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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걸어서 우리집까지

by 이우기, yiwoogi 2017. 5. 23.

봄이라고 하기엔 많이 덥고 여름이라고 하기엔 여왕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자동차 없는 날 걸어서 퇴근하기로 한다. 버스를 탈까 궁리했지만 마음을 바꾼다. 522일 월요일 오후 5시 사무실 문을 나선다. 목댕기(넥타이)까지 한 정장 차림에 구두를 신었다. 바지 주머니에 휴대폰과 지갑을 넣고 윗도리 안주머니엔 작은 수첩 하나를 넣는다. 가방 같은 건 지니지 아니하였다. 휴대폰과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소리는 높이지 않는다.

 

기왕 걸을 것, 좀 많이 걷기로 한다. 경상대 북문~개양~석류공원~주약동 탑마트 앞~경상대학교 병원 앞 강변~진양교~경남도문화예술회관 앞 강변~진주교~천수교~한국방송공사 진주방송국 옆~진주교육대학 옆~평화교회~국제아파트. 2시간은 훨씬 더 걸리지 않을까 싶다. 짐작건대 4킬로미터는 넘을 것 같다. 집에서 진양교 근처까지 1시간 10분 정도 걸린 적은 있다.

 

날씨는 덥다. 경상대 북문 나서자마자 가게에서 작은 물병 하나 산다. 물이 달다. 대숲에서 바람이 조금 불지만 감질맛만 난다. 학생들은 반바지에 반소매 옷을 입고 크게 웃으며 지나간다. 버스도 지나가고 택시도 달리고, 도로는 부산스럽다. 지열도 제법 올라온다. 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는다. 혼자 마음 먹고 혼자 걷는 길이기에 중간에 작파한다고 하여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을 터.

 

석류공원 앞에서 멈춰 선다. 시원한 남강과 강 건너 신무림제지와 그옆 나의 친정 경남일보와 진주시청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경상대학교병원 건물은 정면에 버티고 섰다. 진양교와 새벼리, 동방호텔까지 보인다. 장쾌하다고 할까. 처음 서 본 자리다. 차 타고는 골백 번 지나다녔지만, 그 지점에서 주변을 둘러본 건 처음이다. 넓은 화각으로 찍히는 사진기가 필요하다. 아이폰으로 찍으려다가 참는다. 휴게소가 군데군데 있으나 앉지 않는다.

 

대학병원 앞 둔치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운동하는 사람이 많다. 게이트볼 경기를 하는 중년들도 있고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연인들도 보이고 엄마 따라 종종걸음을 내딛는 아이들도 웃는다. 일부러 조금이라도 더 그늘진 곳을 밟자니, 자전거와 마주한다. 미세먼지는 어떤지 황사는 날리는지 송홧가루는 또 어떤지 알 수 없다. 알 필요도 없다. 안다고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앞만 보고 걷는다.



 

진양교 지나 경남도예술회관 근처에 이르러 비로소 긴의자에 잠시 앉는다. 물 한모금 들이켜고 새벼리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자동차는 바쁘다. 아주 가끔 자전거가 지나간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젊었는지 늙었는지 구별할 수 없다. 빨간 점점은 장미다. 노란 점점은 무슨 꽃일까. 봄일까 여름일까. 강일까 산일까. 아니면 하늘일까. 잠시 어지럽다. 절반은 왔겠지. 엉덩이 먼지 떨고 다시 걷는다.

 



어느새 620분을 지난다. 망경동 대숲에서 큰숨을 내쉬어 본다. 촉석루를 배경으로 스스로사진을 찍는다. 표정은 밝아지지 않는다. 못생긴 사내 하나가 축축한 얼굴로 마주 본다. 밉다. 어지럽다. 진주교 쪽을 보니 논개제를 알리는 커다란 천이 펄럭인다. 강물에도 비친다. 예쁘다. 예쁨과 못생김 사이에서 잠시 웃는다. 바람 쐬는 남녀들이 대숲에서 웃는다. 대숲 바람도 웃는다.

