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소리글자이다. 소리나는 대로 적고 적힌 대로 읽는다. ‘하늘’이라고 적으면 [haneul](하늘)로 발음한다. 그 자체가 소리이고 또한 뜻이다. 영어도 소리글자이다. 다른 말로는 표음문자(表音文字)라고 한다. 한자는 뜻글자이다. ‘하늘’을 ‘天’이라고 쓰고 [tiān](톈)이라고 읽는다. 뜻글자 가운데 글자 모양이 곧 뜻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아닌 것이 훨씬 더 많다.
세상에는 대략 400여 종류의 글자가 있다고 하는데 이를 크게 그림글자, 소리글자, 뜻글자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소리글자가 가장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 몇 가지 기본 글자만 익히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 한글의 경우 자음 14자, 모음 10자로 24자만 익히면 된다. 알파벳은 26자이다. 이에 반해 한자는 5만 자 정도를 배워야 제대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간체자로 바뀌어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아무튼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한글이 세계 최고의 문자라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한글은 우리말과 잘 어울리도록 창안되어 있지만 어느 언어이든지 한글로 쉽게 표기할 수 있다. 한글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와 음향을 원음에 가장 가깝게 적을 수 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공식 문자로 한글을 채택했다는 이야기는 그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유네스코가 세계 각국에서 문맹퇴치사업에 가장 공이 많은 개인이나 단체를 뽑아 매년 시상하는 문맹퇴치 공로상의 이름이 ‘세종대왕상’이라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한글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한글이 소리글자여서 겪는 수난도 만만찮다. 물론 한글이 겪는 수난과 모멸은 소리글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글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는 일부 배운 사람들의 얼빠진 정신상태 때문이다. 제것을 기리고 가멸지게 하려는 노력보다 딴 데 정신이 팔린 사람들 때문이다.
가령 ‘Do 드려라~ Job힐 것이다’라는 구호를 보자. 원래 하고 싶은 말은 ‘두드려라~ 잡힐 것이다’일 것이다. 취업을 앞둔 대학 4학년 학생에게 자신이 가진 능력을 믿고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취업의 문을 두드리면 마침내 취업에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좋은 구호를 표기하면서 영어를 우스꽝스럽게 섞어 적었다. 영어 ‘Do’가 ‘무엇무엇을 하다’라는 뜻이니, 취업준비생으로 하여금 가만히 있지 말고 뭐든지 하라고 부추기고 격려하는 느낌이 들어가게 됐다. ‘두드리다’는 뜻과 ‘무엇을 하다’는 뜻을 한꺼번에 표기한 것이다. ‘Job’은 ‘일, 직업’이라는 말이다. ‘잡히다’와 ‘직업’이라는 말을 동시에 나타냈다. 대단한 잔꾀이다. 취업을 앞둔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영어와 한글로 뒤섞인 이 구호를 보면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표시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편이다.
‘수高했3’이라는 말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재미있게 만들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본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을 격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첫 번째 다가오는 느낌은 ‘수고했다’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위하여 수년 동안 고생한 것이 눈에 선하다. 그다음 들어오는 느낌은 ‘고3’, 즉 ‘고등학교 3학년’이다. 수능 시험을 치르는 학생은 고등학교 3학년이니 수고했다고 하는 대상을 나타냈다. ‘수高했3’이라는 표현 속에 ‘올해 수능을 치른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여러분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라는 뜻이 담겼다. 대단한 발상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표시하는 게 정말 잘하는 짓인지 늘 의문을 품는다.
‘雪렌다’라는 표현도 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이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하겠지만 편집되어 있는 신문 지면을 보면, 스키장과 눈발이 한눈에 들어오므로,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도 ‘아하, 눈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타냈구나’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대략 3~5초 정도 걸린다. 우리말 ‘설렌다’와 ‘눈밭에서 스키를 타며 즐기는 것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마음’이 한번에 나타났다. 참 대단한 창조력이다. 나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정말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의심을 늘 하고 있다.
한글과 영어 알파벳과 중국글자를 제멋대로 뒤죽박죽 섞어서 두세 가지 뜻을 한번에 나타내는 이러한 기법은 주로 신문 편집기자들이 자주 쓴다. 가령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여러분 수고했어요’라고 말할 것을 ‘수高했3’이라고 간략하게 적음으로써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의 뜻도 전달하고 글자 수도 아낄 수 있다. ‘雪렌다’도 마찬가지로 ‘드디어 첫눈이 왔어요. 스키어 여러분 마음 설레시죠?’라고 할 것을 딱 한 단어로 갈무리해 버렸다. 그만큼 글자 수를 줄이면서도 의미는 제대로 전달했다고 환호를 지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 놓고 흐뭇해하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말장난, 글장난 들은 신문 제목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던 것인데 요즘은 이런저런 광고 문안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은 한글이 소리글자이기 때문이리라. 영어로 ‘무엇무엇을 하다’라는 뜻의 ‘Do’를 써놓았는데 읽기로는 ‘두’이므로 다음에 따라오는 ‘~드려라’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두드려라’로 소리나게 되는 것이다. 소리는 ‘두드려라’로 나는데 영어 ‘Do’ 때문에 ‘무엇을 하라’는 뜻도 한꺼번에 잡힌 것이다. 한글이 소리글자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수高했3’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고생하다’, ‘힘들이다’라는 뜻의 ‘수고’는 중국글자로 ‘受苦’ 이렇게 쓴다. 그런데 하나는 한글로, 하나는 고등학생을 가리키는 ‘高’를 쓰고 보니 ‘고등학생이 수고했다’는 뜻으로 연결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원리도 한글이 소리글자가 아니었더라면 상상하기 힘든 조어법이다.
주변을 자세히 돌아보면 이런 말장난, 글장난이 흔하디 흔하다. 기발한 발상, 탁월한 조어력, 창조적 표현력이라고 칭찬해 줄 만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게 과연 바람직한 현상인가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고 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잘 다듬어 빛내지는 못할망정 망가뜨리고 허물어뜨리고 짜부라뜨려 누더기로 만드는 건 아닌가 걱정하고 있다. 소리글자인 한글은 세계 최고의 문자라고 자랑하면서도 뒤돌아서서는 소리글자도 아니고 뜻글자도 아닌, 괴상망측한 문자를 재창조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나는 그런 눈길로 째려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 국민 가운데 이런 표현을 글 쓴 사람의 의도대로 곧바로 알아볼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합리적ㆍ기본적인 의심도 해본다. 초등학생이나 나이 많은 노인들은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우리 어머니 같은 칠순 노인은 아무리 설명해 줘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모든 말과 글을 모든 국민이 죄다 잘 알아듣는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려운 낱말이 섞일 수도 있고 학문용어나 전문용어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불가피하게 섞이게 되는 외래어도 많다. 하지만 멀쩡하게 쓸 수 있는 우리말과 글을 내버려두고, 팽개쳐두고 영어 알파벳과 중국글자를 이리저리 뒤섞어 잡탕글을 만듦으로써 많은 국민을 문맹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이러면서도 한글날이 다가오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자는 한글이다’라고 치켜세우겠지. 스스로 낯간지럽지 않을까, 궁금하다.
2017. 1. 2.
'우리말과 글을 보는 내 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샤방샤방’의 국적은 (0) | 2017.02.01 |
---|---|
최돈우 선생님을 따라 배우자 (0) | 2017.01.24 |
으으~ 싫다, 진짜! ‘무슨무슨 러’ (0) | 2016.12.26 |
자괴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 (0) | 2016.11.21 |
얼빠진 말 ‘멘붕’ (0) | 2016.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