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상위 1%, 슈퍼리치들’에게만 세금 더 걷는다”
이렇게 제목을 단 기사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돈을 아주 많이 버는 부자들에게 세금을 좀더 걷겠다고 발표한 모양이다. 노무현 정부 때던가. 그때도 ‘부유세’라는 이름으로 일부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물리려다가 ‘세금 폭탄’이라는 비판을 엄청 받은 적 있다. 그로 인해 정부의 지지율도 뚝 떨어지지 않았던가 싶다. 그 부유세 때문에 세금을 더 낼 가능성이 거의 0%에 가까운 사람들도, ‘아, 이 정부는 우리들에게 세금 폭탄을 때리는가 보다’라고 생각들 했다. 언론 제목은 그래서 중요하다. 제목뿐만 아니라 논조도 아주 나쁘게 몰고간 측면이 있었다.
나는 이 기사 제목에서 ‘슈퍼리치’라는 말을 눈여겨보고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슈퍼리치라... 슈퍼리치라... 전혀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왜 이렇게 썼을까 싶은 것이다. 대통령 또는 이 내용을 발표한 공무원이 이렇게 말했을까 궁금해진다. 본문을 더 읽어본다. 기사 본문 내용은 이렇다.
“문 대통령은 21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 두 번째날 마무리 발언에서 “증세를 하더라도, 대상은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에 한정될 것”이라며 “일반 중산층과 서민들, 중소기업들에는 증세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대통령은 ‘초고소득층’이라고 말했는데 기자는 ‘슈퍼리치’로 받아 쓴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기자는 대통령 말을 그대로 받아 썼는데 제목을 붙이는 편집기자가 장난을 친 것이다. 이러니 언론이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나. 대통령이 말한 대로 기사를 쓰고 제목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나. 물론 제목은 그 특성 때문에 말을 줄이거나 다른 말로 바꿔 쓰거나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렇게 줄이거나 바꿔 써도 모두 다 잘 알아보는 말이어야지 더 어렵게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슈퍼리치’라는 말이 그리 쉬운가?
‘초고소득층’이라는 말도 아주 쉬운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고소득층’이라는 말은 이미 널리 써왔고, 여기에 ‘초’만 붙인 것이어서 그다지 어렵지 않다. ‘초’는 ‘어떤 범위를 넘어선’ 또는 ‘정도가 심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이다. ‘초’ 접두사를 붙인 말은 우리 주변에 제법 많다. 자연과 초자연, 전도체와 초전도체, 고속과 초고속, 능력과 초능력, 음속과 초음속, 강대국과 초강대국, 만원과 초만원, 대기업과 초대기업(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이런 말들은 가끔씩 듣고 보아 왔기 때문에 그다지 낯설지 않다.
여기서 ‘초’를 영어로 번역하면 ‘슈퍼’(super)가 되는가 보다. ‘super’는 ‘슈퍼, 초…, 아주 …한, 최고의’라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슈퍼맨’과 ‘슈퍼마켓’으로 아주 잘 알려져 있는 영어다. ‘리치’(rich)는 ‘부자의, 부유한, 풍부한, 많은, 풍요로운’이라는 뜻이다. 슈퍼리치는 ‘초부자’, ‘최고의 부자’라는 말이다. 어쨌든 ‘슈퍼리치’라고 하면 ‘슈퍼’도 알아야 하고 ‘리치’도 알아야 한다. 물론 중등학교 이상만 나온 사람이라면(요즘은 초등학교만 나와도 알 듯하지만)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나날살이에서 거의 쓰지 않는 외국어를 갖고 와서 ‘아는 체’하는 게 언론이 할 짓인가. ‘초고소득층’이라는 말을 ‘슈퍼리치’로 해석하여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는 우리나라 기자인가, 미국 기자인가. 스스로 물어보길 바란다. 제발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하길 바란다.
문재인 정부가 세금을 더 거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최고의 부자는 한 달에 또는 일년에 얼마나 벌지 모르지만, 아무튼 일반 서민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지점에 올라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흔히 10대 재벌, 20대 대기업, 30대 기업이라고 할 때 그 등수 안에 들어가는 기업의 회장, 사장, 시이오(CEO) 들을 이를 것이다. ‘상위 1%’라고 하니까.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한국항공우주산업 대표가 사표를 내었는데, 퇴직금만 16억 원이라고 했다. 2012년에 6억 5000만 원이던 연봉을 2017년에는 12억 1000만 원으로 올렸다고 나오던데, 이 정도면 초고소득자에 포함될지 모르겠다.
‘저소득자, 극빈자, 영세민, 서민, 영세서민, 차상위계층’ 이런 말이 한쪽에 모여 있고, ‘부자, 사장, 회장, 재벌, 고소득자, 초고소득자, 상위 1%’ 이런 말이 한쪽에 모여 있다. 이들 사이에 가로 놓인 깊고도 넓은 강을 생각한다. 이 강을 스스로 메워 나가야 하는 사람들은 어느 쪽일까 생각해 본다.
사족: 제이티비시(JTBC)라는 방송국에서 <전(錢)국민 프로젝트 슈퍼리치2>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2017년 7월 20일부터 매주 목요일 밤에 방송하는가 보다. 방송 소개글을 보면 ‘오직 당신만을 위한 맞춤형 재무 진단!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신개념 재테크 버라이어티, 전(錢)국민 부자 만들기 프로젝트 <슈퍼리치2>’라고 돼 있다. <슈퍼리치2>인 걸로 봐서 <슈퍼리치1>도 있었던가 보다. 언론 기자들이 ‘슈퍼리치’를 제멋대로 써도 일반 국민이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한 데는 이런 방송 프로그램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전(錢) 국민을 부자로 만든다’는 말은 하나마나 한 소리 아닌가. 기왕 하려면, 전(錢; 돈) 없는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줘야지... 앞뒤가 안 맞는 말장난으로 보인다. 그냥 부자도 아니고 슈퍼리치로 만들어주는 프로젝트라니, 이 방송 만드는 사람들을 대통령으로 뽑아야하지 않겠나.
2017.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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