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 보도한 ‘농가의 닭진드기 전쟁은 어떻게 외면당했나?’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축산 농가가 안고 있는 어려움과 정부의 농업정책이 갖고 있는 불합리한 점들이 조목조목 드러났습니다. 2016년 한해 동안 우리나라 국민이 먹은 달걀은 135억 6000만 개라고 합니다. 빵과 과자, 라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먹은 것까지 합한 숫자라고 합니다. 국민 한 사람이 256개를 먹은 셈이랍니다. 거의 날마다 달걀을 먹는 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이 먹었을 겁니다. 달걀만한 먹거리가 어디 또 있을까 싶습니다. 싸고 맛있고 요리하기 간편하고 다른 어떤 반찬과도 잘 어울리고...
달걀 때문에 온 나라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른바 ‘살충제 달걀’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무시무시하게 붙였습니다.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주 많은 달걀을 한꺼번에 먹을 경우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날마다 하나씩 꾸준히 먹는 경우에는 농약성분이 거의 다 배출되기 때문에 위험한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수년 전, 어쩌면 수십년 전부터 이런 달걀을 먹어왔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큰 문제로 불거져 나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국민들은 달걀이 좀 무서워 보입니다. 먹어야 할까, 먹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8월 14일부터 전국 양계장의 달걀 출하가 전면 중지됐다고 합니다.
신문을 펼쳤습니다. 8월 18일이었습니다. 어느 신문 첫머리에 “‘에그포비아’ 확산”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에그포비아’라는 말 밑에 ‘계란 공포증’이라고도 써놨습니다. ‘에그포비아’라는 말을 쓰면서도 이 말을 일반 독자들이 잘 모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놀고 있네’라는 심정이었습니다. 다른 신문을 넘겼습니다. “부울경 ‘살충제 계란’ 오늘 판가름”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였습니다. ‘살충제 계란’이라는 말이 무섭게 다가옵니다. 어떤 살충제가 얼마나 묻어 있으며 그것이 사람 몸에 어떤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는 몰라도 일단 ‘살충제 계란’이라는 말에서부터 오금이 저립니다. 하나하나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방송이라고 하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언론에 종사하는 분들이 더 무섭습니다.
‘에그포비아’라는 말에서 ‘에그’는 물론 달걀입니다. 그 정도는 알겠지요? 모르는 사람도 있답니다. 신문 기사는 중학생 수준의 학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알아볼 수 있도록 써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단어와 문장을 너무 어렵게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제대로 지키는 언론사는 거의 없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에그’는 중학생 정도라면 다 알 것입니다. ‘포비아’도 그럴까요? 저는 이 말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가운데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날살이에서 ‘포비아’라는 말을 쓰는 걸 거의 보지 못했으니까요. 왜 안 쓸까요? 낯선 외국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문 기자도 그걸 모를 리 없기 때문에 큰 제목으로는 ‘에그포비아’라고 쓰고 혹시나 싶어 밑에 작은 글씨로 ‘계란공포증’, ‘달걀 공포증’이라고 붙여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포비아’라는 말은 ‘공포증’이라는 뜻입니다.
‘살충제 계란’, ‘계란 공포증’이라는 말이 신문에 버젓이 올라가는 우리 세상은 참으로 무서운 곳입니다. 21세기에,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 나라 즉 선진국인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기막힐 따름입니다. 어쨌든 대부분의 국민이 달걀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무서워하고 있으니 언론으로서도 이런 현상을 보도하는 게 마땅하고 듣기에는 섬칫한 말이지만 ‘살충제 계란’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달걀 때문에 극심한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는 분도 분명 있을 것이므로 ‘계란 공포증’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한 상황과 심정을 이해할 만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정부와 농가, 언론과 국민이 이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기를 빌 뿐입니다.
‘포비아’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물론 영어이므로 영국이나 미국에서 왔겠지요. 포비아(Phobia)란, 어떠한 상황 또는 대상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혐오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병적인 공포증 또는 혐오증’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 포비아를 가진 사람은 두려움의 상황 또는 대상이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박적으로 그 상황 또는 대상을 두려워하고 필사적으로 피하려고 하며,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증상을 나타낸다고도 합니다. 병증의 하나입니다. 듣기만 해도 오싹한 말입니다.
