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가방 하나 사려고 옥션에 들어갔다. 하나하나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천만 개 가량 되는 가방이 나왔다. 눈알이 뱅뱅 돌 지경이다. 크기와 성능, 가격 따위를 조심스레 살펴보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사무실에서 흔히 쓰는 에이포(A4) 종이가 들어가는 크기면 딱 좋겠는데 맞춤한 걸 찾기 어려웠다. 선택 장애가 생겼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걸 골랐다. 기분이 좋았다. 모양은 똑같은데 색깔이 다른 두 가지가 있었다. 어느 것을 고를까 하다가 결국은 짙은 녹색을 골랐다.
<다크브라운 색깔 가방>
<다크그린 색깔 가방>
내가 보기엔 짙은 녹색인데 상품 밑에 적힌 글자는 ‘다크그린’이라고 씌어 있었다. 다른 색 하나는 ‘다크브라운’이었다. ‘다크’는 ‘검은’이라는 뜻이고 ‘그린’은 ‘초록’이라는 뜻이니 ‘짙은 초록색’, ‘어두운 초록색’, ‘검은 초록색’이라고 하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하지 않았다. 예전 성질 같았으면 이런 작은 것 하나를 시비 걸어 사는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이 날은 봐 주기로 했다. 하지만 돌아서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고개가 저절로 갸웃거려졌다. ‘그럼 브라운은 어떤 색이지?’
‘브라운’이라는 색 이름은 어떻게 나왔을까. 가방 색깔을 보고 있으니 ‘아, 저렇게 생긴 색깔을 브라운이라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왜 브라운이라고 할까’ 하는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영어 ‘브라운’(brown)을 찾아보았다. ‘갈색’이라고 나온다. ‘검은빛을 띤 주황색이나 갈색, 고동색 따위를 이르는 말’이라고도 나온다. 그럼 ‘갈색’은 뭐지? ‘검은빛을 띤 주황색’이다. 한자로는 ‘褐色’ 이렇게 쓴다. ‘褐’은 털옷이라는 뜻인데 이게 왜 색깔이름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이어 가 본다. 그럼 ‘주황색’은 뭐지? ‘빨강과 노랑의 중간 색깔’이다. 한자로는 ‘朱黃色’ 이렇게 쓴다. 붉을 주, 누를 황이다. 빨강과 노랑은 무엇인지 잘 안다. 빨강 물감과 노랑 물감을 섞으면 주황색이 된다. 그 주황색에다 검정 물감을 조금 섞으면, 그것이 갈색이다. 참 어렵다. 세상 어렵게 산다. 이런 걸 뒤져보고 있자니 속이 끓는다.
‘네이비’라는 색깔이 있다. 해군을 뜻하는 ‘네이비’(navy)에서 왔을까. 해군 군복은 보통 ‘흰색’과 ‘남색’ 두 종류인데 그 가운데 ‘남색’이 ‘네이비’인 듯하다. 남색(藍色)은 파란색 계열의 색상이다. 파란색과 보라색의 명도를 낮게 한 것이다. 왜 ‘남색’이라고 할까. ‘藍’은 ‘쪽’이다. ‘쪽’은 ‘마디풀과의 한해살이풀’이다. 이 ‘쪽’을 잘 아는 사람은 남색을 대번에 알겠지만, 잘 모르는 사람은 한참 헷갈릴 것이다. 그럼 남색을 네이비라고 하면 잘 알아들을까. ‘청출어람’(靑出於藍)은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인데, 보통은 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오렌지색’도 있다. 오렌지는 안다. 귤 또는 밀감과 비슷한 과일 아닌가. 외국 과일을 많이 수입하는 나라인 덕분에 오렌지색은 어떤 것인지 잘 안다. 그럼 오렌지를 본격적으로 수입하여 먹기 전에 ‘오렌지색’이라고 했더라면 잘 알아들었을까. ‘오렌지색’은 ‘귤이나 등자 껍질의 빛깔과 같이 붉은빛을 약간 띤 노란 빛깔’이란다. 그럼 ‘귤색’이라고 해도 될 것을 굳이 오렌지색이라고 할 건 뭔가. ‘등자’는 또 뭔가. ‘운향과에 속한 상록 활엽 교목’을 등자나무라고 하고 그 나무의 열매를 등자라고 한단다. 귤과 사촌 또는 육촌쯤 된다. 아무튼 오렌지색을 귤색이라고도 하고 등자색이라고도 한다. 참 어렵다.
‘한국전통색상표(90색)’라는 게 있다. 아흔 개 색깔 이름을 표시해 놓았다. 흑색, 백색, 회색, 적색, 홍색, 갈색, 호박색, 주색, 주홍색, 진홍색, 선홍색, 분홍색, 진분홍색, 연분홍색, 청색, 담청색, 감색, 남색, 군청색, 녹색, 연두색, 청록색, 초록색, 흑록색, 옥색, 황색, 자주색, 보라색, 포도색, 청자색 따위는 한두 번씩 들어 보고 써 본 말이다. 정확하게 구별해 내지는 못하겠지만 어렴풋이나마 색깔을 떠올릴 만하다.
