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2일 돌아가신 아버지는 1936년생이다. 어머니와 1961년 결혼하셨다. 군대 있다가 휴가 나오라고 해서 나왔더니 결혼시키더라고 했다. 큰형이 63년생, 작은형이 65년생, 나는 67년생, 동생은 70년생이다. 광복되던 해에 아버지는 9살이었고 한국전쟁 때 14살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 12살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할머니는 평생 수절하며 큰아버지와 아버지를 키워냈다. 덕분에 큰아버지는 7남매를, 아버지는 4형제를 낳아 키울 수 있었다. 전쟁 후 4.19도 있었고 5.16도 있었다. 새마을운동도 있었다. 12.12, 5.18 같은 일도 있었다. 그 뒤로도 우리 현대사는 굽이치는 물결이었다.
아버지는 격동의 현대사를 살았지만, 겪지는 않았다. 신문도, 텔레비전도 없는 시골에서 라디오를 통해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알았다. 박정희가 부하 총에 맞아 죽은 것은 진주로 이사와 주인집 아래채 세 얻어 살면서 주워 놓은 중고 텔레비전을 보고 알았다. 그해 나는 봉래초등학교 6학년으로 전학 와 있었다.
우일문의 《시시한 역사, 아버지》(유리창)를 읽었다. 책 나오기 전부터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진주문고에 주문을 넣었는데 토요일 오후에 도착했다. 350쪽 두꺼운 책을 이틀만에 다 읽는 건 나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일요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아내와 바깥 나들이도 했으니 책 읽은 시간은 길지 않은 셈이다. 이 책 읽을 사람들의 연배를 생각하여 활자를 크게 했다는 뒷말을 듣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책장이 빨리 넘어간 건 아니다. 꼭 있을 법한 아버지 또는 가족 사진 한 장 없다.
우리 아버지보다 4년 일찍 태어나 한국전쟁 때 18살 고등학생이던 게 죄였을까. 전쟁의 후방 중 후방이던 경상남도 진주(옛 진양군)에 태어난 아버지보다는 훨씬 전장에 가까이 살았던 것이 까닭이었을까. 초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아버지보다 더 큰 공부를 했던 게 작용한 탓이었을까. 우일문의 아버지는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불행한 삶을 살았다. 2010년 8월 78살의 연세로 돌아가시기까지 사연 많고 곡절 많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갔다. 그 불행의 씨앗은 한국전쟁이다.
작가의 아버지가 경기상고 1학년 때 6.25가 터졌다. 형제 다섯 가운데 한 명이 인민의용군으로 가야 했다. 큰당숙이 인민위원장이어서 큰 사달을 겪지 않았지만 날로 전황이 불리해진 북한군으로서는 한 명이라도 더 필요했던 것이다.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장남은 장남이라서 안 되고, 누구는 어째서 안 되고, 하는 식으로 짚어나가다 보니 18살 고등학생 아버지가 낙점된 것이다. 그러나 총알 한 발 싸보지도 못한 채 포로가 되어 거제 포로수용소에 이송됐다. 1년 5개월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안 봐도 안다. 1952년 ‘민간인 억류자’로 분류돼 풀려났다. 자진 입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감안됐을 것이다.
전쟁 후 다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아버지는 갈 곳이 없었다. 한국전쟁 때 붙은 ‘민간인 억류자’ 꼬리표가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공무원 시험 보러 갔더니 누군가가 부역자 꼬리표를 떼려면 군복무를 하라고 했다. 자원입대하여 36개월 만기 제대했다. 하지만 ‘부역자’라는 국가가 붙여준 꼬리표는 없어지지 않았다. 당시 경기상고 졸업하면 은행원 취업은 따논 당상이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고향에서 농사일밖에 할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평생 화가 나 있었다. 글을 쓴 작가를 비롯한 자식들은 왜 아버지가 늘 화 나 있는지, 왜 적성에 맞지도 않은 농사를 짓고 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사촌형(큰당숙)은 한국전쟁 와중에 인민위원장을 했는데, 형세가 바뀌어 국군이 동네를 접수했을 때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1950년 10월이었다. 다른 형제는 불발 수류탄을 건드렸다가 폭사했다. 1951년 1월이다. 태어난 지 40일 된 딸아이와 젊은 아내가 남았다. 한국전쟁의 커다란 비극이 이 집안에 압축돼 도드라졌다. 청상의 젊은 며느리는 시부모의 배려로 새 삶을 찾아갔고, 혼자 남겨진 어린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 곁에서 자랐다. 그녀에겐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다.
