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 소속 의사 선생님 3만여 명이 이른바 ‘문재인 케어’를 반대한다며 12월초 서울에서 집회를 열었다. 3만 명이라느니 아니라느니 말도 많다. 경찰은 7000여 명이라고 했다. 아르바이트로 10만 원짜리 상품권을 받고 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인지 알 수 없다.
들머리 사이트에서 ‘문재인 케어’라는 말로 검색해 보면 놀라 자빠질 정도로 많은 정보가 쏟아진다. 언론보도도 그만큼 많다. ‘문재인 케어 반대를 반대한다’는 글에서부터 몇 가지 읽다 보면 사실은 무엇인지,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이런 전국적인 논쟁거리의 대부분은 알면 알수록 미궁으로 빠져서 결국은 관심을 멀리하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정책’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 가운데 하나다. 대표 공약이라고 할 만하다. 언론보도를 보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정책’은 3800여 비급여 항목을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건강보험 보장 항목으로 흡수하는 게 핵심이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 모두가 의료비 걱정에서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며 미용과 성형을 제외한 모든 의료행위에 대해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민들은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는 ▲자기공명영상장치(MRI) ▲유전자 검사 ▲상급 병실료 등 비급여 병원비 부담을 줄일 수 있다며 이를 반긴다고 한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국민 76.6%가 이에 공감한다고 했고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한 국민은 17.5%였다고 한다.
의사들은 정부의 이 정책을 인기 영합주의(포퓰리즘)라고 비판한다. 구체적인 건강보험 재정 확보 방안이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복지부는 “비급여를 지금 그대로 두면 건강보험 혜택을 충분히 확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내린 조치”라고 주장하는데 누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장은 “올바른 의료전달체계를 확립하는 등 국민 건강을 위한 전문가집단과의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누가 옳든 누가 그르든 충분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대통령과 복지부가 옳다고 하더라도 의사들이 저렇게 반대를 하면 그 까닭이 있을 것이므로 자세히 귀담아 들어보아야 하고, 그들을 설득해 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과 복지부가 잘못 판단한 부분이 드러날 수도 있지 않을까.
‘문재인 케어’라는 말은 2018년 연말 국민들의 눈과 입과 귀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게 된 말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 ‘문재인’이야 우리나라 대통령이니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케어’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 왜 문재인 대통령이 발표한 ‘건강보험 개혁안’을 ‘문재인 케어’라는 말로 뭉뚱그려서 쓰고 있을까. 신문사 기자들은, 방송국 기자들은, 의사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을 만들어 붙이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잘 이해될까.
‘케어’라는 말은 영어다. ‘care’ 이렇게 쓴다. ▲보살피다 ▲마음쓰다 ▲관리하다 ▲돌보다 ▲상관하다라는 뜻이다. 사회복지 용어 사전에서는 ‘질병을 관리하거나 제한된 일상생활능력을 보완하는 대인서비스로서 단순한 기계적ㆍ신체적 원조가 아니라 전문적 지식과 기술에 근거한 원조행위’라고 설명한다. 원래 영어를 쓰는 나라인 미국에서는 이 말을 여러 가지 뜻으로 쉽게 쓰고 있다.
흔히 ‘오바마 케어’라고 하는 말은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 개혁안을 가리킨다. 정식 명칭은 ‘환자보호 및 부담적정보험법’이라고 하는데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을 듯하다. 미국에서 자기 나라 대통령이 발표한 법안을 줄여서 ‘오바마 케어’라고 해도 다들 잘 알아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이 발표한 건강보험 개혁안을 ‘케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을까. 무엇이든 미국 것을 우러러보는 사대주의 버르장머리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까. ‘워터 게이트 호텔’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을 미국에서 ‘워터 게이트 사건’이라고 부르니까 우리나라에서도 대형 부정 비리 사건을 ‘무슨무슨 게이트’라고 줄여 부르는 버릇이 생겼다. 만약 그 호텔 이름이 ‘워터 마운틴 호텔’이었으면 우리는 ‘최순실 마운틴’, ‘한보 마운틴’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을까.
