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풀라는 문제를 풀지 못하거나 질문에 대답을 잘 못하는 학생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 학생을 일으켜 세워놓고는 자기가 하는 말을 따라하게 했다. “내가 와 이라노?” “내가 와 이라노?”, “밥 잘 먹고 와 이라노?” “밥 잘 먹고 와 이라노?”, “다음부턴 잘해야지!” “다음부턴 잘해야지!” 또는, “나는 바보다. 정말 바보다. 부모님께 죄송하다.” 이런 말을 시키는 선생님도 있었다. 이 일을 당하고 나면, 학생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겠지만, 자존심이 굉장히 상할 것이다. 정말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자존심과 효심을 건드려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하려는 선생님의 의도가 보인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빌 클린턴 후보는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이 구호 덕분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시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이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흔히 ‘아버지 부시’라고 하는 사람)를 누르고 당선했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고 했을 때 그 ‘바보’는 누구를 가리킬까. 상대 후보인 부시를 가리킬 수도 있다. 또는 유권자를 향한 전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뒤엣것 같다. 유권자들에게 ‘현재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다’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구호 같다. 아무튼 빌 클린턴 후보는 선거에서 이겼고 영어 ‘It's the economy, stupid’라는 말은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 말에 영감을 받은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도 <문제는 경제다>라는 책이 나왔다. 선대인이라는 경제학자가 2012년에 낸 책이다. 책을 샀지만 어려워서 다 읽지 못했다. 문제는 내 지식수준이었다.
김 아무개는 코미디언이자 리포터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으나 그다지 인기가 높지는 않았다. 물론 그가 나오는 방송을 챙겨 보는 사람도 많았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출발 비디오 여행>, <연예가 중계> 등에서 그가 보여주는 재기발랄한 모습은 참 재미있다. 그런 그가 요즘 꽤 낯선 듯하면서도 친숙해 보이는 해괴한 영어 두 단어를 들고 나타났다.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다.
하나는 “그뤠잇”이고 하나는 “스투핏”이다. 그뤠잇에 대해서는 몇 달 전에 몇 마디 썼다. ‘스투핏’은 영어 ‘stupid’를 가리키는데 제대로 적자면 ‘스투피드’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스투핏’이라고 말하고 방송 화면에서도 그렇게 나온다. 이제 온 국민이(그가 나오는 방송ㆍ광고들을 보는 국민이라면, 특히 어린이라면) ‘스투피드’를 ‘스투핏’으로 알게 되었다. ‘스튜핏’으로 쓰는 곳도 많다. 제 맘대로다.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자.
이 말의 뜻은 ‘바보’, ‘얼간이’, ‘멍청이’, ‘어리석은’이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만약 어떤 이가 잘못 판단하여 돈을 잃었을 때 옆에서 친구가 “야이 바보야!”라고 하면 그러잖아도 기분 언짢은데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더 화가 날 것이다. ‘위로는 못 해줄망정 나를 놀리다니’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느라고 했는데 성적이 뚝 떨어진 아이에게 부모가 “바보야”라고 하면 그 아이는 절망하여 공부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바보’라는 말에는 어쩐지 그 말을 듣는 사람을 주눅들게 하고 위축하게 하는 독약이 들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며 ‘바보’라는 말을 선거구호로 사용했다. 그 말을 듣는 미국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바보’라는 말을 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다. 그러니까 클린턴이 당선했지.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서 ‘그동안 내가 정부를 잘못 선택해 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저 사람이야말로 우리를 바보로 만들지 않겠지’ 하는 기대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 아무개 방송인이 국민들을 향하여 “스투핏”이라고 외쳐대는 것은 좀 다르게 다가온다. 만약 그가 “스투핏”이라고 하지 않고 “이 바보들아!”라고 날마다 외쳐댄다면 지금처럼 그를 곱게 봐주고 있을까. 영어로 “바보야!”라고 하니 좋다고 웃음을 지어대지만 우리말로 “바보야!”라고 한다면 이맛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더러 나타날 것이다. 방송에서 그렇게 자꾸 욕을 해댄다면 심의위원회 같은 기구나 민원도우미(옴부즈만) 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영어로 “바보야”라고 하는 걸 정말 바보스럽게, 멍청이처럼 그냥 보고 듣고만 있는 것이다. 이상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다.
요즘 신문, 방송에서는 이 말을 사용한 제목이 넘쳐난다. 가히 최고 유행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 ‘김생민의 영수증’ 日 정규편성 확정 “스투핏-그뤠잇 한 번 더” (스포츠투데이)
∙ ‘김생민의 영수증’ 김숙, 스투핏 소비요정…“돈은 쓰는 것이다!” (스포츠동아)
∙ ‘스투핏’ 방송가에 ‘그뤠잇’ 한 방 (주간경향)
∙ 추석 용돈 적금 안 하면 스투핏 (아주경제)
∙ 이민우 별명 스페셜 스투핏에 분노 폭발, 바보 캐릭터 (뉴스엔)
∙ 윤제문, ‘걸을수록 돋보이는 스투핏’ (세계일보)
요즘 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학생에게 “나는 바보다. 정말 바보다. 부모님께 죄송하다.” 이런 말을 따라하게 하는 벌을 준다면 어찌 될까. 그 말을 전해들은 학부모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지 않을까. 학생들이 선생님 몰래 그 장면을 촬영하여 여기 저기 누리소통망서비스(SNS) 같은 데 올려 난리가 나지 않을까. 만약 선생님이 “아임 스투핏”이라고 따라하게 했다면 어찌 될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따라하고나 있지 않을까. 혼자 그런 교실 풍경을 상상해 보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본다. 영어로 “바보야”, “멍청아”, “얼간아”라고 빈정대고 놀려댈 때는 정말 바보처럼 가만히 있다가 우리말로 “바보야”, “멍청아”, “얼간아”라고 하면 길길이 날뛰고 불같이 화를 낼 것 같다.
방송에서 김 아무개가 “스투핏”이라고 할 때 그것은, 빌 클린턴이 미국 국민들에게 했던 것처럼,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삽시다.” 또는 “국민 여러분 알뜰살뜰하게 소비해야 망하지 않아요.” 또는 “여러분 저처럼 절약생활 해보지 않을래요?”라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영어로 ‘스투핏’이라는 말을 유행어로 만들어 낼 게 아니라 “절약!” 같은 구호나 “알뜰”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 아무개가 방송에서 “알뜰”이라고 하면 다른 방청객이나 출연자가 “살뜰”이라고 맞받아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온 국민을 바보로 만들지 말고 슬기로운 경제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면 말이다.
덧붙여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본다. 방송에 나온 김 아무개가 “스투핏”, “그뤠잇”이라고 하면 방송을 만드는 프로듀서나 누군가 “어이 김 씨, 방송에서 그런 영어를 함부로덤부로 쓰면 안 돼요! 적절한 방송용어가 아닙니다. 다른 말로 고쳐 보세요. 국어기본법에도 맞지 않아요. 반성하세요.”라고 말해 주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거나 실제 그런 말을 했다간 방송국에서 쫓겨나고 말 것이다. 우리나라 방송국이 이 모양, 이 꼴이다.
2017. 12. 9.
그림2 http://blog.daum.net/wjbxorbgz/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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