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심수봉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 <그때 그 사람>이라는 게 있다. 가사는 이렇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 떠난 사람 못 잊어서 울던 그 사람” 나는 이름이 ‘우기’여서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으로 지목된 적이 있다. 물론 장난이다. 이름을 한자로 쓰면 佑基인데 雨氣 또는 雨期라고 억지 부리며 놀리는 것이다. 요즘도 비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그건 그렇고.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졸업식과 입학식이 잇달아 열리고 있다. 대부분 학교에서는 졸업식과 입학식을 강당ㆍ체육관처럼 실내에서 하는데, 바깥에서 여는 경우도 있다. 행사를 바깥에서 하는 경우에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따르는 고민거리가 있다. ‘비가 올 것인가 말 것인가, 온다면 얼마나 올까’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사 초대장에 장소를 운동장이라고 적어 놓고는 괄호 안에 ‘우천시 체육관’이라고 적는다. 행사 앞날까지 날씨가 괜찮았는데 마침 그날 아침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하여 혼비백산ㆍ우왕좌왕하는 것을 더러 본다.
이때 ‘우천시’라는 말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이 말 뜻을 모를 리 없다. ‘우천’이란, 말 그대로 ‘비가 오는 날씨’ 또는 ‘비가 내리는 하늘’이라는 말이다. ‘우천시’란 ‘비가 올 때’라는 뜻이다. 어려운 한자어도 아니어서 모르는 사람이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 세 글자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이 세 글자를 초대장에, 또는 어디어디에 적어넣었을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이 들여다보이지나 않을까 싶은 것이다.
누구나 ‘우천시’라고 쓰고 거의 모든 국민이 다 알아보는 말이니까 그냥 쓰면 된다. 써도 아무렇지 않다.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아무 문제 없다. 0.1%도 의심하거나 고민하거나 물어볼 필요가 없다. 나는 그 지점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누구라도, 단 한 명이라도 ‘우천시’라고 쓸 것을 ‘비 오면’ 또는 ‘비 올 때’라고 쓸 생각을 해주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우천시’라고 쓰는 것과, ‘비 오면’이라고 바꿔 쓸 것을 고민하는 그 미세한 차이를 나는 주목한다. 만약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라는 노래 가사를 ‘우천시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라고 했더라면 과연 이 노래는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중화요리집에 가면 노란 빛깔의 무 김치와 하얀 빛깔의 채소를 반찬으로 내놓는다. 노란 것은 ‘단무지’이고 하얀 것은 ‘양파’이다. 지금은 단무지와 양파라는 이름에 대하여 모두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것들을 ‘다꾸앙’과 ‘다마네기’라고 불렀다. 일본말이다. 일제 강점기에 쓰던 말을 광복 이후에도 그대로 따라 썼다. 많은 국어학자와 우리말 운동가들이 문제삼아 비로소 다꾸앙과 다마네기가 쫓겨가고 그 자리를 단무지와 양파가 차지했다. 말의 독립운동이라고 할까. 아버지 대에서부터 써오던 말이니 따라서 다꾸앙, 다마네기라고 해도 되었을 것을 누군가 ‘이건 아닌 것 같다’라는 반란의, 반동의 생각을 품은 것이다. 이런 사례는 많다.
‘인터넷’이라는 말은 1990년대 초반부터 우리 사회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서양에서 들어온 기술이어서 그것을 가리키는 서양말이 따라 들어왔다. 처음 누군가 ‘인터넷’이라는 말을 썼다. 아마 학자이거나 공무원이거나 전자회사 고위 간부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는 이 말을 하면서 유식한 체 뽐내지 않았을까. ‘홈페이지’라는 말도 따라 들어왔다. 기업들은 저마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홍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홈페이지라는 말은 삽시간에 대중화되었다.
그런데 언젠가, 누군가 홈페이지라는 말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했다. 반란과 반동의 심리가 작동한 것이다. 과연 이 말을 이대로 쓰는 게 좋은가. 더 쉽고 고운 우리말로 바꿔 쓸 수는 없을까. 정말 대안은 없을까. 그렇게 시작한 의문과 의심은 널리 퍼져나갔고 마침내 ‘누리집’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홈페이지와 누리집은 아직 다투고 있는 듯하다. 공문서를 작성할 때 ‘홈페이지’라고 할 것을 ‘누리집’이라고 바꿔 쓰는 공무원이 늘어나고 있다. 끝내 누리집이 이길지 아니면 홈페이지라는 말이 이길지는 더 두고봐야 할 것 같다. 누리집 또는 홈페이지라는 말 앞에는 인터넷이라는 말이 붙게 되므로 홈페이지가 더 유리하지 않을까. 하지만 온국민이 별 생각없이 홈페이지라고 할 때 의심의 눈길을 던진 그 누구의 작은 노력이 큰 변화를 불러오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인터넷이라는 말에 의심과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직 없거나 있었더라도 대안을 찾지 못한 것 같다. 네티즌을 누리꾼으로 쓰자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천시라는 말은 인터넷, 홈페이지, 네티즌이라는 말보다 훨씬 쉬울 뿐만 아니라 그 어원을 따져보더라도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말이다. 그래서 이 말을 더 쉬운 말로 바꾸자고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바라볼지도 모른다. 그래도 더 쉬운 말로 바꿔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외국에서 들어온 물건이나 제도, 기술 따위에 외국말을 그대로 붙여 쓸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말을 만들거나 이미 있던 말을 가져다 쓸 것인가 하는 고민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공무원이거나 학자, 교수, 기업의 고위 간부들이라면 간단하게 새로운 말을 갖다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일반 언어대중이 그런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 훨씬 더디지만, 지게차, 사다리차에서 보듯이 말맛이 살아있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게 될 것이다.
오늘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는 보도자료를 뿌렸다. “자세한 내용은 학과사무실(055-772 -2667)이나 인터넷 홈페이지(http://tech.gnu.ac.kr)를 통해 문의하면 된다.” “지원서는 수시로 받는데, 경상대와 음악교육과 홈페이지(http://musicedu.gnu.ac.kr) 게시판에서 사업 관련 안내문과 서식 등을 내려받을 수 있으며 작성한 서류는 이메일(gnukbme@naver.com)로 제출하면 된다.” ‘홈페이지’는 ‘누리집’으로, ‘이메일’은 ‘전자우편’으로 바꿔 써야 했으나 바빠서였는지 혼이 나가서였는지, 아무튼 그러하지 못했다. ‘~를 통해’도 ‘에서’라고 바꿔 쓰는데 오늘은 그러하지 않았다. 기껏 ‘다운받을 수 있으며’를 ‘내려받을 수 있으며’로 고쳤을 뿐이다. 어제 봄비가 제법 내렸는데도 내 머릿속은 퍼석퍼석하게 말라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은 이런 나의 정신상태를 반성하는 글이다.
2017.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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