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는 국적이 있다. 우리가 한국어라고 하면 한국말과 한국말을 적는 한글을 가리킨다. 일본어라고 하면 일본말과 일본말을 적는 일본글(히라가나, 가타가나)을 가리킨다. 미국어라고 하면 미국말과 그 말을 적는 영어 알파벳을 가리킨다. 중국어라고 하면 중국말과 그 말을 적는 중국한자(간체자)를 가리킨다. 말에 국적이 있다는 말은, 어떤 말이 자기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쓰이게 되더라도 원래 태어난 나라가 있다는 말이다.
가령 우리가 텔레비전이라는 말을 국어처럼 쓰고 있고, 이 말을 두고 외국말이라고 시비 걸지는 않지만, 원래 이 말은 미국어(또는 영국어)에서 온 것이다. 텔레비전이라는 말의 국적은 미국(또는 영국)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다마네기, 오뎅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고 하는 까닭은 이 말의 국적이 일본이기 때문이다. 국적이 다른 말이 우리말에 섞이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막는 게 바람직하지도 않다. 어떤 학자들은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말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주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럴 듯하다.
‘국적 불명의 언어’라는 말을 쓴다. 어떤 말이 있는데 어느 나라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외계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아예 말이 아니라고 제쳐놓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 말글살이에서 두루 널리 쓰이니 무시할 수도 없다. 어떤 국적 불명의 언어는 더욱 널리 쓰이게 되고 드디어는 한국어라는 지위를 얻기도 한다. 표준어가 된다는 뜻이다. 말이 나고 자라고 죽고 하는 과정은 어쩌면 인생과도 같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바꾸거나 없애거나 하는 건 애당초 가당치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적을 알 수 없는 말이 저잣거리 술집에서뿐만 아니라 신문과 방송에까지 널리 쓰이는 건 시비 걸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국민이 다함께 시비를 걸면 그 말은 하루 만에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국민이 오랫동안 시비를 걸면 역시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것 또한 거의 불가능하다. 몇몇 국민이 아주 오랫동안 시비를 걸면 어떻게 될까. 국적을 알 수 없는 말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러한 말이 마구 생겨나는 것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말에 국적이란 원래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말이라는 것이 의사소통의 수단인 바에야 그것이 한국말이든 미국말이든 일본말이든 중국말이든 중요하지 않다. 손짓 몸짓도 언어의 한 형태라고 할진대, 사람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말을 놓고 국적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국수주의적 태도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겠다. 옳은 주장이다. 국적이란 아예 불필요한 논쟁거리일 뿐이고, 처음 어느 나라에서 생겨난 말이든 간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에 이바지하기만 하면 말로써 그 역할을 다했다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샤방샤방’이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박 아무개 가수가 부른 노래 가운데 이런 게 있다. “아주그냥 죽여줘요/ 누구나 사랑하는 매력적인 내가/ 한여자를 찍었지/ 아름다운 그녀 모습/ 너무나 섹시해/ 얼굴도 샤방샤방/ 몸매도 샤방샤방/ 모든것이 샤방샤방/ 얼굴은 브이라인/ 몸매는 에스라인/ 아주그냥 죽여줘요” 2008년 7월쯤 나온 노래라는데 제목이 ‘샤방샤방’이란다. 텔레비전, 라디오에서 보고 들을 때는 경쾌하고 신나는 음악이어서 그저 그런가 보다 했는데, 가사를 꼼꼼히 들여다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다. 혀끝을 찰 만하다.
어쨌든 ‘내가 찍은 한 여자는 얼굴도 샤방샤방하고 몸매도 샤방샤방하다. 모든 것이 샤방샤방한 이 여자에게 푹 빠졌다. 아주 그냥 죽을 지경이다.’는 내용이다. 그럼 ‘샤방샤방’이 무슨 말이냐? 얼굴과 몸매를 비롯해 모든 게 샤방샤방하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떻다는 말인가? 얼굴이라면 예쁘다, 귀엽다, 잘생겼다라는 뜻일 테고, 몸매라면 날씬하다, 잘빠졌다라는 뜻일 텐데 이런 것들을 아우르는 샤방샤방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누군가 국립국어원에 물었는데 “<표준국어대사전>이나 신어 목록에 나와 있지 않으므로 뜻풀이가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눈부심’이라는 뜻으로 눈에 띄게 예쁘고 화려한 모습을 나타내거나 ‘반짝반짝’이라는 의태어와 같은 의미를 나타낼 때, ‘샤방’ 또는 ‘샤방샤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답변해 줬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오픈국어사전에는 ‘눈에 띄게 이쁘다라는 의미의 의태어’라고 해놨다. 대중문화사전에서는 ‘<리니지 2>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 하나가 마법을 쓸 때 ‘샤방’이라고 하면 그때 스크린이 반짝인다. 이것을 보고 게임을 즐기는 네티즌들이 유행시켰다고도 한다.’고 설명해놨다.
짐작건대, 눈부실 정도로 눈에 띄게 예쁘고 화려한 모습인가 보다. 어름어름하긴 하지만 대강 뜻은 알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런 말이 바로 국적 불명의 말이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가 없고 설명을 듣고서도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알고 있을까. 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많은 팬들은 이 말 뜻을 알고 있을까. 언뜻 들으면 영어 같고 또다시 들으면 일본말 같기도 한데 우리말하고도 비슷하다.
샤방샤방이라는 말은 주로 연예인을 다루는 기사에 자주 등장한다. 쯔위 ‘샤방샤방한 미소’(마이데일리), 다현 ‘아침에도 샤방샤방’(마이데일리), 인피니트F 엘, “청량함과 샤방샤방함 보여주겠다”(텐아시아), 샤이니 민호 ‘샤방샤방 미소로 인사’(스타엔), 김제시보건소, 한방 샤방샤방교실 및 건강디딤교실 대상자 모집(투데이안)처럼 쓰이고 있다. 빛나다, 아름답다, 매혹적이다, 예쁘다, 화려하다, 귀엽다, 잘생겼다 따위의 뜻을 머금고 있는데, 상황에 맞게 바꾸어 쓸 수 있겠다. 샤방샤방은 멀지 않아 유행어, 신조어의 단계를 밟고 올라가 마침내 표준국어사전에도 오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정체 불명, 국적 불명의 말로서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을 안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낯선 외계어, 즉 국적 불명의 언어로 대접해 줘야 한다.
2017. 2. 1.
'우리말과 글을 보는 내 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빅 텐트? 큰 천막 안에서 뭐 하시려고? (0) | 2017.02.17 |
---|---|
초록초록한 봄에 가을가을한 날을 기다리다 (0) | 2017.02.13 |
최돈우 선생님을 따라 배우자 (0) | 2017.01.24 |
한글이 소리글자여서 겪는 수난 (0) | 2017.01.02 |
으으~ 싫다, 진짜! ‘무슨무슨 러’ (0) | 2016.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