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정처 없는 이 발길

by 이우기, yiwoogi 2017. 3. 21.

1시간 30분 걸렸다. 생각보다 가깝다. 마음먹는 게 절반이고 나머지는 그저이다.

 

진주시 가좌동 경상대 대학본부에서 오후 5시에 나서서 가좌산 넘어 희망교 건너 집에 오니 630분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아주 알맞게 배합되어 있는데다 활짝 핀 진달래목련과 아직 떨어지지 않은 갈잎이 혼재해 있어 흡사 인생과 같은 길이다. ‘진주에나길이라고 한다. 몸에서는 땀이 샘솟고 있지만 바람은 제법 세고 차갑기에 굳이 말하자면 고진감래흥진비래의 발걸음이다. 이런 노래가 생각난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네.”

 

길은 폭신폭신하다. 어제 오후부터 오늘 새벽까지 내린 비 덕분에 먼지는 거의 없다. 꽃길은 아니지만 가시밭길도 아니다. 나무들은 흥분해 있고 꽃들은 흥겨워하고 있다. 새들은, 모두 반상회 갔는지 몇 놈 보이지 않는다. 기대한 길동무치고는 좀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상대 남명학관 옆을 지나 급경사를 숨을 가다듬으며 오른다. 가좌산 정상에는 중년 남녀 몇몇이 운동을 하고 있다. 거기까지는 게으른 나도 몇 번 오른 적이 있다. 수의과대학으로 빙 둘러 내려오는 ‘GNU 둘레길을 뒤로하고 망진산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처음이다.

 

낯선 길은 묘한 매력이 있다. 가다 보니, 남명학관으로부터 1.5km 걸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있다. 갈길은 거의 3km 남았다. 나중에 보니, 망진산으로 가지 않았으니 산길을 3km 더 걸은 건 아니지만, 집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니 그보다 더 걸은 셈이다.

 

스사’(스스로사진)도 찍고 풍경도 몇 장 찍지만, 앉아서 쉬지는 않는다. 장딴지허벅지가 팽팽해져 오지만 참는다. 이 정도는 견딜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긴다. 어디에라도 앉으면 땀이 식을지 모른다. 목표 지점은 내동초등학교 근처, 휴먼빌 아파트 근처이다. 그러니까 해가 넘어가는 방향을 따라 부지런히 걸은 것이다.

 

산등성이를 타고 걷다 보니, 오른쪽왼쪽으로 옹기종기 동네들이 보인다. 동네 이름을 다 알 수는 없다. 이정표로 짐작건대 어디어디쯤인지는 가늠할 수 있다. 한번도 가 보지 않은 마을도 보인다. 제법 커다란 건물도 있다. 기회 되면 경상대와 망진산 사이에 터잡고 사는 사람들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내동초등학교 앞에 내려서니 555분이다. 생각보다 멀지 않다. 그렇게 힘들지도 않다. 다시 심호흡하고 신호등을 눈여겨보아 가며 지나가는 차들도 흘깃흘깃 훔쳐보며 발걸음을 놓는다. 땀이 식는다. 다리는 여전히 팽팽하다. 스스로 뿌듯해진다.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을 오로지 혼자, 그것도 그냥 걸은 것이다. 돌이켜보니 희망교도 처음 걸어서 건넌다. 희망교에서 바라보는 남강과 둔치와 천수교는 한폭의 그림이다. 그림의 종류는 수채화이다. 자전거로 한번 건넌 적이 있다.


 

집 현관 앞에 서니 정확하게 628분이다. 씻고 나와 출출한 속을 달랜다. 오뚜기 라면 하나에 이것저것 마구 넣고 끓이니 생긴 모양이 꼭 소주 안주인지라, 냉장고에서 출동 대기 중인 소주 반 병을 호출한다. 321일 화요일 운동은 이렇게 끝난다. 술은 달고 라면은 맛나다. 곁에서 아내가 잔을 채워주니 여기가 무릉도원 아니겠는가, 싶다. 지금부터 <역적> 할 때까지는 흰 종이 위에 기어다니는 작고 까만 개미 두들겨 잡을 시간이다.

 

2017. 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