이처럼 미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발표한 건강보험 개혁 정책을 ‘오바마 케어’라고 한다고 하여 우리나라 문재인 대통령이 발표한 건강보험 개혁정책을 ‘문재인 케어’라고 하는 건 미국 흉내내기의 전형 아닌가. 미국에서 쓰는 말을 덮어놓고 가져온 꼬라지 아닌가.
‘문재인 케어’라고 하면 알 만한 사람은 대부분 알아들을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국민이 더 많을 것이다. 문재인이 어쨌다는 것인지, 문재인이 아픈데 보살펴야 한다는 것인지, 문재인이 온 국민을 보살펴 준다는 것인지 헷갈리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케어’는 참으로 다양하게 널리 쓰고 있다. 어떤 것은 뜻도 모르고 두루뭉술하게 갖다 붙인 것 같고 어떤 것은 다른 사람이 쓰고 있으니까 덩달아 쓰는 것 같다. 유식한 것인지 무식한 것인지 모를 정도다.
《요즘 우리말께서는 안녕하신가요?》(부크크, 2017)를 보면 케어는 제멋대로 쓰이고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 책에서 찾아 옮겨 적어 놓은 보기를 보자.
‘80세 이상 노인을 케어하다’, ‘눈가 주름, 낮과 밤을 나눠 케어하다’, ‘봄 화이트닝 케어를 시작해’, ‘블루베리, 젊음을 싱글케어하다’, ‘나에게 맞는 두피 케어로 탈모 고민 벗어나자’, ‘임플란트 환자의 마음까지 케어하다’, ‘초미세먼지 경보…먼지케어 가전 인기’, ‘고객의 가치를 높이고 고객을 케어하는 직원을 존중하게 되고’, ‘나만의 피부 케어 꿀팁도 갖고 있어’, ‘○○케어서비스, 비데렌탈 티켓몬스터 오픈’, ‘예민하고 메마른 피부, 완벽한 케어에 도전’, ‘희귀난치성질환자의 일상생활까지 케어하다’, ‘스마트케어 새로운 광고 선보여’, ‘케어캠프, 알츠하이어 치매 진단’, ‘동물 보호 케어’, ‘셀프 홈 케어’
‘문재인 케어’는 그냥 ‘문재인 건강보험 개혁안’이라고 하면 된다. 글자 수 조금 늘어난다고 호들갑 떨 것인가. 이렇게 적어 놓으면 지금 한창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핵심이 ‘건강보험’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건강보험이라면 더 많은 국민이 더 다양한 종류의 질병을 더 편하고 싼값에 진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 국민은 평소 얼마나 많은 보험료를 부담해야 하는 것인지, 건강보험공단 재정이 바닥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까지 치료비를 대어 주어야 하는 것인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문재인 케어’라는 말이 거슬려 이 말을 쓰지 말자고 말하고 싶었는데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졌다. ‘문재인 케어’는 ‘문재인 건강보험 개혁안’이다. ‘문재인 건강보험 개혁정책’이라고 해도 되겠다. ‘문재인 건강보험 개선안’, ‘문재인 건강보험 개선정책’이라고 해도 되겠다. 얼마나 쉬운가. ‘케어’병에 빠진 언론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이런 미국병에 걸리면 건강보험에서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좀 알아 주었으면 한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정책이나 제도를 일컬을 땐 그 정책이나 제도를 발표한 날짜를 붙여서 말하곤 했다. 가령 김영삼 대통령이 발표한 교육개혁정책은 ‘5.31 개육개혁안’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부르면 무엇에 대해 언제 발표한 것인지 좀 쉽게 다가온다. 연도까지 넣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건 아쉽다.
들머리 사이트에서 ‘12.13 부동산 대책’, ‘10.24. 부동산 대책’, ‘8.2 부동산 대책’이라는 말을 찾아보면 ‘아, 맞어. 우리는 이렇게들 불렀지’라고 앞이마를 칠 것이다. 그 정책을 발표한 때의 대통령 이름을 붙이거나 뜻도 모호한 외국어를 붙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문재인 케어’라고 하는 건 ‘8.9 건강보험 정책’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8월 9일 서울 서초구 성모병원을 방문해 계획을 직접 발표했으니까. 굳이 대통령 이름을 넣고 싶다면 넣어도 되겠다. ‘8.9 문재인 건강보험 정책’. 이렇게!
2017.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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