 



망경동에서 천수교로 향하려는 자동차는 바쁘다. 퇴근길 집으로 가려는 것인지, 술집으로 가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천수교는 만원이다. 원래 2개 차로인데 3개 차로처럼 다닌다. 중간 지점에 촉석루와 진주교를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둔 공간이 있다. 잠시 선다. 유등축제하는 밤에도 아름답지만, 햇살 반짝이는 낮에도 충분히 아름답다. 서장대에서 촉석루로 이어지는 신록은 능구렁이 같다. 능구렁이 입은 서장대다. 왜놈들도 그렇게 느꼈을까. 자동차 매연 때문이었을까, 트럭이 울리는 진동 때문이었을까, 잠시 휘청거린다. 지진이 났나 싶어 앞뒤를 살펴본다. 괜히 부끄럽다. 빈혈인가?

 

신안동 녹지공원에서 지천으로 널린 토끼풀(클로버) 꽃을 찍는다. 꽃은 많다. 양털 같다. 목화 솜 같다. 눈을 가늘게 떠서 보니 비로소 토끼풀이다. 네잎짜리 토끼풀을 찾아 행운을 얻어볼까. 아예 그 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이불 삼아 잠이라도 들어볼까. 멀리서 들릴 듯한 남강물 흐르는 소리, 멀리서 보일 듯한 망진산 봉홧불, 더 멀리서 들릴 듯한 아득한 지구의 어리광, 그 소리와 불빛과 모습을 꿈속에서나마 만나볼까.


 

기나긴 퇴근길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은 바로 아파트 입구이다. 청룡열차를 타듯 내리막길을 100미터쯤 내리걷다가 펭귄유통을 끼고 돌아 다시 오르막길이다. 오르막 길이는 짧지만 가파르기로는 제법이다. 하긴 아들들은 자전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한번에 휙 올라가곤 했지. 관리사무소 앞을 지나 잠시 걷다 보면 또 오르막이다. 마지막이다. 장딴지가 딱딱해진다. 호흡도 가빠진다. 흘끔 시계를 보니 1시간 45분 걸렸다. 제법이다. 2시간 30분을 목표로 삼았는데, 그렇게 빨리 걸었더란 말인가...


군데군데 마음을 흔드는 것들이 있다. 너무 익숙해서 더욱 견디기 힘든 술집, 밥집 들에서 풍겨나오는 냄새 또는 가게 문앞을 장식한 그림과 사진 들이다. 나열해 본다. 경상대 후문 포장마차의 튀김과 샌드위치, 개양 근처 분식집의 라면짜장면 그림, 여러 곳의 국숫집과 그곳에서 파는 파전막걸리, 경상대 의과대학 앞 전주 콩나물해장국집, 금호석류마을 아파트 앞 옛날식 통닭집, 경상대병원 장례식장 앞 BBQ 통닭과 생맥주, 경남과기대 앞 반성장터국밥의 돼지국밥, 한들 김치찌개집의 삼겹살과 김치찌개에 빠진 라면, 경남도문예회관 앞 칠암곰탕집의 구수한 국물 냄새. , 그러나 무엇보다 남강 따라 피어난 예쁜 꽃들, 강 건너 뒤벼리의 절경, 오가는 사람들의 웃음은 그냥 스쳐 지나가기엔 너무나 아깝고 예쁘고 정겹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이 맞다. 사람들은 가볍고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한가하게 거닌다. 혼자 탄 자전거, 둘이 탄 자전거가 남강물을 배경으로 여유롭게 지나간다. 아이들도 즐겁다. 빨간 꽃은 장미요, 하얀 꽃은 찔레꽃이요, 분홍 꽃은 영산홍이요, 노랑 꽃은 무엇일까. 수선화는 부끄러워 고개 숙이고 있고 새봄을 알릴 때 야들야들하던 버들개지는 늙수그레한 모습이다. 50년 전 첫 울음을 터뜨린 내가 초로의 신사가 되어 정처없는 나그네처럼 강가를 거닐 듯이. 그래도 걷는다. 계절의 여왕 앞에 엎드려 꽃 한 송이 바치는 심정으로, 큰 탈 없이 인생의 강을 건너고 있는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걷는다, 걸었다, 또 걷는다.

 

2017.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