그 이야기꾼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지금 <역마>를 보고 있는지 <홍길동전>을 보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이다.

 

성기는 역마살이 낀 사람이다. 그런 운명을 타고 났다. “여기는 다 똑같다. 매일매일 똑같은 풍경들이다. 여기는 현실만 있고 미래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저 너머 가면 미래가 있나?”라고 묻자 그건 모른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와 갈라 카는데?”라고 묻자 아무것도 없는 데서 살기보다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데서 살고 싶다.고 대꾸한다. “나는 갑갑하다. 갑갑하다. 갑갑하다.를 몇 번이나 외면서 매일매일이 똑같은 일상이라고!!”라고 절규하며 현실세계에서 탈출하고 싶어한다. 성기의 마음은 오늘날 10, 20대들의 외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구례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섬진강 건너편에는 무엇이 살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성기의 마음과 태도는, 비록 극중에서는 역마살이라는 말로 억제하고 감추어야 할 그 무엇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라며 선배 세대가 후배 세대에게 해 주어야 할 말은 아닐까 싶다.

 


<역마>는 성기와 계연이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다. 성기가 태어나게 된 경위가 나오고 계연이 나타나게 된 사연이 풀어진다. 장소가 장터이니 장꾼들이 나오고 그들의 나날살이가 언급된다. 품바타령도 나온다. 주막엔 한번쯤 등장하기 쉬운 왈패도 나온다. 성기와 계연이 만나다 보니, 성기의 어머니와 계연의 아버지가 만나게 된다. 핏줄로 얽히고설킨 운명의 실타래가 풀어헤쳐진다. 결론은 역마살을 막지 못했지만 그들은 새로운 희망을 키워나간다. 그들이 부르는 경쾌하고 산뜻한 노래를 보면서 해석할 수 있다. 처음 등장하는 장꾼과 맨 뒤에 등장하는 장꾼의 말과 행동이 수미일관이다. <봄날은 간다>가 처음과 끝을 열어주고 닫아주는 구조도 쌍둥이 같다. 잘 만든 작품이다.

 

마당극 <역마>를 보는 시간 내내 행복했다. 길지 않은 한 편의 소설이 한 시간 짜리 마당극으로 재탄생한 멋진 장면을 보니 행복하다. 하나하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정말 큰들이니까 해낼 수 있는 명장면, 큰들만이 할 수 있는 표현, 큰들 마당극에서는 빠지지 않는 감초같은 장면들, 큰들 마당극을 보고 또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적인 장면이 무수히 많다. 오랜 연습과 탄탄한 팀워크가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연출과 연기와 음악과 춤들이 어우러졌다. 그런 것을 편안히 앉아서 감상하는 것은 행복이요 즐거움이요 영광이다. 제법 추울 줄 알았던 날씨는 춥지 않았다. 일기예보가 잘 맞았다. 마당극이 끝났다.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배우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큰들과 함께한 일기장에 또다른 하나의 사진이 얹혀졌다.


 

숙제가 생겼다. 집으로 어떻게 돌아오느냐 하는 것이다. 화개장터에서 하동 방향으로 가는 차들은 오도가도 못하고 섰다. 남도대교를 먼저 건넌 뒤 광양 방향으로 가다가 고속도로를 타면 되지 않을까 했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강 건너 길에도 차들은 꼼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급히 차를 돌려 오히려 반대방향이라고 할 구례 쪽으로 달렸다. 구례로 가다 보면 재종형이 섬진강가에 천막을 쳐 놓고 재첩국을 팔고 있으니, 한 통만 사면 사나흘 해장국으로는 충분할 듯해서이다. 하지만 아서라 말아라. 구례에서 하동 방향으로 가는 찻길은 빈 틈 하나 없이 빽빽이 들어찬 차들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모를 지경이었다. 반대 방향은 매우 널널하여 빠른 속도로 차를 달려야만 했다. 재종형의 재첩국 가게 앞에서 차를 멈추려고 했으나 곧 포기했다. 차를 세웠다간 난리가 날 것 같아서이다. 우리는 화엄사를 지나 천은사를 지나 성삼재를 넘어 달궁을 거쳐 마천을 거쳐 유림을 지나 생초에서 고속도로를 탔다. 성삼재에서 달궁으로 내려올 땐 먹장구름 하늘에서 우박인지 싸락눈인지 모를 것이 차 유리를 때렸다. 날씨는 제법 드라마틱했다. 아내는 자다가 깨다가 했고 나는 피곤함이라고는 1도 없이 달릴 수 있었다. 함양 유림에서 그 유명한 팔선주도 몇 병 샀다. 화요일 제삿날 쓸 요량이다.

 

지난밤 마신 술이 미처 깨기도 전에 하동으로 갔다. 하루 종일 바깥에서 찬 바람 쐬며 싸돌아다녔다. 마당극 끝나고 대충 인사하고 330분쯤 출발하여 진주에 오니 6시다. 피곤하지 아니할 수 없는 강행군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도 1도 피곤하지 않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아침에 갈 때는 마당극을, 그것도 <역마>를 처음으로 본다는 설렘에 피곤할 수 없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는 온 산과 들에 피어난 봄꽃들의 교향곡을 보고 듣느라 피곤할 새가 없었다. 화개장터에서는 눈요깃거리가 많았는 데다 옥화주막에서 먹은 비빔밥과 호박전과 막걸리 한 잔이 피로를 풀었다. 마당극 보는 한 시간 동안 에너지를 보충했다.

 

아내는 마당극을 사진으로 찍었다. 아내는, 성기가 어머니로부터 물벼락 맞는 장면을 신통방통하게 정확하게 포착하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마당극 마니아 아내로서 만점이다. 나는 마당극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동영상이다. 화개장터에서 출발하면서 나는 꾀를 냈다. 돌아오는 시간이 적어도 두세 시간은 될 터이므로 차 안에서 마당극을 틀어놓고 라디오로 듣는 셈치고 즐기면서 오자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개장터에서 진주까지 2시간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역마>를 두 번이나 들었다. 이만한 피로해소제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야겠지.

 

아참, 그리고 역마는 331일 일요일 오후 2시에 한번 더 공연한다. 그러고는 112일 토요일과 3일 일요일 다시 공연한다. 그사이에 한두 번 더 공연해 주면 좋겠는데, 그건 지금으로서는 모를 일이다. 그래서 감히 말한다. 혹시 <역마>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얼마나 웃기는지, 얼마나 감동적인지,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관람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31일 공연을 놓치지 말 일이다. 오늘처럼 차가 막힐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아침 일찍 서두르는 게 좋을 것이다. 329일부터 31일까지는 화개장터벚꽃축제추진위원회꽃향기와 녹차향이 어우러지는 화개동천-24회 화개장터 벚꽃축제를 열고 있는 덕분에 보통 때보다 훨씬 더 막히고 밀리는 것이다.

 

2019. 3. 30.

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