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9일부터 치자면 아흐렛날 동안 쉬었다. 중간에 5월 4일 하루 출근했지만 어영부영 하루가 가버렸으니 9일 동안 쉬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컴퓨터 비밀번호 까먹을까 은근히 걱정되어 일요일 오후 사무실에 나가 본다. 비밀번호 확인하고 그 사이 오고간 공문들도 대충 살핀다. 월요일 출근하면 무엇부터 해야할지 어림짐작한다. 다음 한주 동안 쓰거나 다듬어야 할 원고가 백 장 가까이 되겠다는 것도 확인한다. 한숨이 나온다. 놀 땐 좋았지만 막상 출근을 앞두고 보니 갑갑하다. 걱정한다고 달라질 건 하나도 없다. ‘내 삶의 걱정과 불안 중 90%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김권수의 <내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것>에서) 에라 모르겠다. 다섯 시쯤 사무실 문을 나선다.
버스 타고 귀가하려다 마음을 고쳐 먹는다. 엊저녁 어버이날 기념 가족 모임에서 너무 많이 마신 술 기운을 내보내고 싶어진다. 사실 사무실 나갈 때부터 집으로 돌아올 땐 가좌산~망진산을 걸어보리라 다짐해둔 터이다. 냉장고에 누군가 넣어 둔 물 한 병과 책상 위에 뒹굴던 쌀전병 과자 하나를 가방에 넣고 신발끈을 조인다. 버스를 타면 아무리 많이 걸려도 삼십 분이면 충분할 터이지만 나는 한 시간 삼십 분 이상 두 시간 정도 걸을 것을 마음먹는다. 스스로 대견하다 잠시 생각한다. 웃는다. 웃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잠시 생각한다.
경상대 인문대학 길가에 핀 꽃이 손을 흔들며 격려해 준다. 사진 한 장 찍으며 다시 웃는다. 발목과 무릎에 약간 통증이 있으나 개의치 않고 첫 비탈을 오른다. 가뿐하다. 대학 1학년 때, 그러니까 1986년 어느 봄날 교수님과 학생들이 올라가 첫 야외수업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문학 수업도 아닌, ‘통사론’ 아니면 ‘의미론’ 같은 수업이었는데 어쩌자고 산으로 올라갔던 것인지는 기억에 없다. 많은 여학생들이 시도 때도 없이 까르르 웃던 모습, 그 소리만 귀에 쟁쟁하다. 다들 어디에서 무엇하며 살고 있는지.
연휴 뒤끝이어서 그런지,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경상대 둘렛길을 거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람이 다닐 길과 다니지 못할 숲을 경계짓는 녹차나무들의 긴 행렬을 눈여겨 바라보며, 간간이 섰는 빈 긴의자들을 보아가며, 때로는 높게 솟은 소나무들의 밑둥을 살펴가며 부지런히 걷는다. 생각해 보니 3월 21일 퇴근길에 이 길을 걸었다. 그땐 해가 지면 어두워질까 봐 더욱 빨리 걸었는데 오늘은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하다. 짐작으로는 여섯 시 삼십 분, 늦어도 일곱 시 안에는 집에 당도할 수 있을 테니까. 경상대 둘렛길 꼭대기 팔각정에 이르니 중년 부부가 운동을 하고 있다. 표정이 밝다. 거꾸로 매달리고 몸을 비틀어대는 부부들에게서 몇 해 뒤 내 모습, 아니 오늘의 내 모습을 본다.
망진산 정상을 방향으로 잡아 길을 걷는다. 미세먼지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송홧가루가 아무리 날려대도 내 길을 막을 수 없다. 땅은 촉촉하고 푹신푹신하다. 아카시아 향기가 코 끝에 와 닿는다. 3월엔 붉은 진달래가 만세 부르며 날 반겼는데 5월 가좌산엔 찔레꽃 하얀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아카시아 한 송이를 따서 입으로 후후 분 뒤 먹어본다. 달착지근하다. 다람쥐도 없고 새도 없는 한적하고 호젓한 길을 혼자 걷는다. 아주 간혹 마주치는 나들이객, 등산객들도 앞만 보고 걷는다. 그들은 검은 색안경을 끼었으므로,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인사말이라도 건네고 싶지만 그의 색안경과 나의 이어폰이 우리의 교감을 막는다. 아무말 없이 지나치는 게 외려 더 어색하다. 다음엔 그래도 인사말 한마디는 건네야겠다 다짐해 둔다.
귀에서 듣는 라디오는 정치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틀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 이야기가 재미있다. 사전 투표율이 26.06%인데 이것이 누구에게 유리할 것인지 분석하는 기자들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친다. 1000만 명 이상의 유권자가 사전 투표를 한 덕분에 전체 총투표율은 80%에 육박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후보들을 1강 2중 2약으로 분석하는 그들의 흥분을 안으로 안으로 새기며 걷는다. 오늘 오전 진주시청 기자실에서 대학생 또는 젊은이 몇 명이 나타나서 홍 아무개 후보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했단다. 그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올려놓았는데, 2014년 경상대 총학생회장이던 황 아무개를 그냥 총학생회장이라고 적어놨기에 사실을 바로잡는 댓글을 올려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정치란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람을 갈라 놓을까. 토론이나 논쟁으로 극복할 수 없는 극한의 대립은 왜 생겨난 것일까. 한쪽에서 죽자살자 싫어하는 후보가 있다. 그들의 논리를 들으면 지극히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후보 진영에서는 또 죽자살자 그를 지지하고 상대를 깎아 내린다. 선거가 끝나고 난 뒤 우리나라에 과연 소통과 통합과 화합과 상생과 발전과 미래라는 말을 웃으며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다. 죽자살자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을까. 과연 그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의 모든 면을 속속들이 제대로 잘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그 후보가 가진 장점과 단점, 진실과 거짓, 과거와 미래를 냉정하게 평가한 뒤 지지하고 있는 것일까. 모를 일이다. 맹목이다. 맹목은 비극이다. 종교보다 더 무섭다.
