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4일 어제 아침 6시 40분쯤 집을 나선다. 사위가 어두컴컴하다. 자동차 불을 켜고 비탈길을 내러서서 동네 목욕탕 앞을 지난다. 문득 눈앞에 커다랗고 동그랗고 노란 그 무엇이 보인다. 그것은 석갑산 위에 얹혀 있다. 골프연습장 그물에 걸린 듯하다. 오랜 시간 서서 자세히 보고 싶었으나 뒤따르는 자동차 때문에 그럴 수 없다. 커다랗고 동그랗고 노란 그것은 달이다. 보름은 지난 토요일이었는데, 보름달도 아닌 것이 그렇게 크게 보인 것이다. 그것 참 신기하다 생각한다. 초저녁에 동쪽 하늘에 뜨는 보름달이나 밤하늘 한 가운데 뜬 보름달을 본 적은 많다. 새벽녘에 서쪽 하늘에 걸려 있는 초승달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크고 동그랗고 노란 달은 처음 본 듯했다. 나쁜 징조일까 좋은 전조일까.
그리고 12월 5일 오늘 6시 40분쯤 집을 나선다.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라디오 듣느라 달이 아직 저물지 않았는지 해가 떴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처 경상대까지 달려온다. 7시 2분 전이다. 교문을 들어서는데 문득 도서관 위에 떠 있는 하얗고 동그랗고 커다란 그 무엇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저게 달인가 해인가 헷갈린다. 집에서 출발한 내가 일터로 오지 않고 어디 사차원 세계로 빠져든 것인가 싶다. 이게 꿈인가. 그래서 차를 길가에 세워 놓고 한 장 찍는다. 주차장에서도 한 장 더 찍는다. 잊지 않기 위해서다. 누군가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기 위해서다.
사무실에 들어온다. 신문들을 펼친다. 중앙지, 지방지 합하여 스무 대여섯 개를 다 넘겨본다. 내 일이다. 그러다 경남도민일보 1면에 눈길이 멈춘다. ‘슈퍼문 둥실’이라는 제목을 단 사진 기사가 보인다. “4일 새벽에 떠올랐던 슈퍼문이 같은 날 밤에도 여전히 둥글고 큰 모습을 하고 있다. 이날 오후 7시 50분께…슈퍼문은 달이 지구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근지점’에 위치할 때 나타난다”고 설명해 놓았다. 그러니까, 어제 아침 출근길에 본 그것이 슈퍼문이라는 것이고, 그것이 어젯밤에도 다시 나타났고, 그것이 오늘 아침에도 지구와 이별하는 게 아쉬워 그렇게 해 뜰 즈음까지 하늘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슈퍼문’이라는 말을 다시 찾아본다. 연합뉴스TV는 “올해 가장 큰 ‘슈퍼문’ 떴다…미니문보다 30% 더 밝아”(12월 5일)라고 보도하고 있다. 국민일보는 ‘뉴욕의 슈퍼문’(12월 4일)이라는 제목 아래에 미국 뉴욕 자유의 여신상 뒤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달 사진을 올려놓았다. 멋지다. 데일리한국은 ‘슈퍼문 뜨면 지진 발생? 보름달에 얽힌 속설 진짜일까’(12월 4일)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재미있다. 뉴시스는 ‘휘엉청 밝은 슈퍼문’(12월 4일)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무등일보는 ‘휘영청 ‘슈퍼문’’(12월 5일)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을 올렸다. ‘휘영청’이 맞다. 어쨌든 이 슈퍼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굉장한 관심거리인가 보다.
슈퍼문은 보름달이다. 보름달이 경남도민일보 보도대로 지구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보통 보름달보다 더 크게 보이는 현상이다. 달 자체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할 리는 없으니까. 똑같은 보름달이긴 하지만 어쨌든 굉장히 크고 밝게 보이니 이것을 다르게 부르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서 붙인 이름이 ‘슈퍼문’이다. 슈퍼문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미국이나 영국에서 붙인 말로 보인다. 외국 언론에서 쓰는 말, 또는 외국 기상청에서 부르는 말을 우리도 쉽사리 갖다 쓰는 것이다. 편리하다.