작가에게는 사촌누나가 되는 이 딸아이는 나중에 자라 서울에서 잘나가는 회사에 취직하고 결혼한다. “작은아버지, 작은엄마 내가 업고 다녀도 모자랄 판인데.”라는 말은, 그 시절 그렇고 그런 역사를 간직한 집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한동안 눈길을 붙든다. 이 집안 역사는 곧 우리 현대사이다. 어린 것을 두고 떠나며 울고불고 하는 장면은 영화에서도 더러 보아왔다. 책을 읽으면서 부지불식간에 그 사촌누나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마음이 생긴다.
아버지의 인생을 좇아가다 보면,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만난다. 국가의 잘못으로 전쟁이 일어났고 그 국민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국가가, 비극의 한복판에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이쪽 저쪽에 포함돼야 했던 국민을 적으로 몰아가면 어쩌자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전쟁 당시에는 이성이 마비되어 죽기 아니면 살기였으니 그랬다고 쳐도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평생동안 꼬리표를 붙여 헌짐짝 취급하듯, 원수 대하듯 할 것까지는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군다나 자진하여 입대한 것도 아니고, 그 꼬리표를 지우기 위해 다시 국군에 입대하여 36개월을 복무하였는데도 말이다.
《시시한 역사, 아버지》를 읽다 보면, 우리 사회에 엄마부대, 태극기부대라는 게 온존하는 이유를 알 만도 하다. 걸핏하면 국민을 좌우로 나누고 그중 한쪽만 자기편으로 만들어 표를 얻는 정치인이 아직도 활개치는 까닭도 어렴풋이 알 만하다. 전쟁 끝난 지가 언제인데, 온 세상이 일곱 번도 더 바뀔 만한 세월이 흘렀는데도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말만 덧붙이면 그 어떤 논리와 합리와 이성도 무시되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는 더럽고 치사한 이유도 짐작하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비극의 씨앗은 우연하고도 짧은 가족 회의에서 비롯했다 할 것이다. 가족들은 서로 슬픔을 감싸안으며 위로하고 살아간다. 형제들은 제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무게만큼 인생을 살고 스스로 감당해낼 만한 크기만큼 삶을 개척해나간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체 가족에게 들씌워질 역사의 무게는 오로지 아버지 한 분만 짊어지고 간다. 전쟁 와중에 유명을 달리한 형제 둘과 함께 셋이서 감당한다.
《시시한 역사, 아버지》가 빨리 읽히는 것은,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행장을 썼고 다시금 아버지의 긴 인생을 추적한 눈 밝은 아들 저자의 개인 이야기가 함께 들어 있어서이다. 나의 큰형과 갑장인 1963년생 저자 또한 시시한 자신의 인생을 시시하지 않게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으며 살아갈 듯하다.
대학 학번으로는 82학번쯤 될 저자는 국문학과 학생으로서, 학보사 기자로서, 운동권으로서 여러 가지 삶을 산다. 그 시절엔 다 그랬다는 말로 치부될 정도는 넘는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비켜가지 않고 외면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군대서도 그랬다. 완전군장 매고 뺑뺑이를 얼마나 돌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저자는 모난 돌처럼 살았던 듯하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비슷한 시기에 군대를 갔던 사람이라면 더욱 빠져들게 하는 요소가 가득하다.
사회생활은 거의 소설가, 출판 기획자, 편집자 등 책을 쓰거나 만드는 곳에서 일했다. 이 저자가 만든 책 한두 권쯤은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현재 출판사 ‘유리창’의 대표이다. 저자의 아버지가 20~30대 청춘을 땅에 허리 박고 억울함 달래며 살아갔다면, 저자는 비슷한 시기를 '시시한' 출판사 언저리를 넘나들며 단련되고 세련되어져 간 듯하다.
나는 이 출판사에서 낸 책을 몇 권 사 읽었고, 읽고 있다. 재작년쯤인가. <오마이뉴스> 어느 기사에서 유리창이라는 출판사를 알게 됐고 《시시한 역사, 아버지》를 쓴 저자를 알게 되어 페이스북에서 친구가 되었다. 나이로 치면 큰형뻘이지만 거기선 다 친구다. 친구의 짧은 글, 강한 글, 뾰족한 글, 시시한 글을 읽으면서 공감했다. 그래서 이 책을 더욱 기다렸다.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고마운 일이다.