이런 생각들을 한다. 정치란 참 무서운 것이라는 결론이 고개를 내민다. 정치를 멀리해야 한다는 생각도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그렇게 고개 내미는 정치혐오를 두더지 잡는 오락기계에서 했던 것처럼 망치로 두들겨 패서 죽여버린다. <닥치고 정치>(김어준 저)라고 한다. 아무리 정치가 혐오스러워도 정치를 멀리하고 정치에서 관심을 꺼버리면 그 뒤는 오히려 더욱 심한 암흑이 올 것이다. 정치를 외면하면 할수록 더 좋아할 사람은, 국민을 배신하고 국가를 팔어먹을 무리들일 것이다. 하여, 사전투표에 나선 26% 이상의 유권자의 높아진 정치 의식이 반갑고 고맙다. 이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정말 최종 투표율은 얼마나 될 것인가. 누가 당선할 것인가. 떨어진 사람은 무엇이라고 변명댈 것인가. 그 이후 이들의 이합집산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러는 통에 국민들의 삶은 또 얼마나 피폐해질 것인가. 생각의 끝은 없다.
여러 번 만난 갈랫길에서 오로지 망진산 정상만 챙긴다. 원래 계획은 희망교 언저리로 하산하는 것이었는데 생각에 빠져 있던 나머지 망진산 정상 쪽으로 몸이 먼저 향하고 있던 것이다. 3월 21일 걸은 길과 조금 다른 길이면서 꼭 한번은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하던 길이다. 희망교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거기서부터는 내처 내리막길이었을 터인데, 새로 걷는 길은 다시 오르막이다. 망진산 정상으로 가는 팔백 미터 남짓한 길은, 지리산처럼 높은 산에 비길 바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장딴지와 허벅지를 팽팽하게 하기엔 충분하다. 과자를 베어 먹고 물을 마시며 체력을 조절한 덕분에, 그리고 아카시아 꽃을 먹은 덕분에, 그리고 길에 떨어져 있는 시큼한 매실 하나를 베어물어준 덕분에 나는 무사히 마지막 꼭대기에 설 수 있다.
고개를 돌려보니, 장관이 펼쳐진다. 진주시 신안동, 평거동 쪽이다. 신안 강변을 거닐 때 남강 건너 쪽을 바라보면 웅장한 벽으로 우뚝 섰는 망진산, 그 산 꼭대기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발밑으로 남강이 빛난다. 진양호 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사선으로 광선을 쏘아대자 남강은 기다렸다는 듯 햇빛을 망진산으로 반사하여 쏘아 올려준다. 강변 둔치 길이 보이고, 공연장도 보이고, 그 너머 나즈막한 집과 높은 아파트도 보인다. 더 멀리 눈길을 던진다.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이 보인다. 법원 옆에 살짝 고개를 내민 아파트가 우리집이다.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방송국 송신탑도 보이고 통신사 안테나도 보인다. 조금 더 걸으니 망진산 봉수대도 보인다. 불꽃과 연기가 피어 올랐을 봉수대 가운데에는 아카시아 나무 한 그루가 무심하게 솟아 있다. 불을 때고 연기를 피워올려본 게 얼마나 오래되었을지 짐작해 본다. 그렇게 방치할 것을 무엇하러 복원하였는지 알 수 없다. 한 해 한 번이라도 실제 봉화를 올려보면 안 될까 생각해 본다.
월경사 지나고 천수교 건너니 이제 정말 집이 가깝다. 두 시간 걸렸다. 허벅지와 장딴지는 더욱 팽팽해진 듯하고 무릎과 발목이 약간 욱신거린다. 삐끗한 적은 없는데 뭔가 상태가 좋지 않다. 아무려면 어때... 어제 마신 술 기운은 땀으로 좀 배출되었을까. 그대신 들이마신 미세먼지와 송홧가루는 또 어떻게 배출해야 할 것인가. 음료수 두 병과 막걸리 한 병을 사 들고 대문을 여니, 도토리묵 무침과 삼겹살이 반긴다.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먹고 사는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해 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좋겠다. 손학규라는 사람이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들고 나온 구호는 ‘저녁이 있는 삶’이다. 손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나는 정말 ‘저녁이 있는 삶’이 모든 국민에게 골고루 주어질 수 있는 그런 정치를 기다린다. 사무실을 나서서 두어 시간 걸어서 집에 와서는 가족과 오순도순 둘러앉아 맛있는 밥을 먹으며 하루 동안의 노동과 공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내일 펼쳐질 일과 시험을 기분 좋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이 오도록 해야겠다. 정치는 그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고 보면 걷는 것도 정치다.
2017.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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