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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과 글을 보는 내 눈

먹고 튄 사람과 튀지 못하는 사람

by 이우기, yiwoogi 2017. 12. 12.

한 국회의원이 있었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아니다. 국회의원 그만둔 뒤 사망했다. 이름은 밝히기 싫다. 그냥 정 아무개라고 해 두자. 경남 서부지역 어느 시에서 국회의원을 몇 번 해먹었다. 어느해 정 아무개는 후원회를 개최했다. 곧 다가올 선거를 의식한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후원금을 많이 모았을 것이다. 그를 통하여 지역의 이런저런 민원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 그에게서 단체장, 도 의원, 그 외 각종 기관단체의 장을 낙점 받으려는 사람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눈도장을 찍었다. 후원금으로 얼마를 모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몇 억 원이라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정 아무개는 다음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출마하여 떨어진 게 아니라 아예 출마를 포기했다. 정 아무개를 바라보고 후원금을 내며 기대를 가졌던 많은 사람은 땅을 쳤다. 절망한 사람이 많았다. 그때 언론에서는 정 아무개 의원 먹튀 논란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논란이 아니라 사기라고 써야 했는데 많이 봐 준 것이다.

 

얼마 전 어느 신문이 지령 5000호를 앞두고 독자들로부터 축하와 격려 광고를 모았다. 한 사람이 1만 원 이상 내면 지면에 이름을 새겨 주겠다고 했다. 모든 임직원이 각자 아는 사람으로부터 성원과 응원의 광고를 모았다. 몇 명이 얼마를 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건 알아 봤자 써먹을 데가 없는 일이니까.

 

그 일을 이끈(것으로 짐작되는) 신문사의 한 높은 분이 신문에 글을 실었다. ‘대놓고 독자 응원광고 요청하는 까닭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신문 창간할 때 지인 500여 명을 주주로 모셨다고 밝혔다. 그렇게 그가 모은 주식금액은 5000만 원이 넘었다. 몇 해 뒤 오마이뉴스 대표가 그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사양했다고 고백했다. 그 이유는 그래놓고 제가 떠난다면 그야말로 먹튀 사기꾼이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썼다.


 


먹튀라는 말이 눈에 띈다. 이 말을 한참 음미해 보고 곱씹어 보고 째려 본다. 어떻게 탄생한 말일까. 어느 때 쓰일까. 누가 쓸까. 뜻은 뜻밖에 쉽다. ‘(기만 하)고 튄다는 말 아닌가.

 

뭘 먹었는가. 굳이 말하자면 앞에서 말한 국회의원은 지지자들로부터 후원금을 먹었다. 앞에서 말한 신문사는 독자들로부터 광고비를 먹었다. 먹는 건 죄가 아니다. 그걸 죄라고 하면 이 세상 사람 모두 굶어죽는다. 먹고 난 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값을 해야 한다.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는 자가 후원금을 먹었으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후원하는 사람들의 민원을 들어봐야 하고 그걸 바탕으로 법을 만들어야 한다. 신문사가 독자들로부터 광고비를 먹었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더 열심히 취재, 보도하여 우리 사회를 밝고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

 

먹은 자는 그 값을 해야 한다. 그 값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입을 싹 닦으면 그것을 먹고 튄다고 하는 것이다. 그건 사기라고 해야 한다. 처음부터 의도했다면 중대한 사기죄이다. 어쩌다 보니 정말 어쩔 수 없이 먹은 값을 못하게 되었다면 정상참작은 받을 수 있으나 어쨌든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해야 한다.

 

들머리 사이트 다음에서는 먹튀를 거액의 돈을 벌어들이고 그만큼의 구실은 하지 않은 채 수익만을 챙겨서 떠나는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위키백과에는 대한민국의 인터넷 신조어 목록을 모아 놓은 곳이 있다. 거기서는 먹튀먹고 튀다의 줄임말로 인터넷상 다른 사람의 소유 아이템을 훔치는 행위라고 풀이해 놓았다. ‘먹튀라는 말을 처음 쓴 곳이 인터넷 게임 세상이 아닌가 짐작된다.

 

국립국어원에서 계절마다 내는 책 가운데 <새국어생활>이 있다. 2007년 가을호(17권 제3)에 이런 말이 나온다.