저자의 글은 서슴없다. 에돌아갈 법한 장면에서도 정곡을 찌른다. 주절주절 하소연하고 변명할 듯한 장면에서도 담담하게 몇 마디 하고 만다. 큰당숙이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 죽은 장면은 이렇다. “큰당숙은 잡혀가지도 않았고 도망가지도 못했다. 저녁에 누가 불러 나갔다가 밤새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른 아침에 시신으로 발견됐다. 몽둥이찜질을 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1950년 10월 22일에 일어난 일이다.”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를 아이 몰래 돌려보내는 이야기는 참 많이 아리다. 이래저래 됐다고 설명해 놓고는 한마디 덧붙인다. “며느리팔자는 고쳐줬지만 생모를 잃은 사촌누나의 한이 될 것이라고는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다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담백하게 한마디 논평하는데, 참았던 아린 가슴이 후벼파지는 것 같아 끝내 눈물을 떨구게 한다.
저자는 말한다. “아버지는 36개월을 꼬박 채우고 제대했다. 제대하자마자 취직자리를 알아봤지만 군대생활이 부역자 꼬리표를 떼어주지 않았다. 군역 의무가 없던 조선시대 노비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면 면천했을 뿐만 아니라 벼슬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국가는 억울하게 끌려간 ‘민간인’이라고 분명히 말했으면서도 부역자 꼬리를 떼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시 국가를 위해 성실하게 복무했음에도 몰라라 했다. 원칙도 상식도 없는 국가의 개돼지에 불과한 아버지는 다시 절망했고 좌절했다. 말수가 줄었고 조금 우울해졌으며 술이 늘었다.”(265쪽)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썼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생애가 모여 역사가 된다. 그러나 역사에서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생애는 지워진다. 국민을 돌봐야 할 국가의 의무도 방기된다. 시시한 삶이어서 그렇다. 시시한 아버지 생애가 아프다.”(서문)
시시하지만 시시할 수 없는 아버지 역사를 썼다. 시시한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결코 가볍지 않은 국가의 책임을 환기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들여다보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억울한 복역 아닌 복역과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한 군복무마저 모른 척 뭉개버리는 국가라면 도대체 누가 국가를 위해 희생하겠는가 묻는 것이다. 결코 시시하지 않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질문을 저자는 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는 등잔불 아래 공책을 펴 놓고 가나다라를 가르쳤고 한자를 가르쳤다. 학교 문턱을 밟은 적 없고 번듯한 회사를 다닌 적 없지만 자식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는 아셨다. 1967년생 아들이 1974년 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할 일을 다하셨다. 그 후 대학 졸업 때까지 학비를 늦춘 적 한번도 없다. 큰 돈을 벌지 않았지만 비굴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자주 싸웠지만 바깥으로 나돌지 않았다. 못 배운 게 한이었지만 당신 12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크게 원망하지는 않으셨다. 나에게 가르친 한글과 한자는 그 할아버지께 배운 것이다. 시골 살 때는 농사로 가족을 건사하셨고 진주로 이사하여서는 ‘노가다’로 생계를 이었다. 시시하다 못해 보잘것없는 삶이셨다. 하지만 나에게는 위대하고 거룩한 삶이다. 우리 가족에게는 부정할 수 없이 높은 산이고 거역할 수 없는 깊은 강이셨다. 따뜻한 품이었고 높은 언덕이었다. 아버지 같은 삶들을 모아 이어 붙이면 역사의 강물이 될 것이고 아버지 같은 삶도 쌓아 놓으면 인생철학이 될 것인데, 그러하지 못한 불효가 죄송할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느낀다.
《시시한 역사, 아버지》가 널리 읽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곳곳에 묻혀 있는 시시한 아버지들이 비로소 깨어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시시한 줄로만 알았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사랑과 목숨이 결코 시시하지 않다는 것을 국가가 깨닫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국가의 조롱과 멸시에 모욕과 수치를 느꼈지만 평생 내색하지 않’은 저자의 아버지 같은 서글프고 안타까운 사람이 나오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2019. 1. 13.
시윤
'책 읽는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구호 문학평론집 『문학과 세상을 위한 성찰과 지향』 (0) | 2019.05.22 |
---|---|
정신적, 정서적으로 미성숙의 아픔을 겪는 ‘어른’들에게 (0) | 2019.01.18 |
인생역경대학 (0) | 2016.03.19 |
소소책방에 가다 (0) | 2016.02.10 |
김경집을 만나다 (0) | 2016.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