‘포비아’라는 말을 우리말(순 우리말은 아니지만)로 하면 ‘공포증’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신문들이 친절하게 토를 달아놨던 것대로입니다. 우리는 흔히 광장공포증, 대인공포증,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이라는 말을 써왔습니다. 저는 고소공포증이 있는 듯합니다. 10층보다 높은 아파트에 가면 괜히 지진이 날 것 같고, 영화 <타워링> 같은 화재가 일어날 것 같습니다. 베란다에 나가서 바닥을 내려다 보면 심하게 어지럽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오줌을 지립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병증이지요. 고소공포증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아주 조금은 폐쇄공포증이 있지 않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재난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요.
2008년에는 <포비아>라는 영화가 있었던가 봅니다. 타이의 공포영화라고 소개돼 있는데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포비아가 자리잡았는지 모릅니다. 들머리(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면 아주 많이 쏟아져 나옵니다. ‘푸드 포비아, 먹거리 포비아, 관광 포비아, 케미 포비아, 케미컬 포비아, 화학 포비아, 차이나 포비아, 액체질소 포비아, 임대주택 포비아, 사드 포비아, 용가리 포비아, 햄버거 포비아’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신문, 방송 기사의 제목과 본문에 들어 있는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뭐든지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어떤 상황 때문에 많은 사람이 무서움을 느낀다 싶으면 무조건 ‘포비아’를 붙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건 잘하는 일일까요. 저는 잘하는 짓이 아니라고 봅니다. ‘공포증’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데 ‘포비아’라는 말을 쓸 까닭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공포증’과 ‘포비아’라는 말 두 개를 길거리에 걸어놓고 어떤 말을 더 잘, 더 많이 아는지 조사해 보면 거의 모든 경우 ‘공포증’이 이길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신문과 방송에서 ‘포비아’를 쓰는 건 왜일까요? 국민들이 포비아라는 말을 모두 다 잘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닐 겁니다. 그랬다면 굳이 작은 글씨로 ‘계란 공포증’이라고 써줄 까닭이 없겠죠. 왜 그럴까요? 자기들이 사는 세상, 즉 언론사 내에서는 이 말을 제법 많이 쓰겠죠. 그 속에서 쓰는 말을 무심코 갖다 쓴 게 아닐까요. 신문을 이용하여 교육을 하는 이른바 ‘신문활용교육’이 유행하는 시대인 만큼, 독자들이 신문을 보면서 ‘포비아’라는 낱말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배려한 것도 아니겠죠.
다시 질문해 봅니다. 포비아라는 말은 병적인 공포증, 또는 혐오증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달걀과 관련한 혼란상황은 포비아인가요? 못 믿을 농업정책과 축산농가 때문에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긴 합니다만, 이것을 병적인 공포증이라거나 혐오증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습니다. ‘파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지요? ‘사회적으로 어떤 현상이 퍼져 주위에 그 영향이 미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달걀 파동’이라고 하면 사건의 본질을 잘 드러내지 못할 것 같습니까. ‘대란’(大亂)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크게 어지러운 상황’입니다. ‘달걀 대란’이라고 하면 이번 일의 원인이 된 ‘살충제’는 감춰지는 듯합니다만 어쨌든 쓸 만한 말 아닐까요. ‘사태’라는 말도 흔히 씁니다. 파동, 대란, 사태가 좀 미적지근하면 원래대로 ‘공포증’을 써도 되겠지요. 어떤 말을 쓰든 ‘포비아’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일요일 오후 진주시 신안동에 있는 축협에 갔습니다. 입구에 “우리 축협에서 파는 달걀은 안전성이 확인된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알림 문구를 붙여 놓았습니다. 지하에 내려갔더니 여러 종류의 달걀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자주 사 먹는 농장의 것을 주워 들었습니다. 20개가 들었습니다. 이 달걀을 생산하는 농업인의 얼굴을 잠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늦가을부터 봄까지 해마다 덮쳐오는 조류인플루엔자 때문에 가슴 졸이다가 한시름 놓았다 싶을 때 불어닥친 살충제 파동 때문에 얼마나 노심초사할까 짐작해 봅니다. 집에 와서 달걀을 두 개 깨뜨려 프라이팬에 구웠습니다. 구수한 향기가 났습니다. 개나리꽃보다 더 샛노란 노른자를 내려다보면서 그것이 내 몸에 들어가 살이 되고 피가 되는 모양을 상상해 봅니다. 포비아라는 말은 아예 내 몸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입니다.
‘에그’라고 하지 말고 ‘계란’이라고 하고 기왕이면 ‘달걀’이라고 하자는 말은 오늘은 참았습니다.
2017.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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