 

네티즌들이 만들어 내는 각종 신어들도 그렇다. 이런 말들을 신문이 쓰면 어디서 나왔는지 근거도 없는 말을……하며 화를 내는 독자가 있다. 그래서 신문 기자들은 이런 말을 굳이 쓰고자 하면 따옴표 안에 집어넣는다. ‘틀린 말이지만 편의상 쓰겠다라는 의미다. 하지만 본시 말이란 근거 따지고 문법 따지고 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만들어 낸 말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따라 쓰고, 그래서 세력을 얻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그렇다면 얼짱’, ‘짝퉁’, ‘초딩’, ‘여친’, ‘먹튀’, ‘사오정’, ‘오륙도같은 말을 쓰면서 눈치를 보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규범에 지나치게 얽매이면 언어는 다양성이 사라진다. 다양성이 사라진 언어는 생명의 냄새가 나지 않고 건조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다양한 언어들로 엮어진 글은 마치 시골길을 걷는 것처럼 부드럽고 정감이 있다.(장진한 어문조선 대표의 집착을 버려야 국어가 산다’)

 

얼짱’, ‘짝퉁’, ‘초딩’, ‘여친’, ‘먹튀’, ‘사오정’, ‘오륙도같은 말도 틀린 말이긴 하지만 편의상 써보자는 말이다. 본시 말이란 근거 따지고 문법 따지고 해서 나온 것이 아니니까. 옳은 말이다. ‘먹튀2007년 당시에 이미 이런 글에서 언급될 정도로 널리 쓰인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흘렀으니까 당연히 더 널리 쓰이고 있을 것이다. (‘규범에 지나치게 얽매이면 언어는 다양성이 사라진다는 말은 옳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쓰는 말은 규범이라는 게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뒤죽박죽이다. 10년 전에 이 글을 쓴 분에게 지금 다시 쓰라고 하면 어떻게 쓸까.)

 

요즘 언론에서 쓴 제목을 몇 개 찾아 본다.

 

  먹튀 게임들 게 섯거라!...이동섭 의원 게임 먹튀 방지법발의 (스포츠서울)

  , ‘주식 먹튀최은영 16개월형법정 구속 (채널A)

  여행사 잇단 고객돈 먹튀 사기 대책 마련 시급” (뉴시스)

  사회적기업 인증 문턱 낮추고 먹튀못하게 (한국일보)

  '수강료 먹튀' 여의도 학원 조사나서 (매일경제)

  평창 롱패딩 먹튀중고 거래 사기 주의보 (국민일보)

 



먹튀라는 말을 어머니께 설명한다고 가정해 본다. “뭘 먹고 그 값어치를 하지 않고 입을 싹 닦고 튄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라고 설명하면 1~2분 내에 알아들을 것 같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에게 설명해도 대번에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먹다튀다라는 쉬운 말에서 생겨난 말이어서 새로 만든 말도 대체로 쉽다. 그러니까 2007년에도, 2017년에도 아무 데서나 쉽게 쓰이는 것이다. 아직 표준어라고는 할 수 없겠고 언제쯤 표준어 대접을 받을지도 아득하다. 그렇다고 쓰지 말라고 내다버리기엔 아깝다. ‘사기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게 먹고 튀는 사람들을 가리키기엔 적절한 말이 아닌가 싶다.

 

남의 것을 먹기만 하고 그 대가만큼의 일을 하지 않고 튄 사람의 말로는 어찌될 것인가. 남의 지지와 성원과 응원, 그리고 그에 걸맞은 만큼의 돈을 받은 사람이 책임을 다하여 성실하게 노력한다면 그 사람의 뒷일은 어찌될 것인가. 먹튀를 한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고, 먹은 만큼 일을 한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먹튀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하면 그는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앞서 말한 신문은 저희가 대놓고 이렇게 응원을 요청하는 것은 독자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우리 스스로를 옭아매기 위한 일종의 의식(儀式)과도 같은 것입니다. 앞으로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언론인이 되겠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결코 당당하게 응원 요청을 할 수 없습니다.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는 독자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경험해본 사람은 절대 허튼짓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다짐하고 있다. 먹튀를 할 사람과 절대로 먹튀를 하지 못할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17. 12. 12.

 

사진 1. 법률신문 에서 가져옴(https://goo.gl/FwuCtS)

사진 2. 게임사가 일방적으로 게임 서비스를 중단하지 못하게 하는 일명 게임먹튀방지법을 발의한 이동섭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