어릴 적 부르던 동요가 떠오른다.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참 맑고 깨끗하다. 흥이 절로 난다. 여기에 나오는 둥근 달이 곧 보름달이다. 그러면 보름달이긴 한데 특별히 더 큰 달을 무엇이라고 불렀나. '대보름달'이라고 했다. 일년 열두 달 가운데 정월 보름날에 뜨는 달이 특별히 크고 밝았다. 우리 겨레는 옛날부터 음력 정월 첫날을 설날이라고 하고 그 보름날을 정월대보름날이라고 했다. 대보름달이 뜨는 날이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슈퍼문보다는 조금 작았는지 모르지만 열두 달 열두 번 뜨는 보름달 가운데에서는 가장 큰 달이므로 큰보름달 즉 대보름달이라고 한 것이다.
언론들도 ‘대보름달’이라는 말을 써 왔다. 연합뉴스는 ‘수조 속 떠오른 대보름달’(9월 26일)이라고 제목을 달고 예쁜 사진을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평창 패럴림픽 성화, 대보름달 기운 모아 불타오른다’(9월 9일)고 보도했다. 현대불교 신문은 ‘대보름달, 산사서 보니 더 예쁘구나!’(9월 15일)라고 보도했다. 연합뉴스는 ‘카멜레온 대보름달’(2월 11일)이라면서 알록달록 예쁘게 물든 보름달 사진을 보도했다. 연합뉴스TV는 ‘휘영청 정월대보름달…건강과 풍요 기원’(2월 11일)이라고 보도했다. 언론들은 ‘대보름달’이라는 말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알 뿐만 아니라 쓰고 있다. 주로 정월대보름달을 가리켜 쓰지만 정월 아닌 달에 뜨는 보름달도 ‘대보름달’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슈퍼문’이라고 하는 크고 둥글고 밝은 달을 ‘대보름달’이라고 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대보름달이라고 하여 정월대보름달만 가리키는 게 아님을 이미 알고 있다. 어느 달에 뜨든 보름달 가운데 지구와 더 가까이 다가와 더 밝게 비추는 달을 대보름달이라고 하면 되겠다. 연합뉴스TV는 ‘미니문’이라는 말도 만들어 썼다. 슈퍼와 반대되는 말은 미니라고 본 것이다. 실제로 엄청나게 커진 달이 있는 게 아니듯이 그 반대로 작아진 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커 보이는 보름달과 그냥 보름달이 있을 뿐이다. 대보름달과 그냥 보름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미니문이라는 말은 애초 만들 필요가 없는 말이다.
“달을 가리키는 말로는 초승달, 반달, 상현달, 하현달, 보름달밖에 몰랐다. 대보름달도 알았다. 이제 슈퍼문도 알고 미니문도 알게 되었으니 그만큼 우리 언어생활이 풍성해졌다.”라고 말해야 하게 생겼다. 하지만 누군가, 특히 언론이 ‘슈퍼문’이라는 말보다 ‘대보름달’, ‘큰보름달’, 아니면 그냥 ‘보름달’이라고 더 많이 써주면 좋겠다.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은 ‘슈퍼문’이라고 하면 “무슨 문? 야가 뭐라카노? 문 닫아라!”라고 반문할 것이다. ‘대보름달’이라고 하면 “그래 달이 얼마나 커길래?”라고 반색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좀 배웠다고, 좀 안다고 외국말 자꾸 갖다 쓰다 보면 나중에 어떻게 될까. 우리가 이미 써오던 쉽고 예쁘고 아름다운 우리말에게 좀 미안한 생각은 들지 않을까.’ 또 이런 생각도 했다. ‘그러나 달에게는 죄가 없다.’
2017.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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