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정치 일정대로라면 2017년 12월 19일경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었겠지만, 어쩌면 그보다 훨씬 앞당겨 4월 말이나 5월 초에 선거를 치를지도 모르게 됐다. 국회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등으로 현 대통령이 더 이상 직무를 이어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탄핵하였다. 대통령은 현재 직무가 정지된 채 청와대에서 놀고 먹고 있다. 앞으로 헌법재판소에서 국회의 탄핵을 인용하느냐 기각하느냐에 따라 차기 대선 일정이 왔다갔다하게 생겼다.
대통령 되고 싶은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여당ㆍ야당 할것없이 후보들이 스스로, 또는 떠밀려서(이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국회의원 총선거나 대통령 선거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 훌륭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가 싶어진다. 온통 애국자요, 서민의 친근한 벗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에 온몸 던질 준비가 되었다고 큰소리친다. 선거 끝나면 코빼기도 보이지 않겠지만, 일단 나라 발전시킬 백 가지 아이디어를 갖고 나오는 건 반갑다(고 해준다).
새누리당에서 바뀐 자유한국당에는 10명 가까운 사람이 출마를 선언했거나 저울질 중이라고 한다. 탄핵에 대한 책임을 크게 느껴야 할 정당으로서는 볼썽사납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야당에서도 너덧 명이 일찌감치 대권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을 한 분은 쪽만 판 채 낙마하였고 서울시장을 하고 있는 분은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더 큰 산이 된 듯하다.
대통령은 오로지 한 명을 뽑는 선거이다. 후보가 단 두 명이든, 수십 명이든 간에 당선의 영광을 안을 사람은 오로지 한 명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정치집단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작전이 나온다. 후보들 간에 서로 물고 헐뜯는 공방이 전개된다. 같은 당 소속 후보들끼리도 싸운다. 같은 당은 아니지만 야당끼리도 죽자사자 싸운다. 온갖 비리를 들춰내고 상상도 못하던 문제점을 이 잡듯 찾아낸다. 어제 한 말을 오늘 부정하고 오늘 한 말을 내일 뒤집는 게 능사다.
합종연횡이라는 말은 이전부터 많이 쓰던 말이다. 사전을 보면, ‘합종은 여섯 나라가 연합하여 진(秦)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말하고, 연횡은 여섯 나라가 각각 진나라와 화친하고 섬기는 것을 말한다. 현대에 와서는 복수의 사람이나 단체가 서로 연대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고 되어 있다. 중국 역사에서 가져온 말을 잘 써먹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정치권에서 저희들끼리 붙어먹고 배반하는 것을 가리킬 때 주로 쓰인다.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요즘은 ‘빅 텐트’라는 말을 아주 많이 언급한다.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수천 가지가 쏟아져 나온다. 대선 주자들 ‘지역’ 공략, ‘빅텐트’ 결집 시도 계속(엠비시), ‘분권형 개헌’ 손잡은 3인… ‘非文 빅텐트’ 다시 펼까(서울신문), 김무성·김종인·정의화 ‘빅텐트’ 불씨 살리나(영남일보), 김종인 등 분권형 개헌 공감대…‘빅텐트’ 다시 꿈틀?(케이비에스), 유승민 “보수후보 단일화가 ‘빅텐트’…국민의당도 염두”(연합뉴스)
‘빅 텐트’(big tent)는 무슨 말인가. 그냥 ‘큰 천막’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여러 곳을 찾아보던 중 이런 내용을 만났다. “‘빅 텐트’는 서커스에서 나온 말이다. 서커스단의 빅 텐트 내부는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어 각기 다른 쇼들을 동시에 공연할 수 있었는데, 이를 정치에 비유한 것이다. 정치에서 ‘빅 텐트’는 “다양한 파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큰 대의(大義)나 정책”으로, 주로 선거에서 승리를 위해 애용하는 것이다.” (다음 ‘생각의 문법’에서)
서커스를 보던 게 기억난다. 진주 개천예술제 할 때 서장대 밑 둔치에서 동춘서커스단의 공연을 본 적 있다. 안에 들어가 보면 천장에서는 공중그네를 타는 곡예사가 아슬아슬하게 재주를 부리고 있고, 그 아래 마당 한 가운데 모래밭에서는 코끼리 쇼가 한창이고, 또다른 한쪽에서는 어릿광대가 괴상망측한 옷을 입고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이런 서커스들은 동시에 진행되기도 하고 시간차를 두고 벌어지기도 한다. 관객들은 어디에 눈길을 줘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도 한다.
지금 정치권에서 이야기하는, 아니 어쩌면 정치권 스스로 이런 말을 한다기보다 언론에서 그렇게 불러주는 것 같지만, 빅 텐트라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참으로 부아가 치민다. 첫 번째, 꼭 이런 상황을 이야기할 때 외국말을 갖다붙인다는 것에서 기분 나쁘다. 정치에 대하여 항상 관심을 갖고 언론 보도를 열심히 챙겨보지 않는 사람들은 이 말을 알아듣기 힘들다. 나이가 어리거나 늙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포괄정당’이라는 말은 빅 텐트와 똑같은 말은 아니지만, 비슷한 개념이다. 특정 정당이나 계급, 또는 이념에 관계 없이 이러저러한 사람들을 포괄하는 정당이라는 뜻이니까. 중도주의 정당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인데,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어렵긴 마찬가지다. 후보단일화, 야권연대 이런 말도 많이 썼는데 요즘은 듣기 힘들다. 합종연횡이라는 말도 겨우 알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영어 공부 하게 생겼지 않나. 제3지대라는 말도 흔히 나오는데 그곳은 어디일까.
두 번째 빅 텐트를 운운하는 자들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국민이나 나라나 겨레가 아니라 오로지 대통령이라는 자리밖에 없는 것 같아 기분 나쁘다. 현재로서 당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제외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어떡하면 저 사람을 떨어뜨릴까 궁리하는 것 같다. 영남일보 제목에서 보듯, 김무성ㆍ김종인ㆍ정의화가 한 텐트 안에 들어가 재주를 부린다면 국민이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지에 대해서는 안중에 없다. 나라 발전 정책을 펼쳐놓고 비교하고 대조하고 비판하는 일은 아직은 없다. 아마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을 한다면, 나중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빅 텐트 운운하며 우르르 몰려다니고 이합집산하고 합종연횡하고 판을 이었다가 붙였다가 하더라도 그것은 선거만 끝나면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빅 텐트라는 말이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낯설다.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에서 아주 자주 듣고 보았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큰 천막 안에서 그들은 무슨 꿍꿍이를 부리고 있을까.
2017.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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