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봄이다. 언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는 2월 18일이고 3월 5일은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펄쩍 뛰어나온다는 경칩이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찬바람이 불기는 하지만 봄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낮엔 바깥 바람은 차지만 가령 차 안 같은 데서는 오히려 더워서 갑갑함을 느낄 정도이다.
봄에는 온 세상 삼라만상이 긴 잠에서 깨어난다. 봄 빛깔을 한 가지로 표현하라고 하면 어떤 이는 분홍빛을, 어떤 이는 노랑빛을, 어떤 이는 초록빛을 말할 것이다. 이러한 빛깔이 서로 어울리고 뒤섞이고 어우러져 찬란하고도 황홀한 봄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
초록 빛깔이 조금 진하기도 하고 연하기도 하여 아주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 봄비를 머금어 영롱할 때도 있다. 어떤 때는 초록 잎사귀가 서로 겹쳐져서 검은 빛깔로 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초록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런 장면을 두고 요즘 어떤 사람은 ‘초록초록하다’고 한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봄비가 청승맞게도 ‘초락초락’ 내리는가 보다’고 생각하였다. 그 말을 한두 번 더 자세히 듣고서야 비가 오는 게 아니라 초록 빛깔이 숨막힐 지경으로 아름답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숨막히다는 것은 내가 받아들인 정도이고, 말하는 사람은 싱그럽고 상큼하며 생기발랄한 봄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초록초록하다?
우리 말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거나, 아니 최소한 중학생만 되어도 이 ‘초록초록하다’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대번에 알 것이다. ‘초록’이라는 빛깔을 나타내는 명사에 ‘-하다’가 붙어 동사나 형용사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들 쓰고 있나 보다. 초록이라는 말은 ‘초록빛 바다, 초록 매실, 초록 마을, 초록 우산’처럼 쓴다고 알고 있는데….
처음 이런 말을 하게 된 사람은, 또는 그런 사람을 따라 이 말을 쓰는 사람은 ‘그냥 무심코 지나치기에 미안할 정도로 아주 예쁜 초록빛을 보았을 경우에는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과 고민의 언저리에 다가가 본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미 있던 말을 찾아내려고 애쓰다 말았을까 아니면 이런 말처럼 새롭고 꽤 괜찮은 말을 만들어 내었을까.
초록초록하다가 사람들 사이에서 그럭저럭 두루 쓰인다면, 노랑노랑하다, 분홍분홍하다, 검정검정하다, 파랑파랑하다라는 말들도 쓰이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본 적 없지만, 개인끼리 주고받는 문자메시지나 블로그 같은 데서는 제법 자주 보게 된다. 알고 보니, 이렇게 ‘-하다’가 붙어 형용사나 동사가 될 수 없는 말인데도 한 낱말을 연이어 붙여 놓고(첩어)는 ‘-하다’를 붙이는 경우가 제법 있다.
‘미남미남하다’라는 말도 쓴다. 얼굴이 잘생긴 남자 사람을 미남이라고 한다. 미남을 잇따라 두 번 써 놓고는 ‘-하다’를 붙여 미남미남하다고 하는데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가 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나는 좀 어색하다. 그렇지만 얼굴이 잘생긴 정도가 아주 높아서 그냥 ‘미남이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 뭐라고 하면 좋을까.
‘가을가을하다’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가을 햇살은 춥지도 덥지도 않게 따사롭고, 가을 바람은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산들산들 불어대고, 마침 노란 은행잎은 한들한들 여유있게 길바닥으로 낙하하는 그런 날이 있다. 아주 평화롭고 조용하고 느릿한 이런 가을날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가을답다, 가을스럽다, 가을이 무르익었다, 가을 느낌이 물씬 난다, 가을의 절정’ 이런 말로는 그 느낌을 다 담아낼 수 없을 것만 같은데,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가을가을하다라는 말을 쓸 양이면, ‘여름여름하다’, ‘겨울겨울하다’라는 말이 없으란 법이 없겠다.
‘귀엽다’는 말을 더 귀엽게 표현하느라 더러 쓰곤 하는 ‘귀욤’이라는 말도 ‘귀욤귀욤하다’로 쓰고 있다. 그냥 귀엽다라는 말로는 뭔가 허전하고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미묘한 느낌의 차이를 붙잡아서 색다르게 표현해 보고자 하는 노력이 이런 말을 만들어 낸 것이리라. 귀욤귀욤하다라고 말해놓고 나면, 또는 그런 말을 듣고 나면 그 귀여움 때문에 몸서리가 쳐지거나 소름이 돋을지도 모른다.
초록초록하다, 노랑노랑하다, 파랑파랑하다, 분홍분홍하다, 미남미남하다, 가을가을하다, 여름여름하다, 겨울겨울하다, 귀욤귀욤하다 따위 말은, 일단 말이 안 된다. 우리말답지 않다. 이렇게 말을 만들면 안 된다. 누군가 어색하게 만들어낸 말이다. 표준어도 아니고 사투리도 아니고, 그냥 장난말이다. 장난으로 아무렇게나 지어내어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전혀 밉지가 않다. 처음엔 어색하지만 몇 번 말해보고 들어보면 그저 어색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말맛은 살아난다. 사계절 가운데 여름, 가을, 겨울은 이런 조어(助語)가 낯설지 않은데 봄은 한 글자라서 좀 어색하다. ‘봄봄하다’고 해 놓고 보니 다른 계절만큼 말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아무튼 잘못된 조어이긴 하지만 헌신짝 보듯 하기엔 아깝고, 징그럽다고 손가락질하기엔 너무 맨들맨들하고 보들보들하다.
무엇이라고 딱 분질러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초록초록하다’라고 하면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제주도 샤러니숲길이 떠오르기도 하고 보성 녹차밭이 떠오르기도 하고 따스한 봄날 아버지 무덤가에 찬란하게 살아나던 잔디가 떠오르기도 한다. ‘미남미남하다’고 하면 젊고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 배우나 가수가 언뜻 연상된다. 눈코입귀는 물론이요 살결까지 보드라울 듯한 잘생긴 남자가 떠오른다. ‘가을가을하다’라는 말도 오랫동안 보아 오고 느껴 와서 아주 익숙한 가을풍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어데선가 갈대 잎사귀가 나를 부르는 듯한 나른한 오후의 꿈결 같은 가을날이 스쳐 지나간다.
잘못 태어난 이런 말들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누군가 이런 말을 하면 호통치지 말고 가만히 들어봐 주자. 누군가 어디에다 이런 표현을 써 놓았다면 무식하다고 면박 주지 말고 짐짓 모른 척하며 그 말맛을 음미해 보자. 비록 신문 제목으로 쓰이지 못하고 더구나 사전에 오르는 일조차 까마득한 이런 야릇하고 낯선 말들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아 주자. 말과 글에 대하여 남들보다 엄격한 편인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말들이 갖고 있는 귀염성과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말맛 때문이다.
2017.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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