구색, 치색, 연지회색, 설백색, 유백색, 지백색, 소색, 적토색, 휴색, 추향색, 욱색, 담주색, 연지색, 훈색, 장단색, 석간주색, 흑홍색, 벽색, 천청색, 취람색, 양람색, 벽청색, 청현색, 연람색, 벽람색, 숙람색, 명록색, 유록색, 유청색, 춘유록색, 비색, 삼청색, 뇌록색, 양록색, 하엽색 따위 색깔은 처음 듣는 듯하다. 이 밖에도 많다. 여러 가지 색깔을 한눈에 직접 보니 그 미세한 차이를 알겠는데, 만약 따로 떼어 놓으면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싶다. 저 이름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써먹을 수 있을까 싶다.
여기에 나오는 이름들은 죄다 한자어이다. 흰색이라고 해도 될 것을 백색이라고 하고 노란색이라고 해도 될 것을 황색이라고 하고 빨강색이라고 해도 될 것을 적색이라고 하고 파란색이라고 해도 될 것을 청색이라고 한다. 이 것들 말고 대부분은 한자어로 쓸 수밖에 없겠지 싶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자어로만 쓰게 된 게 아닐까.
색깔 이름을 어떻게 지으면 좋을까. 첫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주변에 잘 보이는 사물에 빗대어 짓는 것이다. 포도색이라고 하면 누구든 얼른 알아들을 것이다. 청포도색이라는 색깔도 있음 직하다. 귤색이라고 하면 귤을 한번이라도 먹어본 사람이라면 대번에 알아볼 것이다. 개나리색이라고 하면 이른 봄에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노랑 개나리를 떠올릴 것이다. 하늘색이라고 하면 대부분 파란 가을하늘을 떠올릴 것이다.
‘살색’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쓰지 않는다. 살색은 말 그대로 인간의 살갗색을 부르는 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과 함께 황인종의 살갗색을 부르는 말로 사용해 왔다. 그러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살색’이라는 낱말이 인종 차별적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자 한국기술표준원의 관용색에서 제외했다. 잘한 일이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빨강, 파랑, 노랑 세 가지 색깔을 가지고 가지치기를 하는 방법이다. 그러자니 빨강은 주(朱) 또는 홍(紅) 또는 적(赤)으로 쓰고, 파랑은 청(靑)으로 쓰고, 노랑은 황(黃)으로 쓰게 된다. 나뭇잎 색깔은 녹(綠)으로 쓴다. 검은색은 흑(黑)으로 쓰고 흰색은 백(白)으로 쓴다. 이런 한자어를 가지고 이리저리 짜맞춰 나가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 말고도 다르게 붙이는 색깔 이름이 있는 듯한데 다 알지는 못하겠다. 한국전통색상표라는 데 나오는 색깔 이름들도 다 알지 못하겠다. 하나하나 사전을 찾아보면 통 모르지는 않겠는데 그럴 필요를 못 느끼겠다. 사람의 눈이 구분해 낼 수 있는 만큼, 나날살이에서 쓰는 만큼만 알고 있으면 될 듯하다. 정확하게 측정하긴 어렵겠지만 아흔 가지 색깔 가운데 눈으로 구분해 내고 실제 나날살이에서 쓰는 색깔은 어림잡아 쉰 개쯤 되지 않을까. 실제로는 미세한 차이를 구분해 낼 수 있지만, 가령 자색, 자주색, 보라색을 애써 구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유록색과 유청색과 초록색은 분명 다른 것이고 실제 다르게 보이지만 이들을 따로따로 떼어 놓으면 구별할 수 있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우리말 색깔 이름은 쉽지 않다. 어렵다. 하지만 기본을 이루는 색깔을 가리키는 한자 몇 개만 알면 따라갈 수 있다. 외국에서 들어온 색깔 이름도 그렇게 몇 개 단어만 알면 얼추 유추해 낼 수 있을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가능한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도 ‘텔레비전 홈쇼핑’이나 ‘패션 잡지’ 같은 걸 보면 난생 처음 보고 듣는 영어 색깔 이름이 넘쳐난다. 그 홈쇼핑을 보고 패션 잡지를 읽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다 구분해서 이해하고 있을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빨강보다 레드가 쉽고 파랑보다 블루가 쉽고 노랑보다 옐로가 쉬운가. 갈색보다 브라운이 쉽고 녹색보다 그린이 쉽고 보라색보다 퍼펄이 더 쉬운가. 회색보다 그레이가 쉽고 검은색보다 블랙이 쉽고 흰색보다 화이트가 쉬운가. 다르게도 물어보고 싶다. 흰색과 화이트는 같은 색인가 다른 색인가. 검은색과 블랙은 같은 색인가 다른 색인가. 회색과 그레이는 같은 색인가 다른 색인가. 같은 색인 줄 알면서도 영어 이름을 갖다 쓰고 있었다면 참 고약한 일이고, 만약 다른 색이라고 생각하며 쓰고 있다면 이건 병원에 가야 할 문제다.
2018.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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